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3일 타이베이에서 민진당의 라이칭더(앞줄 가운데) 총통 후보와 샤오메이친(오른쪽 두 번째) 부총통 후보가 당선이 확정된 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REUTERS
1월13일 타이베이에서 민진당의 라이칭더(앞줄 가운데) 총통 후보와 샤오메이친(오른쪽 두 번째) 부총통 후보가 당선이 확정된 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REUTERS

“전 세계가 타이완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다.” 차이잉원 타이완 총통이 2024년 1월14일 총통 선거를 앞두고 수차례 언급한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전 세계 언론인 400여 명이 이번 선거를 취재하기 위해 타이완에 모였다. 2020년 선거 당시엔 절반인 200명 정도였다. 타이완 현지 언론은 이 ‘관심’을 집중 보도했다. 지지자 수만 명이 모인 유세 현장마다 미국과 일본, 홍콩 등 외신 카메라가 즐비했다. 동아시아에 위치한 인구 2300만의 작은 국가에서 치러진 선거가 이례적 조명을 받는 순간이었다.

‘미·중 대리전’은 이번 타이완 총통 선거를 내내 따라다닌 말이다.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대결이 만나는 최전선에 타이완이 있다. 타이완해협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외신의 질문은 하나로 집중되는 듯했다. 미국과 중국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혹은 통일인가 독립인가. 1월13일 라이칭더 민진당 후보가 40% 득표율로 당선하자 ‘타이완이 미국을 선택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타이완해협의 충돌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연달아 제기되었다. 하지만 1394만명의 선택(투표율 71.86%)을 외교 노선으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 타이완 선거는 정말 미·중 대리전이었나. 현지 언론인들은 “양안 혹은 미·중 대립 구도로만 타이완을 바라보면 타이완 내부의 고민과 갈등을 생략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타이완과 한국은 닮은 점이 많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분단을 경험했고 197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이뤘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제는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드문 국가로 평가받는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놓여 있는 지정학적 현실 또한 유사하다. 타이완이 미·중 갈등의 전초전이라면, 한국 또한 어떤 식으로든 연관될 수밖에 없다. 타이완 사회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시사IN〉은 1월10일부터 닷새간 타이완 선거를 취재했다. 민진당·국민당·민중당 유세 현장을 찾아 정치인과 양안 관계 전문가, 시민들의 목소리를 골고루 들었다. 시진핑과 바이든 혹은 미·중 대리전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타이완 민주주의의 복잡다단한 역동이 그곳에 있었다.

1월13일 밤 타이베이 민진당사 앞, 라이칭더·샤오메이친 후보 당선이 확정되자 지지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1월13일 밤 타이베이 민진당사 앞, 라이칭더·샤오메이친 후보 당선이 확정되자 지지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1월10일 오후 3시30분, 타이베이시 완화구의 한 선거캠프가 분주해졌다. 민진당 소속 우페이이 타이베이 시의원이 나타나자 취재진이 몰렸다. 그는 1월13일 총통 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입법의원(국회의원) 선거 후보자다. LGBT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색 선거 홍보물에 ‘새로운 미래’라는 글자가 돋보였다. 타투 스티커로 제작된 홍보물은 우페이이 캠프의 주력 굿즈다. 민진당의 라이칭더·샤오메이친 총통·부총통 후보를 의미하는 강아지와 고양이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한국도 지난 대선 때 타투 합법화 이슈가 쟁점이 되었다고 들었다. 최근에 국민당 한 의원이 ‘타투가 있으면 교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해 논란이 되었는데, 민진당은 청년들의 관심사를 반영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월10일 타이페이에서 민진당 소속 우페이이 입법의원 후보자가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우페이이 후보 캠프
1월10일 타이페이에서 민진당 소속 우페이이 입법의원 후보자가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우페이이 후보 캠프

