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쿠데타에 반대하는 양곤 시민들이 소규모 플래시몹 형태의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Photo

마 감(29) 씨는 2013년부터 미얀마의 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후, 그는 소수민족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반인륜 범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아웅산 수치는 2017년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하고 침묵했다. 주류 언론에서는 정부를 비판하기 어려웠다. 그는 소수민족 지역 기반의 매체 〈힌타르 미디어〉, 독립언론 〈미지마〉 〈프런티어 미얀마〉 등으로 옮겨 미얀마 국경에서 벌어지는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탄압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2021년 2월1일 쿠데타 발발 이후, 수많은 미얀마 언론인들은 탄압을 피해 타이와 인도 국경을 넘었다. 마 감 씨는 10개월째 양곤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민 저항운동을 취재하고 있다. 메신저 ‘시그널’로 연락이 닿은 11월19일, 그는 “군사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쿠데타 반대 거리 시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 감 기자가 직접 담아낸 쿠데타 300일, 미얀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2021년 초만 해도 사람들은 각자의 목표가 있었다. 나의 경우 올해 좀 더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2월1일 군부 쿠데타는 모든 목표와 계획을 바꾸어놓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고, 사람들은 원치 않는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쿠데타 직후 가족들의 안전을 생각해 집을 떠났다. 코로나19 3차 유행이 진행된 지난 몇 달 동안 집에 계신 어르신들이 걱정되었지만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1년간 내가 쓴 대부분의 글은 숨진 시위자들의 부고 기사였다. 동료 언론인과 취재원들은 감옥에 갔다. 나는 신분을 감춘 채 노트북을 숨기고 다닌다. 매 순간 불안과 걱정, 두려움에 직면한다.

미얀마 군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지 막 300일이 지났다. 11월에도 양곤·만달레이 등 대도시에서는 거의 매일 플래시몹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독재 반대’라는 글자가 쓰인 피켓을 들고 예고 없이 거리에 나타나,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 동안 함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한다. 그러고는 군경이 도착하기 전에 재빨리 도망치거나 인근 주택가에 숨는다. 때로는 수백 명이 참여한다. 양곤에서 플래시몹 시위를 주도하는 산차웅 지역 총파업위원회 대표 에러 씨(가명·25)는 “5분짜리 ‘쇼’를 준비하는 데 5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실 플래시몹 시위가 진행되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소셜미디어에 게시한다.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미얀마의 반독재 운동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다른 시민들도 반쿠데타 시위에 냉담해지지 않도록 플래시몹 시위를 계속할 작정이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다소 멀어졌지만 미얀마에서는 거리 시위도, 체포도 끝나지 않았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11월27일까지 군부에 의해 체포된 사람은 1만517명, 사망자는 1295명이다. 11월에만 1000여 명이 체포되고, 73명이 사망했다. 군은 수만 명이 모이는 시위는 물론이고 몇 분간의 플래시몹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건, 그 나라가 군사통치하에서 혼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10월29일 미얀마 쿠데타 군부의 포격과 방화로 불에 탄 친주 탄트랑 마을. ⓒAP Photo

무장투쟁의 한 형태인 시민 게릴라군도 미얀마 전역에서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국경지대의 소수민족 무장단체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청년들이 5월 이후로는 도심에 있는 경찰서, 군대, 관공서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권총도 직접 제조하고 있다. 폭탄이나 총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은 삶의 방식이 되었다.” 예전엔 공과대 학생이었던 쩌쩌 툰(가명·24) 씨는 현재 시민 게릴라군의 일원이다. 대부분 20대 초중반 청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지만…

지난 9월7일 미얀마의 민족통합정부(NUG)는 쿠데타 군사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정권의 모든 통치 기구를 목표로 삼고, 모든 방식을 동원해 군부를 공격하라고 시민들에게 주문한 것이다. 이틀 뒤인 9월9일 시민 게릴라군의 또 다른 조직원은 양곤 산차웅 지역에서 군부대가 차량 폭탄 공격을 받아 많은 군인들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쿠데타 군부가 주축이 된 국가평의회(SAC)는 사상자 수를 따로 공개하지 않았다. 시민 게릴라군은 국가평의회의 자금줄인 국영 전기회사도 습격했다.

