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8일 미얀마 양곤에서 사진기자들이 시위대를 공격하려 모인 군 지지자들을 촬영하고 있다. ⓒEPA

미얀마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슈웨 포 에인 씨(34)는 인쇄매체에 시와 에세이를 쓰던 작가였다. 지역 언론의 기자로도 활동했다. 주로 소수민족과 군부 사이 벌어진 내전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뤘다. 2016년부터 자신의 작품을 엮어 책을 냈다. 문민정부가 집권한 5년은, 미약했지만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전례 없이’ 허용되던 시기였다. 이제 자신을 비롯한 미얀마 언론인들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집을 떠났고 일부는 타이·인도 국경을 넘는다. 유엔은 지난 쿠데타 이후 최소 미얀마 언론인 84명이 체포되었고 이 가운데 48명은 여전히 수감 중이라고 보고한다. 슈웨 포 에인 씨는 동료들의 현실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5월19일, 그는 동료 언론인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쓴 ‘미얀마의 현실’을 〈시사IN〉에 전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미얀마 언론인 초 나잉 씨(가명)가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우 바 민 씨(가명)에게 말했다. 나이가 지긋한 우 바 민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는 언론인들에게 시민들이 경의를 표하고 있어요. 여러분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지요. 좌절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한다면 이 혁명에서 결국 시민이 이길 것입니다.” 우 바 민 씨가 시든 꽃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초 나잉 씨를 위로했다.

초 나잉 씨가 미얀마 남부 몬주(Mon State)에 있는 우 바 민 씨의 집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이곳은 낙후된 작은 마을이다. 지인 우 바 민 씨가 거처를 제공했다.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것도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지역에서, 기자로 숨어 지내다 보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집에서 약 16㎞를 걸어가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처음 초 나잉 씨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는 “지금은 좀 안전해?” “괜찮아” 정도의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다.

 

ⓒAFP PHOTO 2월27일 양곤에서 시위대를 취재하던 케이 존 응웨 기자가 체포돼 연행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는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집에 남은 가족들과 가까스로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또 자신과 같이 일한 언론인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랬다. 초 나잉 씨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기자가 아닌 다른 일은 상상한 적도 없다. 비록 밤낮으로 뉴스를 제작하느라 가족들을 잘 돌보지 못했지만, 그의 아내와 부모는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쿠데타 이후 상황은 180° 변했다. 그는 가족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짐을 싸야만 했다. 문민정부가 통치한 지난 5년간, 언론인들은 군사정권 시대와 비교도 못할 만큼 언론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쿠데타 군부는 정보를 차단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박탈했다. 언론인과 언론사는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지금까지 언론인 40여 명이 구금 상태이며 오직 소수의 기자들만이 보증인을 통해 풀려날 수 있었다.

“언론사가 문 닫은 후로 프리랜서 기자가 되었습니다. 그간 연이 있던 언론사에 뉴스를 제공했지만, 오랫동안 월급이 나오지 않아 생활이 어렵습니다. 한 동료 기자는 집에 군인과 경찰이 수색하러 오는 탓에, 타이 국경으로 도망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초 나잉 씨가 말했다.

실제로 많은 언론인 동료는 인도·타이 국경을 넘고 있다. 이들의 신변조차 안전하지 않다. 지난 5월9일 타이 정부는 치앙마이에서 미얀마 현지 매체 〈DVB〉 소속 기자 3명과 활동가 2명을 ‘불법입국’ 혐의로 체포했다. 가슴이 철렁하는 소식이었다. 미얀마와 상황이 비슷한 이웃 국가를 신뢰하기가 어렵다. 〈DVB〉 편집장은 “그들을 미얀마로 송환하지 마라. 만약 그들이 미얀마로 돌아가게 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5월24일에는 미얀마의 영문 매체 〈프런티어 미얀마〉의 데니 펜스터 편집주간이 말레이시아행 여객기를 타려다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5월9일 타이 정부는 치앙마이에서 미얀마 현지 매체 소속 언론인 3명을 ‘불법입국’ 혐의로 체포했다. ⓒAP Photo

미얀마 언론인을 위협하는 건 미얀마 형법 제505조(a)다. 이 조항은 군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기소하는 법적 근거가 된다. 최대 징역 2년까지 선고할 수 있고 구속도 가능하다. 초 나잉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는 이 법으로 군부를 비판하는 활동가나 정치인들을 주로 체포했습니다. 쿠데타 이후 군부는 이 법의 적용 대상을 자의적으로 늘렸습니다. 가짜뉴스 유포, 국가공무원의 범죄 선동 등의 명목으로 시민들을 겁먹게 합니다.” 그 결과 시민불복종운동(CDM)과 시위 현장을 취재하는 일은 모두 처벌 대상이 되었다.

집집마다 ‘손님’이 있는지 수색하는 군경

미얀마의 계절은 어느덧 여름이다. 평소와 달리 여름 공기가 더 뜨겁게 느껴진다. 이 시기에 보고 들은 모든 이야기가 가슴 아파서일까? 그는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여덟 살 딸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돈다고 말했다. “아빠, 우리 집에 군인과 경찰이 총을 들고 수색하러 왔어. 무서워. 빨리 돌아와.” 인터넷이 연결되자 그는 그간 놓쳤던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지금 머무르는 우 바 민 씨의 집에 더 이상 숨어 지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군경이 집집마다 ‘손님’이 있는지 수색하겠다는 뉴스가 보였다.

그가 있는 지역은 해방 지역이 아니다(미얀마 국경의 소수민족 무장단체 지역부터 해외 등 미얀마 군부가 접근할 수 없는 곳을 ‘해방 지역’이라고 표현한다). 양곤 등 도시뿐 아니라 몬주까지 군부가 넘어오고 있었다. 군부가 정권을 잡은 이 나라에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16㎞ 먼 곳에서 인터넷을 쓴 후 거처로 돌아오는 길에 초 나잉 씨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혁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하지 못하면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 미얀마는 또다시 고립된 ‘외톨이 국가’가 될 것이다. 이미 지난 수십 년간 겪었던 현실이다. 독재자의 손에 미얀마의 운명이 맡겨진다면 언론인과 지식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가족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는 집에 도착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우 바 민 씨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거기도 안전하지는 않을 텐데. 이런 시기에 자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초 나잉 씨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뿐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봄 혁명, 자신의 자리에서 임무를 다하고 싶었다. 그는 다시 배낭을 메고 두 달 만에 몬주를 떠났다. 이후 그와의 연락은 다시 끊겼다. 

기자명 슈웨 포 에인 (프리랜서 기자·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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