한국 난민 된 미얀마 탈영 군인, “미얀마 시민혁명은 현재 진행 중” 김영화 기자 양손이 가벼웠다. 무기와 짐은 내버려두었다. 2021년 3월14일 오전 10시, 린 텟 아웅 대위(당시 29세)는 조용히 군부대를 빠져나왔다. 중국, 타이와 국경을 맞댄 미얀마 북동부 샨주에 위치한 최전방 부대였다. 탈영 사실이 발각되면 최악의 경우 그 자리에서 사살될 수도 있다. 가까운 정글로 숨어든 린 텟 아웅 대위는 며칠을 홀로 헤맸다. 사흘 동안 물 이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해방 구역’이라 불리는 타이 국경지대에 발을 디딘 건 14일째 되던 날. 무모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에 이 미얀마 쿠데타 2년 ‘침묵시위’로 싸운다 양곤·마 감 (필명·미얀마 독립언론 기자)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이 지났다. 예전만큼 반군부 시위는 격렬하지 않다. 국제사회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그사이 미얀마 군부는 ‘군정 체제 굳히기’에 돌입했다. 미얀마 시민 저항은 이대로 실패한 걸까. 미얀마의 마 감 기자가 〈시사IN〉에 보내온 아래 기사는 국제사회가 가진 의구심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올해로 10년 차 기자인 그는 미얀마의 한 독립언론에서 쿠데타로 피폐해진 현실과 시민 저항을 보도했다. 군부에 맞서 ‘저항의 불씨’를 이어가는 미얀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미얀마 쿠데타가 일어난 지 2년째 되던 사형 집행 강행한 미얀마 군부, 그 다음 단계는? 김영화 기자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서 연락이 온 건 7월22일 오전이었다. 사형수 코 지미에 대한 면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지난해 10월23일 체포된 이후 그의 소식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가족들은 8개월간 지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피신 중인 아내 닐라 테인 씨를 대신해 지미의 여동생이 그날 오후 황급히 교도소를 찾았다. 죄수복 차림의 지미가 그곳에 있었다. 다만 쇠창살이나 유리창이 아니라 줌(Zoom) 화면 너머였다.1988년 8월 미얀마 민주화 항쟁을 주도한 ‘88세대’의 학생 지도자였던 초 민 유를 미얀마에서 ‘지미’라고 부른다. 걱정하 미얀마의 봄, 혁명의 우먼파워를 비추다 메리초 (필명·미얀마 시민기자) 메리초 씨는 미얀마 동북부 샨주에서 활동하는 기자다. 그는 쿠데타 발발 이후 시민기자로 뛰어들었다. “군이 기자들을 탄압한 이후로 누구도 거리에서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군부의 만행을 취재해서 이 혁명에 함께하고 싶다.” 전국 곳곳에서 무장투쟁이 확산되자 시민방위군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거기서 그는 수많은 여성 방위군들을 만났다. 최전선에 서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성 방위군들의 역경과 투쟁을 조명해야겠다고 다짐한 까닭이다. 아래는 메리초 씨가 여성 게릴라군들을 취재해 쓴 글이다.미얀 미얀마 최전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아세인 (필명·미얀마 시민기자) 3월27일 ‘미얀마군의 날’은 1945년 일본군에 대항해 무장 저항을 시작한 날을 기념하며 제정되었다. 공교롭게도 1년 전 이날, 군부 쿠데타 이후 최악의 유혈 참사가 벌어졌다. 반(反)쿠데타 시위를 위해 거리에 나온 시민들을 군부가 무차별 진압하면서 하루 사망자가 100명에 육박했다. 미얀마 시민들은 3월27일을 ‘저항의 날’이라고 이름 붙였다.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미얀마 상황은 여전히 극도의 혼란 속에 놓여 있다. 도시에서 기습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또 하나 심화되고 있는 저항운동은 시민방위군(PDF)의 무장투쟁이다. 특 [미얀마 쿠데타 300일] 여기서는 여전히 사람이 다치고 죽는다 마 감 (필명·<프런티어 미얀마> 기자) 마 감(29) 씨는 2013년부터 미얀마의 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후, 그는 소수민족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반인륜 범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아웅산 수치는 2017년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하고 침묵했다. 주류 언론에서는 정부를 비판하기 어려웠다. 그는 소수민족 지역 기반의 매체 〈힌타르 미디어〉, 독립언론 〈미지마〉 〈프런티어 미얀마〉 등으로 옮겨 미얀마 국경에서 벌어지는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탄압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2021년 2월1 [미얀마 쿠데타 300일] 시위하다 체포된 한 기자의 ‘수감일기’ 버마 툰 (필명·<미지마> 기자)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권력은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에게 이양됐다.”2월1일 미얀마 쿠데타는 군부 소유의 ‘미야와디 TV’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득표율 83.2%로 압승하자 군부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군부와 시민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쿠데타가 감행되었다. 