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권력은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에게 이양됐다.”

2월1일 미얀마 쿠데타는 군부 소유의 ‘미야와디 TV’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득표율 83.2%로 압승하자 군부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군부와 시민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쿠데타가 감행되었다. 문민정부 2기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미얀마가 군부독재라는 과거로 회귀한 지 300일이 지났다.

쿠데타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이 군부의 무차별 공격을 받고 숨지거나 체포되었다. 때로 길을 지나던 어린이와 노인들도 총상을 입었다. 소수민족 반군을 향한 공습으로 난민 수십만 명이 발생했다. 공중보건체계가 무너지면서 이후 6개월여 동안 코로나19 대유행으로 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청년들은 시민불복종운동(CDM)을 그만두고, 무장투쟁 노선으로 접어들었다.

미얀마 군부는 오랫동안 지속된 국제사회의 제재 및 고립화 조치에 이미 적응해버린 상태였다. 유엔과 아세안 등 국제사회가 쿠데타에 공식적으로 경고를 보냈으나 군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 4월25일 열린 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은 쿠데타 사태 평화적 해결을 위한 5개 합의사항을 약속했다. 즉각적인 폭력중단, 건설적 대화, 인도적 지원, 아세안 특사의 미얀마 방문 등이다. 미얀마 군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급기야 민 아웅 흘라잉은 8월2일 ‘1년 뒤 총선 실시’ 약속을 깨고 2023년 8월까지 비상통치 체제를 이어가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스스로 총리에 취임했다. 동남아 연구자들은 군부의 장기 집권 플랜이 시작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 후 미얀마는 사실상의 내전 상태에 접어들었다. NLD 소속 의원들과 소수민족 대표가 중심이 된 민족통합정부(NUG)는 9월7일 군사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유엔총회를 앞두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조치였다. “국민 방어 전쟁이 시작됐다. 미얀마 시민들은 민 아웅 흘라잉이 이끄는 군사정권에 대해 봉기하라.”

10월18일 미얀마 군부는 반쿠데타 시위로 구금 중인 5600여 명을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10월26일 아세안 정상회의에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의 참석이 불허된 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나흘 후인 10월22일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는 최소 110명이 교도소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구금되었다고 전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지난 10개월간 미얀마에서 일어난 비극의 아주 일부를 나열한 것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은 전보다 떨어졌다. 그러나 미얀마 지역 곳곳에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끊긴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 현장에는 미얀마의 시민 저항과 군부 폭력을 기록하는 기자들(사진)이 있다. 미얀마 현지에서 취재 중인 기자 두 명이 쿠데타 300일을 맞아,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기 위해 〈시사IN〉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두 미얀마 기자가 거리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기록한 300일을 싣는다.

미얀마 양곤에 있는 인세인 교도소. 영국 식민지 시절 세워진 이 원형 교도소는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 운동가를 가두는 곳으로 악명 높았다.ⓒEPA

“잔인함과 권위주의 통치의 상징” “미친(insane) 교도소”. 지난 5월29일 〈뉴욕타임스〉가 묘사한 미얀마 인세인(Insein) 교도소의 모습이다. 134년 전의 영국 식민지 시절 세워진 이 원형 교도소는, 반세기 넘게 지속된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 운동가를 가두는 곳으로 활용됐다. 전직 간수 및 재소자들이 이곳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열악한 시설, 고문 정황을 알리면서 ‘악명 높은 인세인 교도소’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도 2003년과 2009년 두 차례 이곳에 수감됐다.

2월1일 이후,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로 체포된 시위자 대다수가 갇힌 곳도 이 교도소다. 그중엔 취재하다가 체포된 언론인도 많다. 석방된 기자들은 그들의 경험을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미지마〉 기자인 버마 툰 씨(35)는 가짜뉴스 유포 및 선동 혐의로 기소되어 2월28일부터 6월30일까지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쿠데타 군부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정치인과 언론인을 붙잡아두고 싶었을 것이다. 국제적인 관심과 압박이 없었다면 나는 수십 년간 감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보낸 4개월간의 수감 일기를 발췌·번역해 싣는다. 11월20일 기준, 언론인 107명이 체포되었고 97명이 여전히 구금되어 있다.

