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현직 언론인들이 〈시사IN〉에 보낸 ‘세 손가락 경례’ 인증 사진.

 

‘10년 전으로 퇴보하다.’ 국제 언론감시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지난 4월20일 미얀마의 언론 위기를 설명한 한 문장이다. 2021년 미얀마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40위. 지난해보다 한 단계 내려갔다.

10년 전인 2012년은 민주화 이행이 막 시작되던 해였다. 검열과 체포 위협에서 벗어나 보도 역량을 확장해가던 미얀마 언론인들은 2021년 2월1일 이후 어둠의 시기를 맞았다. 더 이상 길거리에서 ‘PRESS(언론)’라고 쓰인 조끼를 입거나 카메라를 들 수 없다.

10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바로 독립언론의 존재다. 민주화 이행기에 생겨나기 시작한 이들은 쿠데타 이후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군부의 인권탄압과 시민 저항을 묵묵히, 치열하게 기록해가고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목격했던 미얀마의 현실은 언론인들의 목숨 건 취재 활동 덕분이다. 군부의 예상과 달리 쿠데타는 독립언론의 존재 이유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온라인에서는 ‘저널리즘은 범죄가 아니다(#Journalism is not a crime)’ 해시태그 운동이 번지고 있다. ‘언론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에서 미얀마 언론인들은 어떻게 좋은 저널리즘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시사IN〉은 미얀마 항쟁 최전선에서 분투 중인 세 독립언론사를 취재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현지 취재를 대신해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과 이메일, 메신저로 접촉했다. 인터넷 언론 〈미얀마 나우〉는 시위를 적극적으로 생중계했고 종합 미디어 〈미지마〉는 시민들과 실시간 소통 채널을 만들었다. 시사주간지 〈프런티어 미얀마〉는 심층보도에 주력한다. 군부의 탄압 외에도 이들 앞에 놓인 과제는 많다. 위기 속에서 견고해져가는 미얀마 독립언론들의 지난 6개월을 전한다.

 

지난 2월27일 양곤에서 취재를 하던 케이 존 응웨이 〈미얀마 나우〉 기자(왼쪽에서 두 번째)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EPA

군인들이 〈미얀마 나우〉 편집국을 급습한 건 3월8일 오전이었다. 〈미얀마 나우〉 기자 아웅(가명) 씨는 급히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군인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회사 주위에 깔려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포착돼 있었다. 군인들이 출입구를 부수고 들어가는 장면도 근처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이미 한 달 전에 중요한 취재자료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다. 이날 아웅 씨는 지내던 숙소에서 서둘러 짐을 챙겼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군경에게 발각돼 체포될 위험이 커진다. 몇 시간 뒤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 나우〉를 포함한 독립언론 다섯 곳의 발행 허가를 취소했다. ‘올 게 왔구나’ 생각했다.

이튿날 군부가 들이닥친 곳은 독립 미디어 〈미지마〉. 미얀마 군부정권 시절인 1998년 인도 뉴델리에서 망명 언론으로 출발한 〈미지마〉는 민간 정부로 권력이양이 시작되던 2012년 미얀마로 들어왔다. 동남아시아 권역에서는 미얀마 언론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14년 만에 얻은 언론자유는 2월1일 쿠데타와 함께 사라졌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 민트 〈미지마〉 대표는 양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치고 임시 보도국을 만들었다. 〈미지마〉 기자들은 이 은신처에서 숙식을 하며 위성TV와 인터넷에 의지해 뉴스를 제작하고 있다. 그는 “군부가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면 폭파시킬 수도 있다”라며 답변에 신중을 기했다(18~19쪽 기사 참조).

지금 미얀마에서 언론인은 가장 ‘위험한’ 신분 중 하나다. 되도록 눈에 띄지 말 것, 기자라고 밝히지 말 것, 길에서 카메라를 들지 말 것, 계속해서 거처를 이동할 것, 휴대전화 및 데이터 보안에 신경 쓸 것, 무엇보다 체포되지 말 것. 쿠데타 6개월간 ‘생존 전략’을 습득한 채 닫힌 편집국 밖에서 분투하고 있다. 7월21일까지 기자 92명이 체포됐고 이 중 40명은 여전히 구금되어 있다. 11개 언론사가 폐쇄되거나 발행 허가가 취소되었다.

