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6일 〈시사IN〉 편집국에 모인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유운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 활동가, 장준영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교수(왼쪽부터)가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며 세 손가락을 들었다. ⓒ시사IN 조남진

미얀마 사태가 3개월째로 접어들었다. 대규모 집회가 게릴라전으로 바뀌었고 해외에서는 민주 진영을 중심으로 한 국민통합정부(NUG)가 출범했다.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로 인한 사망자 수가 800명을 바라보는 동안 상황을 전환할 만한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민간인 학살을 멈추라는 당연한 요구부터 유엔의 R2P(보호책임 원칙) 결의, 국민통합정부(NUG)의 정식 인정 등 국제사회를 향한 개입 요구는 미얀마 국내외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에 가로막혀 있다(〈시사IN〉 제709호 ‘얼마나 더 죽어야 국제사회가 움직일 것인가’ 기사 참조).

미얀마의 민주화를 응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유혈 사태를 멈추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전부인가? 시위가 잦아들고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미얀마 정세가 안정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군부 통치 종식’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반세기 넘게 미얀마를 쥐락펴락해온 군부가 규탄 성명 몇 개로 권력을 내려놓을까. 군부를 끌어내리기 위해선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협상 테이블에 앉혀야 하는데 중·러의 반대로 유엔은 움직이지 못하고 내정불간섭 원칙을 고수해온 아세안(ASEAN)은 그럴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 아웅산 수치와 우 윈 민을 최고 지도부로 하는 국민통합정부(NUG)는 소수민족 무장세력과 연방군을 창설하겠다고 했지만, 미얀마는 70년 넘게 소수민족 갈등을 겪었고 아웅산 수치와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집권 5년간 이 문제를 건드리지도 못했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세계 시민들의 염원보다 좀 더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놓여 있다. 미얀마 사태가 장기화되는 이유, 국제사회의 개입이 어려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미얀마의 군부 통치 역사와 미얀마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응원한다는 것은 미얀마의 봄이 자판기 두드리듯 쉽고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님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쿠데타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미얀마 시민들에게는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압박과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4월26일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의 윤 와디 웅 카잉 민트(활동명 유운),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장준영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교수가 〈시사IN〉 편집국에 모였다. 유운 씨는 이번 미얀마 시위의 당사자로 매주 군부 규탄 또는 희생자 추모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이재현 연구위원은 동남아시아 국제관계를 연구한 전문가로 미·중 관계 속 미얀마와 아세안의 역할을 연구했다. 미얀마 현대정치 70년사를 담은 〈하프와 공작새〉(2017) 저자 장준영 교수는 군부독재, 아웅산 수치와 소수민족 등을 연구한 미얀마 전문가다. 미얀마 사태는 어떤 정세 속에 놓여 있을까. 미얀마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까. 각기 다른 관점과 고민을 가진 세 패널과 함께 ‘미얀마의 봄’을 좀 더 깊숙이 이해해봤다.

미얀마 쿠데타가 발생한지 100일이 지났다.

장준영:시위의 전국적인 규모를 놓고 보면 1988년 항쟁이 떠오른다. 그때는 기간이 길지 않았고 소수민족이 참여하지도 않았다. 이번 시위는 청년들이 지속적·산발적으로 다양한 시위 형태를 이끌어간다는 점이 이전과는 크게 다르다. 문민정부 집권 시절에 민주주의의 맛을 봤기 때문에 더욱 더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MZ 세대의 생명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유운:쿠데타가 발생하고 처음에는 참석하는 토론회마다 ‘시민이 승리할 것이다’라고 의심 없이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의문이 든다.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지쳐가고 있고, 불시 검문이나 탄압도 심해졌다. 국영방송에서 고문당한 청년 시위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겁을 준다. 4월16일 국민통합정부(NUG)가 출범했는데 우리는 이들의 말보다 행동을 기다린다. 성명문을 발표하지만 인터넷을 닫으면 뭘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가 처음 출범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시민 보호를 위해 무엇을 했나 묻고 싶다. 게다가 NUG의 국방차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로힝야 학살 당시 이를 지지했던 사람이라 소수민족 입장에서는 ‘제2의 민 아웅 흘라잉(로힝야족 학살 사건의 책임자이자 이번 군부 쿠데타 주도)’이 되는 게 아닌지 우려한다.