나는 지난 2월28일 양곤시 메니곤 지역에서 취재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밀크티 동맹’을 주축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그날이다. 도주하는 시민과 추격하는 경찰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 뒤를 바짝 쫓아오던 경찰관 3명이 나를 붙잡았다. “미얀마 기자다”라고 거듭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앞에 나타난 모든 기자를 다 체포하고 말겠다’는 듯한 경관들의 그 표정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닭장차’라 불리는 경찰차였다. 그 안에서 바라본 거리 모습은 내전으로 황폐해진 중동 국가의 길거리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경찰과 군인들은 시위하는 청년들을 향해 끊임없이 총격을 가했다. 작은 총소리부터 폭탄 터지는 소리까지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양곤의 거리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 내가 탄 차량 안으로 최루탄 연기가 마구 들어왔다.

경찰은 사진기자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잠시 후 키 작은 여성이 끌려 들어왔다. 신분을 가리는 모자와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기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군화를 신은 경찰은 “죽일 X, 네가 그렇게 용감해?”라며 곤봉을 마구 휘둘렀다. 그 기자는 울부짖었다. AP 통신에서 일하는 사진기자였다. 하루 전인 2월27일, AP 통신 사진기자가 체포된 후 임시 고용되었는데, 취재 첫날 체포된 것이다. 경찰은 온종일 물조차 주지 않고 시위자들을 잡아들였다. 저녁쯤 되니 차량은 시위자들로 가득 찼고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트럭에 달린 환풍구에 번갈아가며 코를 내밀면서 겨우 숨을 내쉬었다.

11월16일 〈프런티어 미얀마〉 대니 펜스터 기자(가운데)가 인세인 교도소에서 풀려나 어머니를 만났다.ⓒAP Photo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먼지 가득한 어느 곳에 차가 멈췄다. 내가 탄 차량 외에도 11대가 더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가 바로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 ‘인세인 교도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m 높이의 수용소 벽을 가로등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뒤로 300명이 넘는 사람이 줄지어 있었다. 여성과 아이도 보였다.

교도관들은 무례하고 거친 태도로 우리를 대했다. ‘군사정보원’이라 불리는 직원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심문을 시작했다. 이들은 교묘한 함정을 만들어 질문했다. 우리는 그 함정에 걸려들면 죽음의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조사가 끝났다. 나는 ‘4번 건물’로 이송되었다. 도착한 방은 80여 명으로 꽉 차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 중인 교사와 학생, 청년이었다. 얼굴 전체가 시커멓게 멍들거나, 혼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경찰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교도소 생활엔 엄격한 규칙이 요구되었다. 수감자들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줄을 서서 점호를 받았다. 그때마다 ‘훔치지 말 것, 무기를 들지 말 것, 마약을 사용하지 말 것, 뇌물을 주지 말 것’ 같은 교도소 내 규칙을 외쳐야 했다. 비좁은 방에서 수십 명이 한꺼번에 일어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방에 80명이 넘을 때면, 반듯하게 누울 공간이 없어서 옆으로 누워 자야 했다. 오전 7시30분에 일어나 밤 9시에 취침했고 목욕과 독서는 제한되었다. TV는 국영방송 채널만 볼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쌀자루를 옮기고, 풀을 뽑았다. 어떤 이들은 교도관에게 돈을 줘 강제노동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처음 두 달은 가족과 연락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 규칙을 거부했다. 같은 방에 있던 다른 기자와 학생 다섯 명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교도소 안이지만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라 부당하게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굴욕적으로 감옥 내 규칙을 외치기보다 차라리 고문당하는 쪽이 떳떳했다. 교도관은 규칙을 외치지 않을 경우 모종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규정 외치기를 거부하다가 정치범을 수용하는 ‘11번 건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 유키 기타즈미 씨, 미국인 기자 대니 펜스터 씨 등을 만났다. 유키 기타즈미 기자는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를 취재하다 4월18일 양곤 자택에서 연행된 뒤 구속 기소되었다(일본 정부가 군부 측에 석방을 요구했고 한 달 만에 풀려난 그는 5월14일 귀국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내가 가지고 있던 취재 정보를 그에게 모두 전달하지는 못했다. 독립언론 〈프런티어 미얀마〉의 편집주간인 대니 펜스터 기자는 5월24일 양곤 국제공항에서 체포 구금된 후 인세인 교도소에 갇혔다(미얀마 군부는 11월12일 테러와 선동 혐의로 그에게 11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미국 정부의 석방 요구로 펜스터 기자는 선고 뒤 사흘 만에 석방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교도소장은 우리가 대화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감방을 다시 옮겼다.