1962년 이후 50년간 군부가 장기 집권했던 미얀마에서 언론 통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던 2012년 전까지, 미얀마의 모든 언론은 정보부 검열을 거쳐야만 보도가 가능했다. 사실상 언론의 자유는 없었다. 사전검열제가 폐지되고 향후 5년은 미얀마 언론의 황금기라 할 만한 시기였다. 〈미얀마 나우〉 같은 독립언론이 여러 개 생겨나고 〈미지마〉(인도), 〈DVB〉(타이) 등 망명 언론이 국내로 복귀한 시점도 이때다. ‘국경 없는 기자회’를 보면 2013년(151위)부터 2017년(131위)까지 미얀마 언론자유지수는 20위 상승했다.

하지만 군부와 불편한 동거를 유지해온 미얀마 민주주의가 그랬듯, 언론자유도 ‘반쪽짜리’였다. 지난 2월 미얀마 군부가 기자들에게 군사정권(junta·regime), 쿠데타(coup d’etat)와 같은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한 ‘보도지침’은 군부가 언론을 대하는 시대착오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독립언론 대다수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군부의 체포 명단에는 소 민트 〈미지마〉 대표의 이름이 있다. 〈미지마〉 공동 설립자이자 그의 아내인 틴틴 아웅 씨는 4월8일 저녁 체포되었다. 군부정권의 탄압을 피해 1991년부터 인도와 타이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소 민트 대표는 군부가 훨씬 ‘잔인해졌다’고 느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다. 기자의 가족도 위협한다. 매일 언론인으로서 일을 계속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의 동료들은 양곤을 떠나 미얀마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군부가 폐쇄한 독립언론사 〈미지마〉는 양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임시 보도국을 차렸다. ⓒ〈미지마〉 유튜브 화면 갈무리

“세상에 우리 문제를 알려달라”

쿠데타는 언론자유를 10년 전으로 후퇴시켰지만, 동시에 독립언론들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2015년 8월 창립된 〈미얀마 나우〉는 군 총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가족 사업 비리를 고발하는 데 앞장섰던 매체다. 쿠데타 초기에는 시위 현장을 생중계하면서 시민 저항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한국에서 미얀마어 번역가로 일하는 웨 노에 흐닌 소 씨는 “(〈미얀마 나우〉는) 쿠데타 이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민 언론이 되었다”라고 평했다. 올 2월 이후 페이스북 구독자 수가 300만명 가까이 늘어난 것이 그 증거다. 기자 15명을 포함해 총직원 30명이 안 되는 소규모 언론사이지만 페이스북 팔로어는 431만명, 트위터는 33만명이다(7월28일 기준). 〈미얀마 나우〉는 군부가 1순위로 겨냥한 언론사였다.

반년간 취재기자에게도 잊기 어려운 순간이 많았다. 아웅 씨는 지난 3월 초 양곤에서 벌어진 시위를 취재하다 경찰의 강경 진압을 피해 인근 가정집에 몸을 숨긴 적이 있다. ‘지옥의 밤’이라는 수식어를 남길 만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날이다. 해가 지고도 진압이 잦아들지 않자 주인집 아주머니가 그에게 자신의 옷과 쓰레기봉투를 건네며 주민으로 위장하도록 도왔다. “붙잡히지 말고 세상에 우리 문제를 알려달라.” 아주머니의 부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써야 할 부고는 늘어났다. 시민 저항의 상징인 냄비를 두드렸다는 이유로 군인에게 고문받다 숨진 39세 오토바이 정비사와 그의 시신을 수습한 아내의 이야기, 군부에게 총격을 당한 19세 고등학생이 코로나19 사망자로 둔갑했다는 의혹을 다뤘다.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상황이라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 무성한 소문들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최대한 데이터와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쿠데타 이후 무엇이 바뀌었느냐의 질문에 아웅 씨는 “불안감”이라고 답했다. “거의 매일 누군가의 죽음을 취재하다 보니 밥 먹고 잠자는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 어렵다.” 지난 6개월간 체중이 6㎏ 줄었다.