문민정부 2기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미얀마가 군부독재라는 과거로 회귀한 지 300일이 지났다.쿠데타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이 군부의 무차별 공격을 받고 쿠데타, 300일이 지났다 김영화 기자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권력은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에게 이양됐다.”2월1일 미얀마 쿠데타는 군부 소유의 ‘미야와디 TV’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득표율 83.2%로 압승하자 군부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군부와 시민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쿠데타가 감행되었다. 문민정부 2기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미얀마가 군부독재라는 과거로 회귀한 지 300일이 지났다.쿠데타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이 군부의 무차별 공격을 받고 꽉 막힌 정치·외교의 연대, SNS로 투쟁하는 미얀마 시민들 김원장 (KBS 방콕 특파원) 기원전 146년. 지중해 무역 강국 카르타고가 로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페니키아인들은 중무장한 지상 최고의 군대에 참담하게 패배했다. 카르타고 인구 8할이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노예가 됐다. 그렇게 카르타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죽음의 장면을 기록할 사가(史家)도 모두 죽었다. 이 (전투가 아닌) 학살은 1500여 년 후 유럽에서 낡은 문서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만약 역사의 장면 장면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히틀러가 유대인과 집시를 가스실로 보내는 장면이, 1980년 5월 광주에 “ESG는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전혜원 기자 ESG라는 유령이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를 ESG 경영 확산의 원년으로 삼겠다”라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국민연금공단도 ESG를 외친다. 그런데 ESG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자명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까다로운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이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주제를 만나게 된다.ESG는 ‘환경·사회·기업지배구조(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의 약자다. 어떤 기업에 투자할지 선택할 때, 수익뿐 아니라 해당 기업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미얀마 쿠데타의 중심에는 Z세대가 있다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미얀마 청년 세대는 군부의 폭압적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며 동시대 다른 나라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잘 알고 있다. 스스로 선택할 자유에 대한 소신도 뚜렷하다.”미얀마 청년 운동가 ‘틴자 슌레이 이’는 ‘Z세대의 끈질긴 저항 동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대 후반의 슌레이는 엄밀히 말하면 ‘턱걸이 Z세대’ 또는 밀레니얼 세대에 가깝다. 그러나 미얀마의 ‘Z세대’ 담론 자체가 ‘밀레니얼-Z세대(MZ세대)’를 두루 포괄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밀레니얼 세대의 경험과 리더십에 Z세대의 활동력 미얀마 언론인 제1원칙, ‘계속해서 보도할 것, 붙잡히지 말 것’ 김영화 기자 ‘10년 전으로 퇴보하다.’ 국제 언론감시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지난 4월20일 미얀마의 언론 위기를 설명한 한 문장이다. 2021년 미얀마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40위. 지난해보다 한 단계 내려갔다.10년 전인 2012년은 민주화 이행이 막 시작되던 해였다. 검열과 체포 위협에서 벗어나 보도 역량을 확장해가던 미얀마 언론인들은 2021년 2월1일 이후 어둠의 시기를 맞았다. 더 이상 길거리에서 ‘PRESS(언론)’라고 쓰인 조끼를 입거나 카메라를 들 수 없다.10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바로 독립언론의 존재 코로나19 확산, 미얀마 군부의 새로운 무기 되다 세인트 (필명·미얀마 독립언론 기자) 미얀마에서 다시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대유행이 발생했다. 〈시사IN〉 제715호 ‘포스코가 미얀마 군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 기사를 기고한 언론인 세인트 씨도 7월15일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가족도 모두 확진되었다. “양곤 도시 전체가 감염되고 있다. 군부가 의료자원을 통제해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다.” 쿠데타 이후 코로나19 백신 도입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백신접종 기회가 없었다. 7월18일 세인트 씨는 미얀마 군부의 끝없는 위협, 결국 무기 든 시민들 제이 파잉 (미얀마 사진기자 모임(MPA) 편집장) 제이 파잉 씨(35)는 미얀마 사진기자 모임 ‘MPA(Myanmar Pressphoto Agency)’의 편집장이다. 