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7일 촛불 시위가 열렸던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4개국 청년들. 왼쪽부터 조지 찬 씨(홍콩), 차노끄난 씨(타이), 이희영씨(광주), 유운 씨(미얀마). ⓒ시사IN 신선영

미얀마를 생각하면 늘 벗어나고 싶었다. 미얀마인 유운 씨(22)에게는 크고 작은 차별이 도처에 깔려 있는 곳이었다. 미얀마는 다종교·다민족 국가이지만 불교도와 버마인이 주류다. “미얀마 신분증에는 지역과 종교, 민족이 적혀 있어요. 이게 사람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요.” 군부독재, 아웅산 수치, 로힝야족 학살 같은 ‘민감한’ 주제는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가능한 한 빨리 해외로 나가자고 다짐했다. 당시 아이돌그룹 ‘워너원’의 팬이었던 그는 2018년 한국 유학을 선택했다. 3년 뒤인 2021년 2월, ‘쿠데타’라는 사건을 만났다. 미얀마 소수민족에게 가해진 탄압과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군부독재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서는 시민들을 보면서, 이제 미얀마는 그에게 어느 때보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2018년 한국에 유학을 온 홍콩인 조지 찬 씨(가명·22)에게도 지난 3년은 모든 게 격변하는 시기였다. 2014년 홍콩 우산혁명 때는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정도였다. 홍콩의 민주주의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2019년이었다. 범죄인 인도법안, 즉 용의자를 중국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홍콩 정부가 추진한 법 때문이다. 조지 찬 씨는 당시 송환법 반대 시위와 구의회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홍콩행 비행기에 자주 올라탔다. 2020년부터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코로나19로 입국이 제한된 데다 2020년 7월 홍콩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조슈아 웡을 포함한 민주 진영 인사들이 여럿 체포되었고, 시위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그의 친구들은 타이완, 영국 등으로 이민을 준비 중이다.

타이 출신 차노끄난 씨(28)도 2018년 1월16일 한국에 왔다. 조금 다른 사연이다. 그날 왕실모독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받았다. 국왕 라마 10세에 대한 비화를 담은 BBC 뉴스를 페이스북에 공유했다는 이유였다(〈시사IN〉 제690호 ‘타이 출신 난민이 던지는 질문’ 기사 참조). 노동계에서 활동한 그는 타이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운동가다. 우여곡절 끝에 11개월 만에 난민 지위를 얻고 한국 생활에 적응할 때쯤, 타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군부 정권과 군주제 아래서 쌓여온 억압들이 임계점에 다다랐다. 한동안 잠잠하던 타이 시위가 지난 2월 미얀마 쿠데타 이후 다시 격화되자 타이 경찰은 최전선의 시위 리더들을 한꺼번에 체포했다. 그 이후로 방콕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희영씨는 1991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체험학습으로 간 5·18 민주묘지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시민군의 사진을 처음 봤다. 그때의 충격이 여전히 남아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이씨에게 5·18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홍콩과 타이, 미얀마의 시민 저항을 유심히 지켜봤다. 남의 나라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2월1일 쿠데타 발발 이후 그가 속한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에서는 매주 5·18 민주광장에서 ‘딴봉띠’ 집회를 열고 있다. 냄비를 두드리며 군부에 저항하는 미얀마 시민들과 연대하는 시위다.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어디쯤 왔을까? 개별 국가들만 놓고 보면 승리의 경험은 희소하다. 아시아 내 중국의 영향력은 커져가고 필리핀·타이·미얀마 등에선 권위주의 통치가 장기화되고 있다. 서로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겠다는 허울 아래 반체제 인사들이 투옥되고 국가의 반인륜 범죄가 자행된다. 여러 아시아 연구자들이 아시아의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아시아의 개인들에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시위 국면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했고 “더 이상 예전으로 되돌아갈 길 없는 ‘엔드게임’(홍콩인 조지 찬)”을 하고 있으며 “짧게는 10년, 길게는 한 세기가 걸릴 수 있는 긴 싸움(미얀마인 유운)”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의 아시아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연결되면서 저항의 바람은 동(東)에서 서(西)로, 다시 서에서 동으로 불며 세를 넓혀갔다.