시위 초기의 기대감이 의심과 좌절로 바뀐 것 같다.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재현:개인적으로 이번 미얀마 사태를 지켜보며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느꼈다. 미얀마는 2011년 군부 주도로 개혁개방을 시작했고 2015년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순탄치는 않겠지만 이제는 민주화 방향으로 가겠구나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군부가 전면에서 퇴장만 했지 군부의 정치 참여를 허용한 헌법도 그대로이고 쿠데타 위험은 늘 존재했다. 아웅산 수치 정부가 군부와의 권력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역량을 가졌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따져보지 않았다. 2021 쿠데타가 발생한 상황에서 2010년대 미얀마가 겪었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연구자로서 고민되는 주제다.

4월24일 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카르타를 찾은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총사령관. ⓒAP Photo

4월24일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렸다. 아세안이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을 초청한 것을 두고 학살 책임자를 공식 외교무대에 초청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아세안의 합의안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이재현: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아세안이 미얀마 정부 대표로 초청한 건지 쿠데타 총책임자로서 증인을 출석시킨 건지 확실치 않았다. 후자가 되기를 바랐는데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전자였던 것 같다. 아세안이 총 다섯 가지 사항에 합의했는데(미얀마의 즉각적 폭력 중단, 평화적 해결 위한 대화, 아세안의 대화 중재, 인도적 지원, 특사와 대표단 방문), 그 직전에 나온 브루나이 의장 성명을 봐야 한다. 두 쪽 분량 중 코로나19와 경제협력 방안을 언급하고 미얀마 사태 관련 이야기는 맨 뒤에 두 단락뿐이다. 이번 특별정상회의가 미얀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다고 하지만 미얀마 건은 ‘원 오브 어젠다’였다.

합의안도 예상보다 수위가 낮다. 아세안이 미얀마 사태를 위해 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다. 첫 번째가 단순 중재. 군부와 시위대 측을 모아서 ‘잘 해결해보자’ 하는 정도의 봉합으로 끝내는 거다. 중요한 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 그 와중에 벌어진 시민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아세안은 절대로 여기까지 못 갈 거다. 문제 해결보다는 문제 봉합이다. 희생자를 더 나오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아세안의 내정불간섭 원칙 때문인가?

이재현:내정불간섭 원칙은 아세안 회원국들이 민감한 주제를 피하려고 대는 핑계다. 싱가포르와 타이는 미얀마 교역 2~3위 국가다. 미얀마 군부와 연결된 경제적 이익, 이해관계 때문에 강한 제재를 꺼려 한다. 그때마다 내정불간섭 원칙 뒤에 숨는 거다. 그게 아세안이 가진 한계다.

장준영:국민통합정부도 아세안 합의안을 환영한다고 했지만 상당수 현지 언론들은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타임라인을 어떻게 설정할 건지 나와 있지 않다. 누구를 특사로 임명하고, 누구에게 인도적 지원을 할 것인가. 구체적인 방법과 시기가 결여된 합의안이 아무런 효력이 없는 이유는 군부의 관행 때문이다. 미얀마를 오랫동안 봐온 연구자로서 ‘거북이 전략’에 비유하고 싶다. 천천히 가는데 외부의 위협이 있으면 사지를 껍데기 속으로 숨긴다. 국제사회가 압력을 행사하면 “우리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바쁜 날을 보내고 있으니 잠시 참아달라”며 쏙 빠진다. 아세안 입장에서도 명분 쌓기용이었다고 보인다. 유엔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것보다 더 많이 했다고 생색낼 수 있는 거다(4월27일 미얀마 군부는 “상황이 안정된 뒤 아세안의 건설적 제안을 주의 깊게 고려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아세안이 이전에도 특사를 보낸 적이 있나?

