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한 기자가 양곤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취재하고 있다. ⓒHkun Lat

기원전 146년. 지중해 무역 강국 카르타고가 로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페니키아인들은 중무장한 지상 최고의 군대에 참담하게 패배했다. 카르타고 인구 8할이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노예가 됐다. 그렇게 카르타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죽음의 장면을 기록할 사가(史家)도 모두 죽었다. 이 (전투가 아닌) 학살은 1500여 년 후 유럽에서 낡은 문서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만약 역사의 장면 장면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히틀러가 유대인과 집시를 가스실로 보내는 장면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3공수여단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할 때의 영상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독일 기자 힌츠 페터가 광주시청 앞 상무관에 놓인 그 무수한 시신들을 찍은 사진을 실시간으로 트위터에 올린다면? 지금 미얀마는 모든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촬영되고, 기록되고, 저장되고, 공유된다.

2월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1000명 가까운 시민이 군경의 폭력에 희생됐다. 그 죽음들은 기록되고 있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 홈페이지에 가면 사망자의 인적사항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심지어 그들이 몸 어디에 총을 맞아 숨졌는지 하나하나 기록돼 있다.

미얀마 군정이 시민 100여 명을 살해한 3월27일, 몬주의 몰메인에서 10세 소녀 아예 미얏 투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코코넛을 들고 뛰어놀고 있었다. 총소리가 났고 소녀는 왼쪽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죽었다. 시민들은 앞다투어 이 비극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렸다. 며칠 뒤 나는 그 가족이 어떤 사람들이었고, 몰메인 일대에서 며칠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4월4일 지구 반대편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을 1면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반년이 훌쩍 지났다. 서슬 퍼런 계엄령 속에서 시민들은 여전히 현장의 소식을 전한다. 아예 미얏 투가 죽었던 그 도시에서 8월3일 대학생들이 잡혀갔다. 몰메인 대학에 다니는 마난 산다르 윈과 마 수 파잉 퓨가 시위 혐의로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그들은 차익마요 감옥에 수감됐다.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이 사실을 마을 주민들이 올린 SNS에서 봤다. 여의도와 방콕과 몰메인은 이렇게 한 공간에 있다.

3월27일 몬주 몰메인에서 군부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10세 소녀 아예 미얏 투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Myint Soe

쿠데타가 일어나자 나는 한국어에 능통한 양곤의 한 대학생을 수소문해 전화로 번역을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이 양곤의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 한국말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나는 이 영상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고, 이틀 뒤인 2월21일, 그 영상은 KBS 9시 뉴스에 보도됐다. 무릎을 꿇고 한국말로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청년들의 영상은 한국인이 미얀마 사태에 관심을 갖게 하는 큰 계기가 됐다.

지난 5월6일, KBS가 미얀마 임시정부 격인 국민통합정부(NUG) 사사 대변인과 화상통화를 했다. 이 사실은 사사 대변인의 트위터를 통해 당일 9시 뉴스보다 더 빨리 온라인에 올라왔다. 우리는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촘촘하게 함께 얽혀 있다. 4월4일, 국경 마을 매솟에서 카렌민족해방군(KNLA)의 소 포 도 장군을 인터뷰했다. 그는 지역 주민이 촬영한 파푼 지역의 참담한 공습 영상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우리가 인터뷰하는 과정을 KNLA의 한 군인이 촬영했는데, 이틀 뒤 KNLA 유튜브에는 한국의 KBS가 소 포 도 장군을 인터뷰했다는 영상이 실렸다.

미얀마 시민혁명은 ‘아랍의 봄’ 2.0 버전

미얀마 군정은 보도를 막기 위해 언론사 10여 곳을 폐쇄했다. 문을 닫은 언론사의 기자들은 숨어서 기사를 보낸다. 독립언론 〈미얀마 나우〉와 〈미지마〉 기자들은 국경 어느 밀림에 숨어 기사를 올린다. 1980년 신군부는 보안사 군인들을 신문사에 상주시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도려냈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현장 영상과 사진이 무한 복제되고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그리고 어느 오지에 숨어 있는 기자들에게 전달돼 기사로 정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휴대전화로 찾아온다.

지난 5월9일 타이 치앙마이에서 〈버마 민주의 소리(DVB)〉 기자 등 5명이 밀입국 혐의로 타이 경찰에 체포됐다. 3월8일 군정에 의해 허가가 취소된 이 언론사 기자들은 타이에 밀입국해 허름한 천막 스튜디오에서 보도를 해오다 적발됐다. 역시 쿠데타 정부인 타이 정부는 이들의 강제송환 방침을 밝혔지만, 타이 외신기자클럽과 앰네스티 타이 지부가 강력 반발했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달아난 시민의 강제송환을 금지한 ‘농르풀망 원칙(Non-refoulement)’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두 달 후 타이 정부는 쉬쉬하며 이들의 망명을 허용했다. 타이 정부는 밝히지 않았지만, 스페인 언론이 이들의 입국 사실을 보도하면서 나는 이들이 유럽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10년 튀니지의 한 운동가 리나 벤 메니는 자신의 블로그에 시위 중 사망한 시민 5명의 사진을 올렸다. 이 사진은 순식간에 휴대전화를 타고 전국으로 전해졌다. ‘아랍의 봄’은 이렇게 화염병 대신 ‘페이스북’을 타고 번졌다. 벤 알리 독재는 무너졌고 불길은 이웃 나라들로 번졌다. 곧이어 30년 장기 집권을 한 무바라크도, 리비아의 철권 통치자 카다피도 무너졌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전해온 어떤 ‘문서’나 ‘입소문’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했다.