2019년 홍콩, 2020년 타이, 2021년 미얀마, 다시 1980년 광주는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을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아시아 4개국 청년들이 5월7일 서울 광화문에 모였다. 각자의 모국어로 쓴 ‘민주주의’ 글자를 들어올렸다. 시위 현장마다 목청껏 외쳤던 단어이지만 유운 씨, 조지 찬 씨, 차노끄난 씨, 이희영씨 앞에 놓인 과제는 조금씩 다르다. 미얀마는 오랜 군부독재와 싸우고, 타이는 군주제 개혁을 요구한다. 홍콩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다. 독재와 싸우는 아시아 국가들에 비추어볼 때 한국은 눈앞에 물리쳐야 할 적은 없지만, 광주는 아직도 5·18의 상흔과 싸운다. 4개국 청년들의 좌담에서는 공감과 질문, 반박이 쉴 틈 없이 오갔다. 당초 2시간으로 예정된 좌담회가 어느새 3시간30분을 훌쩍 넘겼다.

2월1일 타이 민주화 시위대가 방콕 주재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 PHOTO

광주, 타이, 홍콩 출신으로서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어떻게 보고 있나?

이희영(한국):SNS로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단순히 잔인해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아무 준비 없이 봤던 5·18 사진과 너무 비슷했다. ‘5·18도 이랬겠구나, 이런 거구나.’ 1980년 5월 광주는 고립되었기 때문에 계엄군이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미얀마 사태는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지켜보는데도 멈춰지지가 않는다. 그 무력감이 가장 컸다.

차노끄난(타이):미얀마에 쿠데타가 발생한 날, 타이 친구들의 포스팅으로 페이스북이 터질 듯 시끄러웠다. 모두가 2014년 타이 쿠데타를 떠올렸다(2014년 5월22일 쁘라윳 짠오차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현재까지 집권 중이다). 3월 말에 미얀마인들이 학살을 피해 타이 국경으로 몰려왔는데, 타이 정부는 국경을 닫고 그들을 미얀마로 돌려보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조지 찬(홍콩):2년 전 대규모 시위를 벌인 홍콩인으로서는 꽤 부끄러웠다. 미얀마인들이 군부에 저항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유운(미얀마):미얀마에서는 소수민족과 군부가 70년 넘게 내전을 벌여왔다. 소수민족들이 무장한 이유다.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는 소수민족 이슈를 완전히 외면했다. 가끔 미얀마 기사 댓글에 “이제 와서 국제사회 개입을 요청하느냐”라는 비난이 달린다. 당시 미얀마 정부는 주변 국가의 민주화 항쟁을 외면했고,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을 방치했다. 일부 소수민족 대표들은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주축의 국민통합정부(NUG)를 여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소수민족이 받아온 차별에 대해 국가가 먼저 사죄해야 한다.

많은 연구자가 아시아 민주주의의 퇴보를 말한다. 지금까지 각 국가에서 벌어진 항쟁들이 실패했다고 보나?

차노끄난:그렇지 않다. 2020년 이전만 해도 타이에선 국왕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국왕 폐하(His Majesty)’라고 불렀다. 2020년 8월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때 방콕에 모인 타이 시민 20만명은 왕실 개혁을 위한 10가지 요구안을 발표하면서(왕실모독죄 폐지, 왕실 재산 공개 등), 국왕 초상화에 낙서하고 심지어 불태웠다. 지금 타이에서 ‘국왕 폐하’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나는 건 낯선 일이 되었다. 더 이상 왕실이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조지 찬:홍콩은 2020년 7월 국가보안법 통과 이후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올해 1월6일에 범민주 진영 인사가 50명씩 무더기로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2019년 이후 홍콩 사람들은 각성하고 있다. 스스로를 홍콩인(Hongkongers)으로 정체화하면서 ‘홍콩만의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를 들어 베이징어가 아닌 광둥어로 된 뉴스를 만들고,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으려 하는 움직임이다. 사실상 독립운동이다. 희생이 컸다고 해서 1980년 광주가 실패가 아닌 것처럼, 어떤 운동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희영: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봤을 때 한국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국가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지만, 남은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광주에 살면서 느낀 점은 5·18이 무수히 드러나 있지만 동시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엄마는 5·18 때 뭐 했어?”라고 자주 물었는데 그때마다 “아무것도 안 했어. 무서워서 이불 덮고 있다가 가끔 시위대 넘어오면 몰래 숨겨줬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2017년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했을 때 어머니가 “사실 나도 밖에 나가서 주먹밥을 날랐어”라고 처음 말하더라.

3월13일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딴봉띠’ 집회 참가자들이 냄비를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몇 년 전만 해도 미얀마인 유운씨는 홍콩과 타이 시위를 보며 “왜 저렇게까지 위험하게 싸워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올해 초, 고립을 경험한 후에야 타국 사정에 무심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던 중, 타이에서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 그 전까지 미얀마와 타이는 앙숙 관계였다.

