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민트 〈미지마〉 대표는 군부의 언론 통제에 누구보다 익숙한 인물이다. ⓒIPI

 

“양곤이 아니라 인도 콜카타로 가야 합니다.”

 

1990년 11월10일, 미얀마로 향하던 타이 항공기 안. 20대 청년 두 명이 알칼리염으로 만든 가짜 폭탄을 들고 조종실로 향했다. “양곤이 아니라 인도 콜카타로 가야 합니다.” 220여 명이 탑승 중이었다. ‘비행기 납치범’ 소 민트(당시 21세)는 사람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겠다”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외쳤다.

그는 1988년 이후 미얀마 군부의 탄압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비행기를 납치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콜카타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것. 이튿날 전 세계 일간지에 그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버마인들, 비누 폭탄으로 비행기 납치…다친 사람은 없어(〈보스턴 글로브〉 1990년 11월11일)’ ‘납치범, 미얀마 계엄해제 요구(〈서울신문〉 1990년 11월11일)’.

당시에는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각오”를 하고 벌였던 일이다. 그는 1988년 이후 미얀마의 정치적 망명자와 연대한 인도 하원의원 30여 명이 탄원서에 서명해 보석으로 풀려났고, 재판 끝에 2003년 7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5년 11월10일 소 민트 〈미지마〉 대표가 강연 플랫폼 ‘테드톡(TED×Talks)’에서 그날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는 1988년 항쟁(미얀마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군부에 의해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이후 미얀마를 떠나 인도와 타이에서 24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민간으로 정권 이양이 시작된 2012년, 그가 설립한 독립언론 〈미지마〉와 함께 미얀마로 돌아왔다.

‘미지마’는 힌디어로 중립이라는 의미다. 〈미지마〉는 1998년 8월, 당시 29세 운동가였던 그가 아시아 국가에 미얀마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인도 뉴델리에 세운 망명 언론이다. 미얀마어와 영어로 군부의 인권침해 사실을 알렸다. 공을 인정받아 2007년 〈미지마〉는 국제언론인협회(IPI) ‘자유언론 개척자상’을 수상한다. 언론 보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언론에게 주는 상이다. 현재 〈미지마〉는 종이신문 외에도 주간지, TV, 라디오 등을 운영하는 종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소 민트 대표는 군부의 언론 통제에 누구보다 익숙한 인물이다. 2021년 2월1일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가장 먼저 했던 조치는 〈미지마〉의 TV 채널 중단이었다. 3월8일에는 〈미지마〉의 발행 허가를 취소했다. 지난 7월5일 소 민트 대표를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인터뷰했다. 소 민트 대표와 동료들은 현재 비밀리에 임시 보도국을 차려 뉴스를 제작하고 있다. 국제사회에 미얀마 현실을 알리기 위해 ‘비행기 납치’ ‘망명 언론’을 주도한 그는 2021년의 고립과 단절에 어떻게 맞서고 있을까.

8월19일이면 쿠데타 발발 200일째다. 〈미지마〉는 어떻게 운영 중인가?

군부가 언론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도록 여러 지역에다 편집국 기능을 분산시켰다. 타이에서 수입한 위성방송 송신 안테나로 방송을 송출하고, 소셜미디어와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보도하고 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독립언론이 생존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2012년 미얀마로 돌아온 후부터 출판물, 방송 등 플랫폼을 다양화한 것도 그 때문이다. 군부가 한두 개 플랫폼을 폐쇄하더라도 플랜 B, 플랜 C가 있어 보도가 계속될 수 있다.

쿠데타를 예상했나?

지난해 11월 총선 결과를 부정했기 때문에 조짐이 있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이유는 가족 사업 같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특히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은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되려 하는 사람이다. 군부 내에서도 권력을 분배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2008년 헌법’이 군부에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음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헌법을 위반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오랫동안 군부 통치를 겪었다. 과거 언론 통제와 다른 점이 있나?

언론에 대한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진압이 훨씬 잔인해졌다는 거다. 예고 없이 찾아와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수색하고 기자임이 밝혀지면 바로 체포한다. 기자들의 가족을 잡아간 적도 있다. 누군가와 인터뷰하려면 보통 기자라고 밝혀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기가 어렵다. 〈미지마〉 기자라는 사실이 혹시라도 군부 지지자에게 알려지면 체포될 것이다.

〈미지마〉 공동 설립자인 틴틴 아웅도 4월8일 체포되었다.

쿠데타 이후 독립언론에서 계속 일할 것인가는 생사의 문제가 되었다. 〈미지마〉와 관련된 누구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직원 100여 명 중 지금까지 18명이 미얀마 형법 505(a) 조항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5명은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중 한 명은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최근 감옥에서 석방된 기자들에게 그동안 겪은 일을 들었다. 2주간 낯선 곳에 끌려가 심각하게 구타당했다고 한다. 〈미지마〉 기자들만 겪는 일이 아니다.

2015년 11월 소 민트 〈미지마〉 대표가 ‘테드톡’에서 ‘납치범’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있다. ⓒ〈TEDxTalks〉 유튜브 화면 갈무리

독립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달라진 반응을 체감하나?

지난해보다 지난 4개월간 독자가 크게 늘었다. 페이스북 구독자는 총합 400만명, 유튜브 구독자는 48만명이 늘었다. 과거에는 군사정권이 퍼트리는 프로파간다와 가짜뉴스 때문에 언론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컸다. 기자들은 ‘사회 혼란만 가중시키는 존재’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독립언론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사진과 영상, 사건을 제보하는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소셜미디어는 미얀마 전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1988년 항쟁에도 참여했다고 들었다. 2021년 반쿠데타 시위는 어떻게 다른가?

흔히 Z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들이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많이 참여한다. 우리 세대보다 더 강해졌고 더 통합되었고, 더 똑똑한 전술을 보인다. 인터넷이 차단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소통 방법을 찾아낸다. 굉장히 빠르게 움직인다. 또 미얀마 주류 세력(버마족)과 소수민족 사이에 이해와 통합의 장이 열렸다. 1988년 항쟁 때는 없었던 장면이다. 시민불복종운동에 학생뿐만 아니라 의료인, 공무원, 교사, 엔지니어 등 전문직 종사자들까지 참여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점도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독립언론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양곤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기자들끼리 매일 외친다고 들었다.

체포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젊은 기자들을 보며 용기를 많이 얻는다. 대개 24세에서 30세 사이다. 기자들은 전국에서 일어나는 시위와 교전, 군부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을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시민들은 이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 군부는 이러한 정보를 끊임없이 차단하려 한다.

한국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얀마 시민들에게 연대를 보내는 한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이룩된 국가다. 과거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얀마는 한국에게 많은 걸 배웠다. 나는 독립언론과 민주주의가 같은 말이라 믿는다. 독립언론을 강화하려면 민주적인 공간이 필요하고 민주주의가 단단해지려면 강한 독립언론이 필요하다. 〈미지마〉 같은 독립언론이 군사정권하에서 계속 보도를 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미얀마 독립언론을 지지해주길 바란다.

 

■ 8월23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2021년 〈시사IN〉 저널리즘 콘퍼런스’에 참가하시면 미얀마 언론 현황을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2021 〈시사IN〉 저널리즘 콘퍼런스 참가 신청하기(무료)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