미얀마 군부가 독립언론을 겨냥하는 근거는 미얀마 형법 505(a)조다. 공포심 유발, 공무원 선동 및 가짜뉴스 유포죄. 2월14일 군부가 최대 징역 3년까지 선고 가능하도록 개정했다. 현재 미얀마 언론인들의 발목을 잡는 악법이다. 언론 탄압이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미얀마 정보부는 3월11일 기자회견에서 짧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미디어를 검열하지 않는다. 군정 최고기구인 국가평의회(SAC)의 민 아웅 흘라잉 의장은 미디어를 민주주의의 네 번째 축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 보도가 항의와 폭력을 양산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없다.” 현지 기자들은,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한다.

구금된 기자 가운데는 외국인도 있다. 5월24일 〈프런티어 미얀마〉의 편집주간인 대니 펜스터가 말레이시아행 비행기를 타려다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고향 미국 디트로이트를 3년 만에 방문하는 길이었다. 〈미얀마 나우〉 전 기자라는 이유에서였다. 토마스 킨 〈프런티어 미얀마〉 편집장은 “그가 체포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다. 형법 505(a)조가 언론인을 괴롭히는 이유는 모호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프런티어 미얀마〉는 기자의 안전을 위해 기사에 바이라인(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을 밝힌 줄)을 쓰지 않는다.

〈프런티어 미얀마〉의 토마스 킨 편집장(맨 왼쪽). 쿠데타 이후 예전 같은 대면 회의는 어려워졌다.ⓒ프런티어 미얀마

〈프런티어 미얀마〉는 2015년 1월 양곤에서 출발한 탐사보도 전문 매체다. 기자와 번역팀, 멤버십 프로그램팀 등 전부 38명이다. 종교·정치·민족적으로 복잡한 갈등을 가진 국가에서 ‘균형적인 관찰자’ 구실을 하는 언론이 되고자 했다. “군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미얀마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NUG)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면 사람들은 크게 분노한다. 우리가 ‘그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이 벌어지던 2016년, 국내 언론이 외면하던 반인륜 범죄 및 제노사이드 문제를 다뤘을 때도 그랬다.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토마스 킨 편집장은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된 얘기라고 믿었다. (〈프런티어 미얀마〉가) 무슬림 조직의 자금을 지원받는다는 음모론까지 나돌았다”라고 말했다.

2007년 미얀마에 정착한 토마스 킨은 군부정권과 민주화 이행기를 모두 경험한 언론인이다. 그는 미얀마 저널리즘이 극복해야 할 위기는 단순히 군부의 명시적인 탄압만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2017년 8월 로힝야족 학살에 대한 국제사회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은 “관영 신문을 읽고 국영방송을 통해 발표되는 뉴스를 들으라”고 말했다. 로힝야족 학살을 보도한 〈로이터〉 기자 2명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한 것도 2018년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킨 편집장이 보기에 지난 5년은 밖에서 보면 언론의 황금기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언론이 신뢰를 잃는 시간이었다. “(아웅산 수치가) 독립언론과 기자들을 비판할 때마다 언론의 이미지가 추락했다. 사람들은 언론보다 아웅산 수치라는 인물을 더 존경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쿠데타는 독립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냉소를 단번에 뒤바꾸는 사건이었다. 〈프런티어 미얀마〉의 한 기자는 지난 4월 소수민족 지역인 사가잉주 카니 타운십에서 수렵총을 만들어 군부와 교전하는 시민방위군(PDF)과 며칠을 동고동락하며 르포르타주를 써내 화제가 되었다. 킨 편집장은 “내가 알기로 취재기자로서는 처음 접근한 지역이었고 취재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지역 시위를 취재한 사진기자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위자들에게는 언론을 포함한 외부인은 모두 잠재적인 위협이다. 그들과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쌓은 유대를 바탕으로 〈프런티어 미얀마〉는 미얀마 시민들이 군부의 주머니로 들어갈 전기요금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이나, 군부가 국영 소유의 이동통신사와 협력해 전화와 인터넷을 실시간으로 감시한다는 의혹을 심층 보도했다. 2020년부터 시작한 유료 구독 회원이 2월1일 이후 두 배가량 늘었다.

