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0일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를 향해 시민들이 침묵 행진을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서 연락이 온 건 7월22일 오전이었다. 사형수 코 지미에 대한 면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지난해 10월23일 체포된 이후 그의 소식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가족들은 8개월간 지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피신 중인 아내 닐라 테인 씨를 대신해 지미의 여동생이 그날 오후 황급히 교도소를 찾았다. 죄수복 차림의 지미가 그곳에 있었다. 다만 쇠창살이나 유리창이 아니라 줌(Zoom) 화면 너머였다.

1988년 8월 미얀마 민주화 항쟁을 주도한 ‘88세대’의 학생 지도자였던 초 민 유를 미얀마에서 ‘지미’라고 부른다. 걱정하는 가족에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업보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진리는 드러나는 법이니, 나로 인해 가족들의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불교 신자인 그는 자비경(불교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진리인 ‘다르마(Dharma)’에 대해 짧게 얘기했다. 그러고는 여동생에게 두껍지 않은 점퍼와 영치금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면담 시간은 20분이었다.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사흘 후인 7월25일 아침 군부는 지미를 포함해 민주 진영 인사 네 명의 사형을 집행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테러 행위를 지시하고 준비하고 관련 음모를 꾸몄다(관영 매체 〈글로벌 뉴 라이트 오브 미얀마〉).” 지난 1월 미얀마 군사법원이 사형선고를 내린 지 7개월 만이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면회를 끝내진 않았을 것이다. 지미의 점퍼를 챙겨 교도소로 향하던 가족들은 황망한 소식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현지 언론은 주말 동안 민주화 인사 4인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된 것으로 봤다. 언제, 어떻게, 왜 갑자기 사형을 집행했는지 묻는 유족들의 질문에 군부는 답하지 않았다. 신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1988년 이후 미얀마에서 처음 이뤄진 사형이었다.

“지미는 나의 남편이자 동료이고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참담하다.” 남편의 죽음을 언론 보도로 접한 닐라 씨가 8월2일 〈시사IN〉과 인터뷰하면서 심경을 밝혔다. 슬픔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군부가 유족에게 시신을 인도하지 않겠다며 유족의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있다. “수감자에게도 인권이 있다. 가족을 면회하고, 가족에게 약과 물건을 전달받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말이다. 모든 사법 절차는 법령에 근거해 이뤄져야 했다. 군정은 이 모든 법을 무시하고 살인을 저질렀다.” 닐라 씨는 남편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었다. 1988년 항쟁에 참여했던 인권운동가인 그는, 현재 군부의 감시를 피해 미얀마 안에 피신해 있다.

2021년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는 부부가 경험한 세 번째 정치적 격동이었다. ‘8888 항쟁’은 1988년 8월8일 대학생을 주축으로 네 윈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대규모 시위를 일컫는다. 시위가 한창이던 양곤 거리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아웅산 수치 여사 옆에서 힘 있게 연설하던 그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어떤 사건이 터져도 차분하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해결해가는 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 스스로 믿는 가치를 이뤄나갈 때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미얀마 민주주의가 위기에 놓일 때마다 지미는 사람을 모아 시위를 조직했고, 그때마다 가장 먼저 탄압받는 정치범이 되었다. 1988년 항쟁 이후 2004년까지, 2007년 승려들이 주도한 ‘사프란 혁명’ 이후 2012년까지 총 21년간 치른 복역 생활은 그의 험난한 정치 인생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시와 소설을 집필했고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등 미얀마 군부가 검열한 책들을 미얀마어로 번역했다. 지미는 생전 인터뷰에서 감옥을 ‘제2의 집’이라 부르곤 했다.

미얀마 민주화 항쟁을 주도한 초 민유(오른쪽). 7월25일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AP Photo

21년의 복역, 험난한 정치 인생

투옥과 석방을 반복한 건 닐라 씨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 민주화 이행이 막 시작되던 2012년, 대규모 정치범 사면이 이뤄지고 나서야 가족이 다시 만났다. 2007년에 태어난 딸 퓨 네 치 민 유가 다섯 살 되던 해였다. 지미는 딸을 ‘선샤인’이라고 불렀다. 딸이 살아갈 미래에선 자유로워진 미얀마를 볼 수 있기를 염원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2년 전, 군부가 총선 결과를 부정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역사는 30년 전으로 되감겼다. 2021년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는 한평생 민주화 운동가였던 지미가 목격한 마지막 싸움이 되었다.