우페이이 후보는 ‘해바라기 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 출신이자 민진당의 청년 정치인이다. 인지도가 높은 편임에도 “불안한” 선거다. 3자 구도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국민당의 친중 노선을 비판하면서도, 강력한 제3지대로 떠오른 민중당을 견제해야 했다. 위기 속에서 민진당이 내건 슬로건은 이것이다.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고 올바른 길을 걷자.’ 우페이이 후보는 문구를 이렇게 해석한다. “민진당 후보는 세 후보 중 유일하게 ‘양안서비스무역협정’ 체결에 반대 의견을 냈다. 타이완이 앞으로 정치와 경제의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 7번이라 적힌 보라색 어깨띠를 두르고 선거유세 차량에 오르자 스피커가 켜졌다. “의회에서 제일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주세요! 우페이이는 청년의 목소리를 대변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은 10년 전 타이완 사회를 뒤흔든 계기였다. 국민당 마잉주 정부가 경제적 이익을 내세워 중국과 타이완 간의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려 하자, 2014년 3월18일 학생과 시민운동가 300여 명이 입법원을 점거하고 24일간 농성했다. 당시 학생들이 해바라기를 들고 있어서 ‘해바라기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중국의 경제적 침투가 타이완의 정치적 독립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폭발적으로 모인 반중 정서는 2016년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 당선으로 이어졌다. 차이잉원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동성결혼 합법화, 탈원전 등 해바라기 운동 세대가 지지하는 진보적 의제들을 적극 수용했다.

한국과 쌍둥이처럼 비슷한 길을 걸어오던 타이완 민주화가 달라진 것도 여기서부터다. 타이완 민주화는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는 타이완 정체성이 굳게 자리 잡는 과정이었다. 타이완은 세계 20위 경제 규모를 지닌 국가이지만, 오직 12개 국가와만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교황청과 아이티, 파라과이, 투발루 등이다. 유엔과 세계보건기구(WHO) 같은 국제기구에도 가입할 수 없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는 중국이 이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Repulic of China)인가, 타이완인가. 통일할 것인가, 독립할 것인가. 친중인가, 반중인가. 국가와 민족 정체성을 경유하는 민감한 질문들이 타이완 민주주의 앞에 숙제처럼 놓여 있었다.

타이완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연구한 지은주 고려대 정치연구소 교수의 〈또 다른 중화, 대만〉에 따르면 1996년 총통 직선제가 도입된 후로 타이완 정치를 가르는 쟁점은 ‘경제성장인가, 민족 주권인가’였다. 2000년 최초 정권교체가 이뤄진 천수이볜 총통기에는 과거사 청산과 타이완 독립이 부각되었다면, 2008년 국민당 마잉주 집권기엔 중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타이완 경제를 살리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리고 8년 만인 2016년 다시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데는 해바라기 운동의 영향이 컸다. 중화주의를 강조하는 국민당과 달리, 민진당은 타이완의 자주성과 독립을 주장하면서 타이완인 정체성을 중요한 정치 어젠다로 삼아 세를 넓혔다.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가 1월9일 타이베이에서 차량 유세 도중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FP PHOTO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가 1월9일 타이베이에서 차량 유세 도중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FP PHOTO

8년 집권을 반복해온 ‘관례’만 본다면 이번 선거는 다시 국민당으로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은 선거였다. 하지만 2024년 타이완섬은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대결이 만나는 최전선이 되었고, 중국과 타이완 사이 180㎞ 타이완해협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코노미스트〉)이 되었다. 통일을 꾀하는 중국은 타이완해협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였고 미국 국무부는 타이완에 무기 수출을 늘려왔다. 타이완 정치는 운신의 폭이 점점 줄어들었다. 지은주 교수는 이번 선거의 쟁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2024년의 쟁점도 반중 정서가 핵심으로 보인다. 다만 2016년과 다른 건 중국의 태도 변화다. 2016년 중국이 타이완에 우호적이었다면 지금은 실제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위기감이 포함된 반중 정서가 지금 타이완 사회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 이슈로만 한국 정치를 해석하는 꼴

선거 기간 내내 외신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월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조국 통일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밝혔다. 독립주의자이자 민진당의 적자로 성장해온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 양안 관계의 긴장은 한층 더 고조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타이완 독립언론 〈단전매〉 황이잉 기자는 2012년 이후 외신이 타이완 선거를 줄곧 미·중 갈등의 구도로 바라봤음을 지적한다. “실제 유권자들에게 중국 문제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오히려 취업과 임금, 주거 같은 국내 이슈가 더 크다. 양안 갈등과 미·중 대립 구도로 바라보면 타이완 내부의 고민과 갈등을 빠트리게 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북한 이슈로만 한국의 정치를 해석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1월12일 ‘둥쏸(凍蒜)’이라는 타이완어가 신베이시의 한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둥쏸! 둥쏸! 둥쏸!” 중국어로 당선을 뜻하는 ‘당쉬안(當選)’과 비슷한 발음이다. 주로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해온 민진당의 단골 구호인데, 이번 선거에선 친중 성향의 국민당 유세 현장에서도 흔하게 들렸다. 현직 신베이 시장이기도 한 허우유이 후보의 홈그라운드다.