사진기자 17명이 소속된 이 비영리 매체는 지난 넉 달간 미얀마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쿠데타 시위 현장을 최일선에서 기록했다. 30만명이 팔로하는 MPA의 페이스북에는 쿠데타 초기 대규모 집회부터 총격 현장, 게릴라 시위 등이 매일 업로드되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MPA 기자 2명이 양곤과 만달레이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제이 파잉 씨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릴 것이다”라고 한국 정치가 미얀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김영화 기자 미얀마 사태 초기, 대한민국 국회는 꽤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얀마 시민 수백만 명이 대규모 파업 시위를 벌인 2월22일로부터 사흘 뒤 국회에서 ‘미얀마 군부 쿠데타 규탄 및 민주주의 회복과 구금자 석방 촉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재석 257명 중 찬성 256명, 기권 1명이었다. 무력 사용 즉각 중단, 구금된 정치인 석방, 현지 체류 중인 교민에 대한 안전보호 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외국의 인권침해 사안에 여야가 한뜻을 모은 것은 2013년 이라크의 쿠르드인 집단학살, 2015년 프랑스 파리 테러 공격 이후로는 처음이다. 결 포스코가 미얀마 군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 세인트(미얀마 독립언론 기자) 세인트 기자(가명)와 연락이 닿을 때마다 그의 거처가 바뀌어 있었다. “군인들이 쫓아와서 숨어 있었다(5월15일).” “시민방위군(People Defense Force)에 방어 장비를 공급하던 동료 한 명이 어제 체포되었다(5월17일).”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5월18일).” 툰 민 기자는 마감이 늦는다며 미안해했다. 그가 속한 언론사는 군부가 폐쇄한 독립 언론 중 한 곳이다. 회사가 문을 닫은 후, 군경을 피해 인터넷을 찾아다니며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Myanmar Now)〉 등에 기고 중이다 한국·홍콩·타이·미얀마, 민주주의 열망하는 4개국 청년이 만났다 김영화 기자 미얀마를 생각하면 늘 벗어나고 싶었다. 미얀마인 유운 씨(22)에게는 크고 작은 차별이 도처에 깔려 있는 곳이었다. 미얀마는 다종교·다민족 국가이지만 불교도와 버마인이 주류다. “미얀마 신분증에는 지역과 종교, 민족이 적혀 있어요. 이게 사람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요.” 군부독재, 아웅산 수치, 로힝야족 학살 같은 ‘민감한’ 주제는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가능한 한 빨리 해외로 나가자고 다짐했다. 당시 아이돌그룹 ‘워너원’의 팬이었던 그는 2018년 한국 유학을 선택했다. 3년 뒤인 2021년 2월, ‘쿠데타’라는 사건을 만났다 “끝까지 해야 써. 근디… 너무 희생자가 많이 나오잖아요” 이명익 기자 “미얀마가 처음에 시작할 때 광주같이 했잖아요. 그란디 그렇게 희생자가 늘어나고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저것을 워쩌케 해야 쓸까? 계속하란 소리도 못하겄고 하지 마란 소리도 못하겄고. 그래도 도청에서 끝까지 싸우고 나왔기 땀시 5·18이라는 존재가 있지 그렇게 안 했으믄 없어. 저 사람들도 끝까지 해야 써. 근디 이것이 끝까지 하믄 너무 희생자가 많이 나오잖아요, 잉. 그 걱정일 뿐이여, 그 걱정일 뿐이여….”김길자씨(82)는 요즘 다시 41년 전 광주로 돌아간 느낌이다.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싸운 아들이 주검으로 발견된 이후 어머니 이제 미얀마 정치인이 목숨 걸고 싸울 때다 웨 노에 흐닌 쏘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 활동가) 어느 날 불쑥 내 삶에 끼어든 쿠데타라는 괴물과 싸움을 시작한 지 100일이다. 쉽게 끝나지 않을, 희생이 따를 싸움이라는 것을 짐작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 800여 명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과연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100일간의 반쿠데타 저항운동 속에서 보여준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와 열망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60여 년 동안 국민 위에 군림하며 국민을 탄압해온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얀마의 민주화를 응원한다는 것 김영화 기자 미얀마 사태가 3개월째로 접어들었다. 대규모 집회가 게릴라전으로 바뀌었고 해외에서는 민주 진영을 중심으로 한 국민통합정부(NUG)가 출범했다.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로 인한 사망자 수가 800명을 바라보는 동안 상황을 전환할 만한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민간인 학살을 멈추라는 당연한 요구부터 유엔의 R2P(보호책임 원칙) 결의, 국민통합정부(NUG)의 정식 인정 등 국제사회를 향한 개입 요구는 미얀마 국내외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에 가로막혀 있다(〈시사IN〉 제709호 ‘얼마나 더 죽어야 국제사회가 움직일 것인가’ 기사 참조).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