‘명상 수행소’라 불리는 그 방은 미결수 정치범들을 따로 수용해 고문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교도관은 우리에게 앉았다 일어섰다를 시키고 명령에 따르라고 소리쳤다. 나와 동료들은 대답했다. “우린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다. 기자이고 학생이다.” “우리는 말할 권리가 있으며 정치범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군부독재다. 오로지 군부독재 타도, 그 하나다.”

이 같은 저항의 외침이 악명 높은 이 감방에 수감된 300여 명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흔들었을까. 교도관들도 우리가 소리치는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일부 수감자들은 우리에게 대신 용기를 내줘서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그날 일로 나는 일반 죄수들이 있는 건물로 옮겨져 18일 동안 독방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아직도 교도소에 있는 듯하다

이후 3개월간 재판을 받았다. 군사법원은 감옥 내에 있다. 법원으로 가는 경찰 차량은 언제나 수감자들로 빽빽했다. 모두가 비를 맞은 듯 전신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에게 적용된 ‘가짜뉴스 유포 및 선동’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은 수갑을 차고 재판을 받는다. 총기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늘 주변에 있었다.

10월19일 인세인 교도소에서 석방된 이들을 실은 버스가 도착하자 시민들이 환영하고 있다.ⓒEPA

6월이 되어서야 체포된 시위자들을 풀어준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은 풀어줘도 나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얀마 군부는 6월30일 기자와 시위자를 포함한 구금자 2296명을 석방했다. 대부분 반쿠데타 시위에 관여하다 선동죄로 기소된 이들이다. 인세인 교도소에서는 700여 명이 풀려났다. 석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지만 함께 저항운동을 벌였던 동료 3명의 이름은 없었다. 감옥에 여전히 동료가 남아 있으니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6월30일 비가 오는 날이었다. 감옥 내 철창 안에 남아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완전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감정적으로 모든 연료가 소진된 것 같았다. 양곤시 군사위원회 관계자는 우리를 풀어준 군부 측에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200명 넘는 사람들이 감옥 앞을 메우고 있었다. 곧 석방될 700명 중 자신의 가족과 친구가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변호사의 집을 찾아가 인사한 뒤, 마중 나온 남동생과 집으로 돌아왔다. 체포된 지 4개월하고도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석방된 지 이틀 만에 나는 취재를 다시 시작했다. 비인간적인 처우와 고문은 민주주의가 가장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감옥에서 경험한 일들 그리고 갇힌 정치인들에 대한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다시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는 것은 물론 위험한 일이다. 나와 함께 출소한 기자 중 상당수가 현장을 떠났다. 지인들은 난민으로 망명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지만 나는 미얀마를 떠나고 싶지 않다. 어디에 있든 저널리스트로서 민주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것이다. 내 마음은 아직도 인세인 교도소에 갇혀 있는 듯하다.

기자명 버마 툰 (필명·<미지마>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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