타이베이 시내에 걸린 민진당 입법의원 후보들의 선거 홍보물들.  ⓒ시사IN 김영화
타이베이 시내에 걸린 민진당 입법의원 후보들의 선거 홍보물들. ⓒ시사IN 김영화

국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온 이웨이궈 씨(65)는 허우유이 후보에 대해 “타이완 주체성이 큰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보건의료 종사자인 그는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대응이 잘못되었다며 정권교체를 요구했다. 타이완은 코로나19 초기 방역 모범국으로 꼽혔으나 2021년 봄 확진자가 크게 늘었고 백신 조기 확보에 실패하면서 갈등이 커졌다. 친중·통일 노선으로 국민당을 바라보는 건 “국민당을 적색분자,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타이완인이면서 중국인이다. 나는 타이완에서 태어났지만 나의 선조들은 중국에서 왔다. 지금은 중국과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국민당 유세 현장을 달군 구호다.

경찰 출신인 허우유이 후보는 민주화 이후 국민당 후보 가운데 첫 본성인 출신이다. 국민당 총통 후보들은 외성인 2세대였다(본성인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절 일찍이 건너온 이들, 외성인은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철수할 당시 함께 건너온 이들을 뜻한다. 국민당은 본성인을 고압적으로 대했고 38년 동안 삼엄한 계엄 통치를 했다). 캠프 대변인인 장웨이위안 타이베이 시의원은 “국민당 안에서도 미국과 소통을 많이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엔 타이완인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무조건 친중 또는 반중으로 나눠서 볼 수 없다”라고 말한다. 허우유이 후보 캠프의 슬로건도 타이완어로 쓰였다. ‘타이완이 다시 출발하면 국민이 더 좋아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장웨이위안 의원은 민진당만이 타이완인을 상징한다는 관념을 깨부수고 있다고 말한다.

허우유이 국민당 후보 캠프의 대변인인 장웨이위안 타이베이 시의원은 국민당이 타이완인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사IN 김영화
허우유이 국민당 후보 캠프의 대변인인 장웨이위안 타이베이 시의원은 국민당이 타이완인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사IN 김영화


타이완 사회는 변하고 있다. 타이완 정치대학 선거연구센터가 매년 조사하는 연구에 따르면, ‘나는 타이완인’이라는 인식이 1994년 20%에서 2023년 62%로 늘었다. 반면, ‘나는 중국인’이라는 의식은 28%에서 3%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 ‘나는 타이완인이면서 중국인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45%에서 30%로 줄었다. 타이완 여론 지형에서 통일을 지지하는 의견은 7.4%에 불과하다. 독립을 지지하는 비율은 25.9%로 좀 더 높지만, 타이완인 대다수(60.7%)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현상 유지’를 원한다.

장영희 충남대 평화안보연구소 연구위원(정치학)은 “오랫동안 타이완의 정치 구도였던 ‘친중·통일 대 친미·독립 노선’이 해체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중국과의 통일은 홍콩처럼 되는 것이니 통일을 지지하거나 중국과의 통합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은 극소수일 뿐만 아니라 설자리를 잃었다는 얘기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당은 중국과의 교류·협력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이것을 ‘친중’이라 할 수도 있지만 국민당은 미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타이완 총통 선거에서 미국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독립 노선도 마찬가지다. 독립을 주장하면 중국의 무력 행사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독립을 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차이잉원 총통 8년 동안 초점을 맞춘 건 ‘독립’보다 ‘탈중국’이었다고 장 교수는 지적한다.

허우유이 후보가 이번 선거를 ‘전쟁과 평화 사이의 선택’으로 규정한 반면, 라이칭더 후보는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 대결’로 불렀다. 1월11일 민진당 유세가 열린 총통부 앞 광장엔 주최 측 추산 20만명이 운집했다. 10년 전 해바라기 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그때 우리가 일어선 이유를 잊지 말자”라며 무대에서는 해바라기 학생운동의 주제가 ‘섬의 여명’이 흘러나왔다. 중국에선 금지곡으로 지정된 곡이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아시아 최초의 혼인평등 국가’ ‘친환경 발전량 2년 연속 원전 능가’ ‘타이완의 1인당 GDP가 한국을 넘어’ 등 민진당의 업적이 띄워지자, 지지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민진당을 상징하는 녹색 깃발이 나부꼈다.