미얀마 사태는 미얀마인만의 싸움이 아니다. 홍콩 시위대는 최전선 시위대가 싸우는 법, 최루탄 맞았을 때 대처법 등 가이드라인을 타이어와 미얀마어로 배포했다. 타이 시위 때 군부독재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쓰였던 세 손가락 경례가 미얀마 시위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미얀마 시위 현장에서는 홍콩과 타이 국기를 들고 나오는 이들도 포착된다. 온라인 국제 연대 운동인 ‘밀크티 동맹(#MilkteaAlliance)’이 실현되는 장면이다.

지난해 4월 트위터에서 홍콩·타이완·타이 시민들을 주축으로 시작된 밀크티 동맹은 말레이시아·캄보디아·미얀마 시민까지 동참하는 국제 연대 네트워크로 커졌다. ‘#MilkteaAlliance’는 지난 1년간 트위터에서 11억 차례 이상 언급되었다. 급기야 4월8일 트위터는 “홍콩·타이·미얀마 그리고 전 세계의 활동가 및 시민들이 주도하는 전 지구적인 친민주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라며 밀크티 동맹을 뜻하는 이모티콘을 만들었다.

각자에게 밀크티 동맹은 어떤 의미인가?

조지 찬:보통 각자의 언어로 SNS에 포스팅을 하기 때문에 미얀마 시위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검색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해시태그 ‘밀크티 동맹’이 유용한 검색 수단이었다. 홍콩 시위를 겪으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유 버튼을 눌렀다. 그런 마음으로 지금 미얀마 사진과 소식을 퍼트리고 있다. 밀크티 동맹은 아시아 시민들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플랫폼이다. 2019년에 시위를 주도했던 한 홍콩 활동가가 ‘홍콩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왜 홍콩과 미얀마, 타이 시민들이 함께 싸울까? 고통 때문이다. 자유를 빼앗기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국가에서는 이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유운:미얀마도 최근에서야 밀크티 동맹 해시태그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부독재라는 고통이 어떤 건지 알기 때문에 연대할 수 있다. 독재정권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는 우리의 움직임이 트위터 같은 글로벌 SNS에서 의미 있게 공유되어야 국제사회도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의 ‘5월 광주’가 다시 홍콩, 타이, 미얀마 등의 시위 현장에서 거론된다.

이희영:광주에 살면서 집단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광주 시민들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5·18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처음 ‘딴봉띠’ 집회를 열 때만 해도 매주 그토록 많은 어르신들이 꾸준히 참석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어르신들을 보면서, 우리가 80년대의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광주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지만, 그래서 억압받는 목소리를 누구보다 더 잘 들을 수 있는 도시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네 명이 바라본 민주주의는 각자가 선 자리만큼이나 조금씩 달랐다. “인권을 보호하는 시스템(유운)” “모든 구성원이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시행착오를 허용하는 것(조지 찬)”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시작점(차노끄난)” “나 자신으로서 존중받고 존중받는 만큼 책임질 줄 아는 개인들이 이루는 사회(이희영)”라는 대답이 나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MZ 세대’의 틀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차노끄난:Z세대는 아니지만 목숨 걸고 시위를 주도했던 수많은 이들이 있다. 어느 국가에서든지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은 긴 과정이다. 그들이 그때 싸우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도 없다. 나 역시 내 세대만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이 민주화 운동이 더 확산되길 바란다면 세대로 명명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중장년층과 노년층이 배제된다고 느끼고 참여를 주저할 수도 있다. 나 역시 Z세대가 아니다(웃음).

유운:미얀마는 1988년에도 군부의 쿠데타에 대항해서 싸웠다. 3000명 넘게 사망했는데 여전히 영웅이라는 말을 못 쓴다. 88 세대들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고 시위가 실패하는 걸 지켜봤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988년에는 대학생이 나왔고, 2007년에는 승려들이 나왔다. 이번 미얀마의 혁명도 그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희영:‘미얀마는 광주다’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승리를 알리는 것만큼 우리가 실패한 부분들에 대해서도 꼭 말하고 싶다. 광주는 트라우마를 아직 치유하지 못했다.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 영향 아래에 산다. 광주 역시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뤘다’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싸움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지 않으려면 시위하시는 분들이 마음 건강을 꼭 챙겼으면 좋겠다. 눈앞의 독재자를 물리치는 물리적인 싸움만큼 중요하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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