이재현:아세안이 이번에 움직인다면 미얀마 문제에 관한 세 번째 봉합이다. 1997년 미얀마가 아세안에 가입할 때 군부독재 정권을 끌어들인다는 국제사회 비판에 직면했다. 그때 아세안은 ‘건설적 관여(Con- structive Engagement)’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밖에 계속 내버려두면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아세안에 끌어들여서 대화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1년에 군부가 개혁개방을 주도하기 전에 미얀마 내부에서 뭐가 바뀌었나. 이게 아세안이 문제를 덮어놓고 봉합한 첫 번째 사례다. 두 번째는 2006년 미얀마가 아세안 의장국 차례가 되었을 때다. 그때도 유럽과 미국에서 압박을 가하니까 아세안 국가들이 미얀마 군부와 뒤에 가서 얘기했다. 그 결과 형식적으로는 미얀마 군부가 의장국 순서를 건너뛰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아세안 특사가 파견된다면, 미얀마 군부의 목을 잡고 문제를 해결할 정도의 무기를 들고 가야 할 텐데 내가 보기에는 회의적이다. 군부가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면 아세안 전체가 경제제재를 하겠다거나 아세안에서 퇴출시키겠다고 했을 때, 미얀마가 당장이라도 큰 타격을 입는 상황이어야 하는데 아마 별 지장이 없을 거다. 중국이라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서다. 아마 한두 달 뒤 시위가 잦아들 때쯤 아세안 특사가 미얀마에 가서 미얀마 군부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 정도일 것이다. 쿠데타나 희생자에 대한 군부의 책임을 묻지 않고 세 번째로 대규모 봉합이 이뤄지는 거다.

유운:미얀마 시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도 그 점이다. 시민들 의견 수렴 없이 민 아웅 흘라잉과 아세안 사이의 합의로 끝나는 것. 사실 1988년 항쟁, 2007년 사프란 혁명 때도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군부는 여전히 과거를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말한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건 민 아웅 흘라잉을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이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다. 군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처벌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죽어간 희생자 800여 명과 가족들, 체포된 3000명은 어떻게 되나. 단지 시위와 유혈 사태가 멈추기만 하면 되나. 우리는 정의와 민주주의를 원한다.

장준영:군부가 제도권 정치에서 떠나는 게 맞다. 그런데 아무런 보장도 없이 다 내놓고 나가라 하면 군부가 과연 움직일까? 군부는 반세기 이상 미얀마를 통치했다. 거대한 이익공동체가 된 군부를 해체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무조건 나가라고 할 게 아니라 군부세력 중 개혁적인 인물과 연합해 15~20년 목표로 해서 타협안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일정 몫의 지분을 보장해주면서 퇴로를 만들어주는 거다.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이유가 50년 전이든 지금이든 무조건 국가의 위기, 연방의 수호다. 군부가 더 이상 연방의 수호라는 구호를 내걸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국제사회 개입이 어렵다면 국내적으로는 어떨까. 국민통합정부(NUG)가 소수민족 무장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연방군 창설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는데.

유운:미얀마는 100여 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1962년 쿠데타 이후 70년간 소수민족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 아웅산 수치는 2008년 제정된 헌법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 말을 인정하지만 소수민족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태도도 보이지 않았던 점은 아쉽다. 미얀마라는 나라는 버마족의 나라가 아니라 옛날부터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아온 연방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권을 보호했어야 한다. 이번 국민통합정부(NUG)가 연방민주주의헌장을 냈지만 거기에도 무장단체 지도자들이 만족할 만한 조건이 없었다. 지금 소수민족들이 국민통합정부를 못 믿는 게 당연하다.