중국의 타이완에서 세계의 타이완으로

대학원생 주디 쩐 씨(24)는 자긍심이 차올랐다. 차이잉원 정부가 진보적 의제를 추진하며 고립되어 있던 타이완을 전 세계에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타이완해협은 이제 국제 문제로 커졌다.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으니 중국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협상력이 올라갔다.” 타이완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타이완인이라 생각한다. 당장 독립을 원하지는 않는다. “이미 독립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시민들 뜻으로 결정할 수 있다. 남아 있는 건 세계의 인정뿐이다.” 총통부 앞에 모인 이들은 “중국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켰다” “양안 문제를 세계화했다”라며 차이잉원의 탈중국화 기조를 극찬했다.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몬다’는 국민당의 비판과 달리 ‘보호받는다’는 인식이 더 강했다.

린페이판 민진당 전 부비서장은 타이완 정치가 직면한 큰 위기에 대해 “타이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중국의 침투”라고 답했다. ⓒ시사IN 김영화
린페이판 민진당 전 부비서장은 타이완 정치가 직면한 큰 위기에 대해 “타이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중국의 침투”라고 답했다. ⓒ시사IN 김영화

린페이판 씨는 10년 전 이 광장에 있었다. 당시 해바라기 운동의 선봉에 섰던 학생운동가로 2019년 민진당에 합류했다. 그에게 지난 10년은 ‘중국의 타이완’이 ‘세계의 타이완’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 타이완 정치가 직면한 큰 위기를 묻자 “타이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중국의 침투”라고 답했다. “양안 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민진당이 아닌 중국, 시진핑 주석이다. 2012년 취임 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며 타이완해협의 레드라인을 넘고 있지 않은가. 누가 집권하더라도 이 위협은 존재한다. 국민당이나 민중당이 집권하면 중국의 침투에 대한 타이완의 저항력은 약화될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민진당에서는 중국의 인지전(가짜뉴스 등으로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행위)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었다.

10년 전 허흔유 씨(27)도 같은 광장에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해바라기 운동을 응원하기 위해 총통부 앞을 찾았다.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해바라기 운동은 혁명이었다.” 그 이후로 거행된 두 번의 선거에서 차이잉원을 뽑았다. 특히 2019년 홍콩 반송중 시위(홍콩송환법 반대 시위)를 보면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망국감’까지 느꼈다. ‘오늘의 홍콩이 내일의 타이완’이라는 경고가 그에게 섬뜩하게 다가왔다. 주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투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2020년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 총통은 817만 표를 확보해 1996년 직선제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다. 중국 공산당이 민진당을 도와준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민진당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삶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집값과 물가가 폭등했으나 임금은 그대로였다. 2023년 타이완의 최저시급은 한화 7160원으로 동아시아 국가 중 낮은 편이다. 대졸자 초임 월급은 우리 돈으로 약 130만원, 타이완의 낮은 급여를 두고 ‘국가의 치욕’이라는 자조가 나왔다. “30년 전 회사에서 일하면 120만원(한화 기준) 받았는데 지금도 비슷한 수준이니 후퇴가 아닌가. 타이완 경제가 호황이라고 하는데 우리 살림은 너무 어렵다.” 60세 택시 기사의 말이다. 1인당 GDP 3만 달러, 총수출액 70% 이상 성장, 세계 20위 경제대국 등 민진당이 선전한 화려한 숫자들은 일반 시민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2020년 차이잉원을 극적으로 당선시켰던 망국감이 4년 만에 자취를 감추게 된 배경이다. 허흔유 씨는 말한다. “지난 8년 동안 민진당은 타이완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정당의 이익을 더 중요시한 것 같다. 민진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타이완은 곧 중국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얘기만 반복한다. 당장 우리 삶이 위기인데, 보이지 않는 위기가 무슨 소용인가.” 동성결혼 합법화처럼 의미 있는 진전도 있었지만, 민진당이 기득권화되었다고 느꼈던 순간이 훨씬 많다. “민진당은 잘못에 대해 사과하거나 수정하지 않는다. 차이잉원 총통도 연임 후로는 시민들과 멀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민진당 정부가 추진한 ‘2025년 원전 제로’ 정책은 실현 가능성을 두고 반발이 거셌다. 거기에다 정전 사태가 잇따르면서 전력 수급 불안 문제가 불거지자, 탈원전 정책 탓이냐 시설 노후화 탓이냐를 두고 양당 간 지리한 공방이 오갔다. 장웨이위안 시의원은 정책 경쟁이 실종된 선거였다고 짚는다. “사실 타이완 정당 중에 좌우 대립은 없는 것 같다. 민진당이든 국민당이든 경제발전을 더 중시하는 보수정당에 가깝기 때문이다. 탈원전 정책에 대해서도 이성적인 토론보다는 (원전을) 없앨 건지 말 건지만 중심이 되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도 집권당일 땐 찬성하다가 야당이 되면 입장이 180도 바뀐다. 국민당과 민진당은 다른 것 같지만 이념적으론 크게 다르지 않다.”