미얀마의 시민혁명은 ‘아랍의 봄’의 2.0 버전이다. 이념도 없고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도 없다. 10년 전 아랍의 봄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과 독재 그리고 사회 부정의와 싸운다. 2009년 이란의 녹색혁명 때 젊은이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린 자기소개는 ‘Where is my vote?(내 표는 어디에 있나)’였다. 미얀마 국민 2000만명이 페이스북 가입자다. 그들은 모두 총 대신 휴대전화를 들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정보는 공기처럼 실시간으로 전파된다. 시민들은 공유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며, 행동하고, 연대한다. 이 움직임을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로 직접 보고 들은 한국 청년에게 이 사건은 어느 낯선 민족의 슬픈 서사가 아니다. 미얀마의 현대사가 우리의 현대사와 겹쳐지고, 나의 존엄성이 그의 존엄성이 된다. 한국 시민들은 그래서 같이 슬퍼하고 분노한다.

미국이 이렇게 소극적인 적은 없었다

쿠데타 7개월, 시위는 크게 사그라들었다. 국민통합정부(NUG)의 연방군 창설은 어려워졌다. 카렌민족연합(KNU), 카친독립군(KIA) 등 소수민족 반군과의 연대는 종교와 민족의 벽을 넘어야 한다. 여기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범람한다.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람 간의 연대를 막는다. 연일 확진자가 늘면서 시위나 파업 동력은 매우 약해졌다. 정치 외교적 해법도 쉽지 않다. 냉전 이후 선악의 판단을 내려주던 미국은 미얀마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주저한다. 책임 있는 당국자 누구도 “미얀마의 합법적인 정부는 국민통합정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국은 8월4일에서야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을 통해 국민통합정부 진 마 아웅 외교장관과 전화로 첫 공식 접촉을 가졌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 5월24일, 독립언론 〈프런티어 미얀마〉 미국인 편집기자 대니 펜스터를 체포했다. 양곤 국제공항에서 굳이 고향으로 떠나는 미국인을 ‘보란 듯이’ 잡아 고문으로 악명 높은 인세인 교도소에 가뒀다. 그는 지난 7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자국민이 쿠데타 군부에 체포 감금된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국무부의 성명 말고) 어떤 추가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쿠바에서,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심지어 모가디슈에서도 미국이 이렇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미얀마 군정의 조 민 툰 대변인은 지난 4월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의 생산품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대니 펜스터의 체포 소식을 알리는 〈프런티어 미얀마〉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빨리 바이든에게 전화해. 미얀마 군정이 장기가 사라진 시신을 가져가라고 전화하기 전에.”

아세안 특사로 선정된 에리완 유소프 브루나이 제2외교장관.ⓒAP Photo

지난 4월 ‘미얀마 군부의 즉각적인 폭력 중단’에 합의한 아세안(ASEAN)의 합의는 무기력하게 깨졌다. 아세안은 미얀마에 보내기로 한 특사 선정을 놓고도 갈등을 빚었다. 강경한 국가(인도네시아)와 미온적인 국가(타이)가 대립하면서 100여 일을 소모했다. 중간 지점에서 아세안 특사로 선정된 에리완 유소프 브루나이 제2외교장관이 미얀마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기대는 찾기 힘들다. 그가 미얀마 방문길에 수감 중인 아웅산 수치 고문을 만나리라고는 더 기대하기 힘들다. 크리스틴 슈래너 버기너 유엔 미얀마 특사는 이미 미얀마 방문을 위해 두 번이나 타이를 찾았지만 문전박대당했다.

국민통합정부(NUG)는 오는 9월 유엔 총회에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기 위한 첫 시험을 치른다. 유엔은 총회를 열고 미얀마 군정이 해임한 초 모 툰 대사와 미얀마 군부가 임명한 군 출신 아웅 투레인 대사 중 한 명의 합법성을 인정해야 한다. 선택받지 못한 쪽은 그만큼 외교적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편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8월5일 뉴욕에서 초 모 툰 대사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혐의로 미얀마인 2명을 체포했다.

1988년에도 그랬다. 미얀마 88항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다시 군부로 돌아갔다. 그 시위에서 미얀마 국민 3000여 명이 숨졌다.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승리를 거뒀지만 군부는 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2020년 총선에서 시민들은 다시 큰 표 차이로 문민정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군부는 또 쿠데타를 선택했다. 길고도 긴 앙시앵레짐의 끝은 어디일까. 쿠데타의 주역 민 아웅 흘라잉은 8월1일 자신이 총리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시민 960명의 죽음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그는 총리로 등극했다.

30년 넘게 독재와 싸워온 이 ‘황금의 나라’ 국민은 언제쯤 다시 국민주권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정치적·외교적 해법이 꽉 막힌 미얀마에서 시민들의 투쟁은 위험해지고 고립되고 있다. 이 장면 장면이 한국인에게는 현대사의 데자뷔다. 복잡하고 불편하다. 미얀마 시민 상당수는 ‘뭐라도 좀 도와주고 싶어 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소통하고 있다. 그렇게 한 명의 목격자로 이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

미얀마에 하루빨리 민주화가 찾아오기를, 이한열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청년의 동상이 술레 파고다(미얀마 양곤 중심부에 있는 불탑) 어느 거리에 우뚝 서는 날이 오기를. 미얀마 시민들의 안전과 승리를 기원한다.

기자명 김원장 (KBS 방콕 특파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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