인기를 얻은 건 〈미지마〉도 마찬가지다. 웹사이트, 소셜미디어와 위성TV 채널, 애플리케이션 등에서 거의 600만명에게 도달했다. 군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2012년 이후 미디어 플랫폼을 다변화한 결과다. 소 민트 대표는 독자들과 거리를 좁힌 것이 쿠데타 국면에서 나온 ‘성과’라고 했다. 군부가 인터넷을 끊고 정보를 통제하는 동안, 〈미지마〉는 메신저로 실시간 소통 채널을 만들어 루머와 가짜뉴스에 대응하고 시민들의 제보를 받았다. ‘인터넷이 군부에 의해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습니다. 쿠데타 세력의 착취나 살해에 대해 제보하고 싶다면 아래로 연락주세요.’

체포 위협에 이은 재정난

검증되지 않은 루머는 예상보다 빠르게 퍼졌다. 시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번지기 시작했다. 소 민트 대표는 “군부는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퍼트리기 위해 페이스북 가짜 계정을 이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하는 의료진이 코로나19 치료용 산소통을 숨겼다거나 Z세대 시위대가 마을 요새에 방화를 하고 도망쳤다는 게시글, 국민통합정부(NUG) 측 인사가 미얀마에 폭발물 설치를 모의하겠다고 밝히는 영상까지 있었다. 모두 〈미지마〉가 가짜뉴스로 판명한 것들이다. 〈미지마〉 유튜브에서 ‘잘못된 정보 단속반(Misinformation Busters)’ 코너에 올라오는 2~3분짜리 콘텐츠들은 가짜뉴스 당사자를 직접 인터뷰할 뿐 아니라 해당 게시물에 얼마나 많은 ‘좋아요’와 ‘공유하기’가 눌렸는지도 확인한다. 카렌족 시민방위군이 군대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영상은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9000여 개를 받았으나 취재 결과 거짓이었다.

7월14일 양곤 시내에서 열린 군사 쿠데타 반대 시위에서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여성들. ⓒAFP PHOTO

〈미지마〉는 2월1일 이후 광고와 콘텐츠 판매 수익이 모두 끊겼다. 군사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추가되면서 기업들이 광고 게재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미얀마 나우〉도 지난 3월 이후 국내 후원 계좌가 중지되었다. 두 언론사는 모두 해외 미디어 후원기관의 도움에 기대고 있다. 재정난은 체포 위협에 이어 미얀마 독립언론을 괴롭히는 또 다른 난관이다. 시민들의 후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미얀마 나우〉의 한 기자는 “지금 미얀마는 코로나19와 쿠데타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군부가 산소통을 차단해 시민들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코로나19로 사망하고 있는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미얀마는 7월 들어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며 의료자원 부족으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 앞에서 감정을 자제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웅 씨는 지난 6개월간 기자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럴 때마다 “이 싸움은 (언론인)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되뇌곤 한다. 2021년은 군부 입맛대로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권위주의와 고립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언론인들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계속해서 보도할 것. 끝까지 붙잡히지 말 것.

7월 초가 되자 감시가 삼엄해졌다. 아웅 씨는 다시 한번 짐을 싸야 했다. 짐은 늘 단출하다. 노트북과 옷 두 벌, 신분증, 현금과 상비약. 미얀마 언론 자유는 10년 전으로 후퇴했을지 몰라도 그의 여정은 지난 6개월간 미얀마 곳곳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닫힌 건 편집국뿐이다.

 

8월23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2021년 〈시사IN〉 저널리즘 콘퍼런스’에 참가하면 미얀마 언론 현황을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2021 〈시사IN〉 저널리즘 콘퍼런스 참가 신청하기(무료)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