2021년 2월9일 네피도에서 먀 트웨 트웨 킨이 경찰의 실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은 중요한 계기였다. 쿠데타 이후 첫 사망자가 19세 소녀라는 사실에 지미는 자책했다. “나는 인생을 살 만큼 살았다. 새로운 세대가 군부 통치로 고통받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낀다. 우리는 기성세대로서 할 일을 완수해야 한다.” 닐라 씨가 전한 지미의 말이다. 제3의 국가로 피신하지 않고 미얀마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의 결심처럼 지미는 체포되기 전까지 최대 도시 양곤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닐라 씨는 ‘그가 꿋꿋이 앞에 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다른 사형수 유족의 상황도 비슷했다. 7월22일 교도소에서 처음 연락을 받았고, 돋보기와 영어 사전(표 제야 토), 치약과 칫솔, 신발(아웅 투라 조) 등 이들이 부탁한 물건을 전해주러 7월25일 교도소를 다시 찾았다. 교도관에게 “그가 여기에 더 이상 없다”라는 황망한 소식을 들은 것도, 시신을 돌려받지 못해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형이 집행된 이들 중 한 명인 흘라 묘 아웅은 가족 면회도 없이 처형되었다.

지난해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에 참여한 타진 뉸트 아웅 씨. ⓒ타진 제공

타진 뉸트 아웅 씨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한 가지만 생각했다. “부당한 살인, 그들의 비열함, 시체 손괴와 유기죄에 대한 진실이 모조리 밝혀져야 한다. 그것 외에는 어떠한 감정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군부가 처형한 표 제야 토의 아내는 며칠 내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표 제야 토는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보좌관이자, 2012년부터 8년간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속 하원의원이었다. 지난 5월 군사법원은 표 제야 토에게 테러방지법 위반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로부터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집행된 사형이었다.

1981년생 표 제야 토는 미얀마 정치권에서 드문 이력을 가졌다. 2000년대 미얀마 힙합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힙합 가수 출신이다. 그가 속한 그룹 ‘애시드(Acid)’의 노래 가사에는 반군부 메시지가 들어 있다. 1992년생 미얀마 한 언론인은 표 제야 토의 음악이 미얀마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미얀마 1990년대생 대부분이 애시드의 팬이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으로 모두 충격받았다. 그의 랩에는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젊은 세대의 메시지가 녹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통해 꿈을 키우고 현실과 싸워나갈 에너지를 얻었다.” 표 제야 토가 정치활동을 본격 시작한 건 2007년 사프란 혁명 이후다. 반정부 성향 힙합 가수와 청년 운동가로 구성된 단체 ‘제너레이션 웨이브(Generation Wave)’를 설립했다. 그때 ‘불법 단체’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2008년부터 3년간 투옥된다.

저명한 민주 진영 인사들에게 사형이 선고된 범죄 혐의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군부를 겨냥한 게릴라 공격을 여러 차례 조직한 것, 총기와 수류탄 등 무기를 소지한 것, NLD 및 민주 진영 임시정부인 국민통합정부(NUG)와 줌 회의를 열고 ‘테러 활동’을 위한 모금을 벌인 것 등등. 심지어 미얀마 군부는 지미가 미얀마 군부를 비판하는 소셜미디어 게시물로 ‘공공 안전’을 위협했다고 비난했다. 조 민 툰 군정 대변인은 7월26일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을 위한 정의의 이름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그들은 민주화 운동가가 아니라 벌을 받아야 하는 살인자들이다.”