이재현:군부가 내거는 ‘연방 수호’라는 게 결국 소수민족 문제이고, 해결되지 않는 국가 정체성 문제를 건드린다. 버마족의 나라인가 아니면 미얀마인의 나라인가? 이 정체성 이슈를 1962년 군부는 무력을 통해서 해결하려 했다. 아웅산 수치가 5년간 집권하면서 소수민족들에게 과연 무엇을 해주었나. 군부와 다르게 소수민족을 통합하고 같이 끌고 가려 노력했나? 소수민족들이 보기에는 군부는 총칼 세워 탄압하고 아웅산 수치는 방치했으니 군부나 NLD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 처지에서는 ‘우리가 왜 굳이 전투를 일으켜서 희생을 감수해야 하나. 버마족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연방군 창설에 회의적이다.

4월8일 미얀마 양곤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사진을 든 시위대가 군부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 Photo

국내에서도 문민정부와 아웅산 수치 고문에 대한 평가와 성찰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겠다.

장준영:2017년과 2018년 보궐선거가 있었는데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NLD가 다 졌다. NLD는 갈등 해결에 관심이 없었고 철저히 버마족 중심의 정당이었다. 젊은 층 사이에서는 아웅산 수치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아웅산 수치를 비판하면 ‘친군부’로 낙인찍히거나 미얀마 민주화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다. 만약 이번에 아웅산 수치가 다시 절대권력을 누리는 구체제로 돌아간다면 군부가 컴백하는 것만큼이나 민주주의 퇴보가 아닐까.

이재현:아웅산 수치 여사가 미얀마의 정치적 변화에 공헌한 부분이 있고, 1988년 이후 군부에 의해 박해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아웅산 수치를 놓아주고 넘어서지 않으면 미얀마 민주화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다. 식민 지배를 겪은 동남아 국가들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민족주의 운동,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거기에 민족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베트남의 호찌민, 미얀마의 아웅산 장군 같은. 이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우상화되고 신격화된다. 독립 후 정치지도자나 대통령이 되는데 문제는 이 지도자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카르노, 호찌민, 아웅산에 대한 비판은 곧 국가에 대한 비판이 되고 민족에 대한 반역으로 인식된다. 거기서부터 아시아 국가의 권위주의 통치가 시작된다. 정치적 반대 목소리를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통합’의 이름으로 억누른다. 아웅산 수치도 마찬가지다. 독립운동 지도자는 아니지만 군부와 투쟁하면서 신격화되었다. 수치를 중심으로 한 반군부 투쟁도 이 점을 인식하고 넘어서지 못하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4월13일 중국 국기를 불태우고 있는 미얀마 양곤 시위대. ⓒAP Photo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군부의 뒷배’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왜 미얀마를 포기하지 못하나?

이재현:일차적으로 보면 중국 처지에서 미얀마는 적대적인 세력이 국경에 접근할 수 있는 요충지다. 중국 국경 보호와 군사적·경제적 이익 보장을 위해 미얀마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특히 중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찬성표를 던지면 미·중 간의 대결에서 중국이 한발 뒤로 물러서게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바이든 행정부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시도가 훅 들어올 거라고 중국은 생각할 것이다.

유운:중국은 지금까지 쿠데타라는 표현을 안 쓴다. 미얀마 시민들이 계속 요구한 유엔 R2P 결의도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멈춰 있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족 탄압 문제 같은 내부 문제가 건드려질까 봐 미얀마 사태를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문제는 중국이 미얀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미얀마 시민들은 현재 중국산 제품을 불매운동하면서 저항하고 있는데, 중국산 제품을 아예 안 쓰는 건 불가능하다.

이재현:미얀마와 중국의 관계는 아웅산 수치 정부가 들어온 후 더욱 긴밀해졌다. 첫 민간 정부로서 퍼포먼스를 보여야 했고 가장 눈에 띄기 쉬운 건 해외 자본, 투자 유치, 경제성장 같은 것들이다. 미국과 중국 두 개를 놓고 봤을 때 아웅산 수치 정부가 어디서 기대할 수 있을까. 100% 중국 쪽이다. 로힝야 문제를 안고 있는 아웅산 수치로서는 국제사회 나가면 듣는 건 비판이다. 중국 쪽에서는 로힝야 문제로 괴롭히지도 않고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중국 쪽으로 기울게 된다.