미얀마 군부가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하는 노동자를 탄압하면서 파업의 동력은 전보다 많이 위축되었다. 시민불복종운동은 공무원·의사 등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이 군부의 국정 운영을 방해하기 위해 파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엔 군사독재를 원하지 않는 공무원들까지 더 이상 파업에 동참하려 들지 않는다. 생활고 압박과 안전 때문이다. 국영 전기회사에서 일하는 코 아웅 오 씨(가명)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에겐 두 아이가 있다. 아내도 실업자다. 지금은 공무원 주택에 살고 있는데, 만약 내가 일을 그만둔다면 가족 모두가 주거지를 잃게 된다.” 코 아웅 오 씨에게 지금은 20년 넘은 공무원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다. “나는 매일 내 회사에서 언제 폭탄이 터질지 걱정한다. 다른 한편으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런 상황의 주범은, 쿠데타를 일으킨 민 아웅 흘라잉이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국제사회의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4월 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은 즉각적인 폭력 중단, 아세안 특사 임명 등을 약속했다. 10월 아세안 정상회의는 민 아웅 흘라잉의 참석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 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군은 친주, 사가잉주, 카야주 등 소수민족 지역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였다.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으며 NLD 출신 정치인들의 집을 수색했다. 급기야 지난 8월1일 민 아웅 흘라잉은 2022년으로 예정됐던 총선 시점을 그다음 해인 2023년 8월로 미뤘다. 그리고 스스로 과도정부의 총리에 올랐다. 민 아웅 흘라잉과 군 수뇌부는 장기 집권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군이 임명한 선거관리위원회는 비례대표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군 수뇌부가 의회에 다수 진입한다. 다음 선거에서 지더라도 민 아웅 흘라잉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어둠의 시기가 길어지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 10월 미얀마에 대한 아세안 측의 참석 불허 결정을 의식한 듯, 정치범 1316명을 석방했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정치인과 학생 지도자들이 수감 중이다. 플래시몹 시위자와 게릴라군이 군부에 붙잡히면 비인간적인 심문과 긴 징역형을 감수해야 한다.

독재자들의 공통된 특성

지난 11월17일과 18일, 양곤에서는 NLD 출신 국회의원 표 제야 토를 비롯한 청년 시위자 47명이 도심에서 게릴라 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표 제야 토의 체포 당시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의 얼굴에 멍 자국이 선명하다. 또 다른 최악의 사건은 11월22일 발생했다.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19세 코 폰 민트 아웅 씨의 사연이다. 그의 아버지는 11월22일 밤에 석방되었지만, 그는 11월23일 심문소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을 매장할 때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탓에 가족들은 코 폰 민트 아웅 씨의 시신을 보거나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미얀마 기자 두 사람이 쿠데타 이후 한 마을에 발생한 화재 현장을 취재하고 있다. ⓒMPA 제공

군부는 민주화 운동가와 가족들에게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운동가 본인을 찾지 못하면 그의 집에 들이닥쳐 가족들을 체포한다. 어떤 운동가 가족은 법적으로 그 운동가의 가족 지위를 말소시킨다. 가족들이 그 운동가와 어떤 관련도 없고, 앞으로도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우리 가족이 체포되지 않기 위한 최선”이라고, 양곤 대학 학생회 소속인 코 아웅 셋이 말했다. 그 역시 법적으로 아들 지위를 잃었다. 11월에 발행된 국영 신문을 보면, 가족과 법적 관계가 끊긴 대학생, 연예인 등 수많은 청년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전 1980년 한국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씨가 사망했다. 미얀마 시민 대다수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알고 있다. 이런 미얀마 시민들은 사죄하지 않고 떠난 학살자 전두환에 대해 실망스러움을 표시한다. 미얀마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1962년부터 1988년까지 미얀마를 통치한 독재자 네 윈은 1988년 항쟁으로 물러났지만, 부유한 노년을 보내다 사망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그의 죽음 이후 부와 권력을 축적해 미얀마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해왔다. 전두환의 사망을 보며 독재자들의 공통된 특성이 ‘반성 없는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독재자가 죽어도 정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상황은 언제 끝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누군가는 ‘여기’에 남아 보도해야 한다. 군부의 인권유린과 폭력 사건을 기록해 국제사회에 보여줘야 한다. 나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지금 나의 결정을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미얀마 시민들이 끝까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훗날, 미얀마 기자로서 내가 했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자랑스러워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기자명 마 감 (필명·<프런티어 미얀마>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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