“민진당과 국민당을 상품의 진열대에서 빼라!” 1월12일 민중당 유세장을 향하던 한 지지자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미 지하철 입구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민진당과 같은 총통부 앞 광장이었지만 구호도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다. 주최 측 추산 35만명, 대부분 2030 청년층이다. 지지자들은 저마다 새싹 모양 머리 장식을 꽂고 ‘커원저’를 연호했다. 대학 교직원 첸팅웬 씨(34)는 새싹이 곧 민중당 지지자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작은 새싹들이 모여서 큰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 역시 직전 선거까지 차이잉원을 찍은 유권자다.

신베이시에 위치한 커원저 민중당 후보 캠프. '거주 정의' '정당 화합' 등 민생 이슈에 주력하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신베이시에 위치한 커원저 민중당 후보 캠프. ‘거주 정의' '정당 화합’ 등 민생 이슈에 주력하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타이완 청년 세대의 반란?

민생과 정부 개혁을 주요 의제로 내걸며 등장한 커원저 후보와 민중당은 양당 정치에 지친 2030 유권자들의 유일무이한 대안이 되었다. 허흔유 씨도 그의 열혈 지지자다. 민진당은 기득권화되었고 국민당은 구시대적이다. 그런데 2019년 창립된 신생정당의 대표가 “청색(국민당)과 녹색(민진당)을 초월하고 이념 대신 실용을 추구해야 한다“라며 존재감을 부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 출신 현직 타이베이 시장으로서 커원저 후보는 노후한 재래시장을 현대화하고, 사회주택 건설과 정당 간 화합 같은 대내적 사안에 집중했다. 다른 후보들이 당 중심이라면, 커원저 후보는 인물이 부각된다. 응원용 깃발에 적힌 KP는 ‘약속을 지킨다(Keep Promise)’는 뜻이자 ‘커 의사(Ko Professor)’를 의미한다. 그를 닮은 캐릭터 ‘고라파덕’ 그림도 유세 현장 곳곳에 밈이 되어 있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110만명을 넘었다.

강력한 제3지대의 등장은 타이완 선거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장영희 연구위원은 타이완 청년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한다. 청년들에게는 일자리, 낮은 급여, 주거 문제 등 일상의 막막함을 해결하는 것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거나 민주주의와 독립을 강조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민진당은 선거 과정에서 자신들의 스캔들이나 문제가 터질 때마다 계속 중국의 선거 개입이라는 논리로 대응했고, 중국의 위성 발사를 타이완을 향한 미사일 공격이라 규정하며 전 국민에게 긴급 재난 문자를 보내는 등 반중 정서를 활용했다. 타이완 청년들의 경제사회적 문제에 대안을 치열하게 제시하지 않아도 당선될 수 있을 만큼 타이완 사회도 이념으로 양극화되었고, 이에 맞서 청년 세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커원저 민중당 후보는 양강 구도에 균열을 내며 제3당 돌풍을 이끌었다. ⓒAP Photo
커원저 민중당 후보는 양강 구도에 균열을 내며 제3당 돌풍을 이끌었다. ⓒAP Photo