장준영:만약 미·중 관계가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면 중국의 협조를 기대하거나 중국이 중재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재현:그렇다. 미얀마 군부에는 역설적으로 미·중 갈등 상황이 완전 꽃놀이패다. 1980년 광주 같은 경우는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지하다 어느 순간 손을 딱 떼버리면 군부가 어디 기댈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련으로 가겠나 중국으로 가겠나. 그때는 냉전 시기였고 두 블록이 완전히 나뉘어 있었다. 블록 내 맹주에게 신임을 잃으면 끝나는 거다. 미얀마 군부는 상황이 다르다. 중국과 미국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중국 쪽에 갔다 미국 쪽에 갈 수도 있고 대안이 있다.

미얀마 사태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까? 미얀마의 시민 저항이 아시아 민주주의에 어떤 함의를 가질지 궁금하다.

장준영:쿠데타가 일어난 그날부터 머릿속에 되뇌는 문구가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던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말이다. 사실 미얀마 연구자로서 비관적이다. 군경과 시위대 둘 다 지쳐가고 있지만 밀고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시민들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외부의 개입 없이 지금 상태로 계속 가면 아마 시들시들해지면서 시위가 끝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연방군이 창설돼 내전으로 가면 중국 국경 지역이 공격받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 손해를 입게 되면 중국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군부를 직접 불러 미얀마 사태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할 수도 있다.

이재현:미얀마 사태가 아시아 민주화의 변곡점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미얀마 쿠데타 이후 밀크티 동맹이라 불리는 연대가 타이와 홍콩에서 일어났다. 개별 국가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을 때 아시아 민주주의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은 다들 어려운 상황이다. 미얀마도 군부가 현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좀 더 높고, 홍콩은 중국 때문에 안 되고, 타이도 권위주의 통치가 장기화되고 있다. 아시아 민주화 물결은 1986년 필리핀, 1987년 한국,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타이완, 1998년 경제위기 이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민주화를 말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수 있으나 한국·인도네시아 등을 빼놓고는 성공한 케이스가 별로 없다. 그런 과거를 놓고 보면 미얀마와 홍콩·타이가 아시아의 큰 물결이 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다.

유운:미얀마인끼리도 그런 질문을 많이 한다. 이거 언제 끝나냐고. 군부가 이대로 권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해도, 이길 때까지 싸우면 시민이 이긴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누가 공공의 적인지 알게 되었고, 버마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 자체가 큰 변화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아웅산 수치를 지도자로 다시 세우려는 NLD 지지 운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통합정부(NUG)가 지금 시위를 이끌고 있는 시민 세력들을 잘 대변하고 소수민족들의 신뢰를 다시 얻기를 바란다.

장기전으로 가는 미얀마 사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재현:국제사회가 미얀마 군부 비판은 쉽게 하지만 정작 중국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중국에 대한 조직화된 압박이 필요하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놓고 비난받지는 않으니까 내정불간섭 존중한다고 하는 건데, 누가 하나둘 나서서 ‘너네들이 미얀마 문제 해결하는 데 키를 쥐고 있으니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라’ 요구하고 압박이 세지면 상황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장준영:사실 한국 사회가 미얀마에 유난히 큰 관심을 보였다.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차원의 대응도 이전과는 다르게 적극적이었다. 이 동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군부가 집권하게 되거나 전시체제로 돌아가더라도 군부 압박을 지속해야 한다. 미얀마 군부도 한국과의 끊을 놓지 않으려 할 거다. 중국·유엔·아세안 등 미얀마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에게 끊임없이 부담을 안겨야 한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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