닐라 씨는 ‘테러 행위’라는 군부 측 주장에 이렇게 반박한다. “자국민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무도한 범행을 저지르는 건 다름 아닌 군부 세력이다. 18세 이하 청소년들을 살해하고, 가족에게 훼손된 시신을 돌려주며, 마을에 불을 지른다. 인간 대 인간으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존엄이나 연민은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국가가 지켜보지 않았는가. 국민들은 군부의 위협에서 스스로 방어할 권리를 가져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 집행된) 네 명의 인사는 ‘테러’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닐라 씨의 주장처럼,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를 향해 일제히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얀마는 더 이상 국제사회의 제재가 닿지 못하는 국가가 되어버린 걸까? 예고 없는 정치범 사형은 군부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시도였다는 분석이 크다. 그중에서도 국민 지지도가 높은 민주화 인사는 군부의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미얀마 독립언론인 카웅(가명)은 사형 집행이 군부의 ‘넥스트 스텝(다음 단계)’이라고 본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맞섰다.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시민방위군의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이번에 그들은 초토화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혁명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군부는 정치범을 처형함으로써 시민 억압의 다음 단계를 밟은 것이다.”

미얀마 거리에는 더 큰 혼란과 불안이 감돌고 있다. 사형 집행 소식이 알려지자, 양곤에서는 게릴라 조직이 군부 세력을 공격했다. 인세인 교도소에선 수감자들이 8월2일부터 군부에 반발하는 단식투쟁에 나섰다. 가장 우려하는 건 군부가 추가로 사형을 집행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군부는 쿠데타 이후 미얀마 시민들을 죽였다. 하지만 늘 부인해왔다. 이제 그들은 공개적으로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불안에 떨고 있는 건 유가족만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다.” 타진 씨의 말이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민주화 운동가 115명이 증인이나 변호사 없이 비공개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중에는 미성년자와 대학생도 포함돼 있다.

7월30일 사형당한 미얀마 민주화 운동가의 영정 사진 앞에 장미꽃을 놓는 시민들. ⓒ시사IN 조남진

또 다른 사형 집행 막는 게 우선

타진 씨는 남편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한 명이 없어져도 남은 한 명이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그러니 이 혁명은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쿠데타 발발 이후 지난해 5월 표 제야 토에게 체포 명령이 떨어진 이후부터 체포되던 11월까지 부부는 도피 생활을 이어왔다. 힙합 뮤지션이기도 한 타진 씨는 그에 대한 추모나 애도는 아직 이르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사형 집행을 막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한국도 우리처럼 군부독재로 쓰라린 경험을 한 나라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피를 흘리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나서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을 막아달라.”

7월30일 서울 성동구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 앞에는 미얀마 민주화를 상징하는 붉은 장미가 소복하게 쌓였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모임에서 코 지미, 표 제야 토, 아웅 투라 조, 흘라 묘 아웅과 미얀마 시위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사진을 그곳에 걸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미얀마인 수백 명이 세 손가락을 든 채 외쳤다. “군부는 정치범을 즉시 석방하라. 우리의 혁명은 반드시 성공한다.” 36℃ 뙤약볕이 내리쬐던 폭염이 가고, 어느새 굵은 빗방울이 붉은 장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1988년 항쟁 이후 많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가가 미얀마를 떠나 제3국으로 망명했다. 거기엔 한국도 있다. 지미는 2012년 석방된 이후 한국에서 풀뿌리 운동을 이어가는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방한했다. 2016년 2월17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얀마는 이제 바다를 건너기 위한 배 한 척을 만든 것이다. 우리는 정부와 국민들 간 신뢰관계를 만들어나가려고 한다.” 2016년 총선에서 NLD가 다수 의석을 얻어낸 뒤였다. 그로부터 5년 만에 미얀마 민주주의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얀마 쿠데타 이후 2148명이 군부에 의해 사망했고 1만1873명이 구금되었다(AAPP, 8월3일 기준).

절망 속에서도 닐라 씨는 “민주화 활동가로서 지미의 삶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1988년부터 미얀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왔다. 군사독재가 종식될 때까지 계속 싸워나갈 것이다. 슬픔과 분노가 차오르지만, 그것은 우리 가족만의 것이 아니다. 온 국민이 군부의 범죄로 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미가 자주 했던 말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일을 해나가겠다는 말이 닐라 씨의 인터뷰에도 자주 등장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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