커원저 후보의 인기 현상에 오랜 양당 체제를 깨고 ‘제3정당 세력화’가 가능할지 관심이 고조되었다. 입법의원 선거 결과, 민진당(51석)과 국민당(52석)이 모두 과반 의석에 실패한 상황에서 민중당이 8석을 얻으면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민중당이 이번 타이완 선거에서 사실상의 승리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커원저와 민중당이 타이완의 새 정치세력이 될 수 있을지는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거침없고 신랄한 비판에 비해 뚜렷한 내용이 부족하다는 평가 때문이다. 민진당의 노선에 동조하다가도, 국민당과 총통 후보 단일화 직전까지 가는 행보에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과거 성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을 빚는가 하면, 양안 문제와 외교정책 같은 중요한 쟁점에 대해 태도가 불분명하다는 평가도 있다. 커원저가 대만 민주주의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거듭날지, 기존 정치를 답습한 기회주의자가 될지 타이완 시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2030대가 주축인 커원저 후보 지지자들이 새싹 모양 머리 장식을 꽂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2030대가 주축인 커원저 후보 지지자들이 새싹 모양 머리 장식을 꽂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이번 타이완 선거는 평화를 위한 선택, 타이완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 실용주의 간의 경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월13일 발표된 선거 결과는 각각 33.9%(허우유이), 40.05%(라이칭더), 26.46%(커원저)로 나타났다. 총통 직선제 1996년 이후 세 번 연속 한 당에서 총통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선 확정 후 연 기자회견에서 라이칭더 당선자는 이번 선거 결과를 “타이완 민주주의 공동체의 승리”라고 규정하면서 “우리는 민주주의 편에 설 것이며 계속해서 전 세계 민주주의와 나란히 걸을 것”이라고 밝혔다. 타이완해협에서 현 상태 유지, 중국과의 대화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라이칭더와 민진당의 앞날은 험난하다. 여소야대 국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균중국연구소는 ‘2024년 타이완 선거 특별 리포트’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미국을 믿지 못하지만 중국은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곤경 앞에서 타이완의 선택은 국익의 손상이 생길 수 있는 외교적 자율성을 포기하더라도 친미 노선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안보 위기를 계기로 타이완의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념적 근본주의’가 힘을 얻게 되었다.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반중 정서를 활용하여 정권을 획득하는 전략만이 남았다.” 거세지는 중국의 위협과 반중 정서, 이탈한 청년층 민심, 중화민국과 타이완을 둘러싼 정체성 싸움 등이 민진당 차기 정권 앞에 기다리고 있다. 타이완 선거는 단순히 미·중 대리전이 아니었다.

1월13일 밤 민진당 당사 앞. 당선 축하 폭죽이 터지자 지지자들 수만 명이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았다. 우페이이 후보도 완화구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앞으로 4년이 진짜 시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청년 의제를 계속 발굴하고 다른 정당과도 소통해가겠다.” 우페이이는 앞으로도 성평등과 재생산권, 타투 노동권 등에 주력할 계획이다. 린페이판 민진당 전 부비서장은 “타이완과 한국의 민간 교류, 정당과 정당 사이 교류가 많아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어떤 당이든 좋다. 한국의 여야 정당이 민진당과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초등학교 교사인 차이무건 씨(34)와 슈이팅 씨(35)가 든 플래카드엔 ‘타이완은 타이완인의 타이완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국제사회의 영향을 떠나서 타이완은 곧 타이완이라는 말이다.” 앞으로 민진당이 주력해야 할 의제는 타이완이 더 국제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본다. 더 진보적 의제를 찾고 힘을 길러서 국제사회와 연결되고 싶다고 두 사람은 말했다. 녹색과 분홍색이 뒤섞인 종이 폭죽 뒤로 프라이드 깃발과 타이완 독립기, 우크라이나 국기 등이 저마다 휘날렸다. 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초등학교 교사인 차이무건 씨(34)와 슈이팅 씨(35)가 든 플래카드에 ‘타이완은 타이완인의 타이완이다’라고 쓰여 있다. ⓒ시사IN 김영화
초등학교 교사인 차이무건 씨(34)와 슈이팅 씨(35)가 든 플래카드에 ‘타이완은 타이완인의 타이완이다’라고 쓰여 있다. ⓒ시사IN 김영화

 

1월13일 타이페이 민진당사 앞에서 한 지지자가 타이완 독립운동과 LGBT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국기를 들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1월13일 타이페이 민진당사 앞에서 한 지지자가 타이완 독립운동과 LGBT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국기를 들고 있다. ⓒ시사IN 김영화
라이칭더, 샤오메이친 민진당 후보 캠프의 모습. 야구팀이 컨셉이다. ⓒ시사IN 김영화
라이칭더, 샤오메이친 민진당 후보 캠프의 모습. 야구팀이 컨셉이다. ⓒ시사IN 김영화

 

기자명 타이베이·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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