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주한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군부에 의해 사망한 시민들의 영정을 든 재한 미얀마 시민단체 사람들. ⓒ시사IN 조남진

어느 날 불쑥 내 삶에 끼어든 쿠데타라는 괴물과 싸움을 시작한 지 100일이다. 쉽게 끝나지 않을, 희생이 따를 싸움이라는 것을 짐작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 800여 명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과연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100일간의 반쿠데타 저항운동 속에서 보여준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와 열망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60여 년 동안 국민 위에 군림하며 국민을 탄압해온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전국에서 시민불복종운동(CDM)을 전개했고 학생들은 누구보다 앞장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혹시 모를 죽음에 대한 유언을 남기고 시위 현장에 뛰어드는 자식을 부모는 차마 말리지 못했다. 그리고 135개 민족이 함께하는 연방제에 근거한 민주정부를 외쳤다. 그것이 미얀마가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결과로 지난 4월16일 드디어 국민통합정부(NUG)가 정식 출범하고 미얀마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무력하다. 자국민을 학살한 집단의 우두머리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은 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국가수반의 예우까지 받으며 보란 듯이 참석했다. NUG는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짓이라고 공식 항의하고 취소를 요청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저항운동을 해온 미얀마 시민들에게는 더 없는 무력감을 주는 일이었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화가 나고 실망스러운 것은 선임된 NUG 각료 중 누구도 수많은 국민들의 죽음 앞에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과 과오에 대한 공식 사과나 어떠한 유감 표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오늘의 사태를 불러오고 군부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분명 집권 세력 정치인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미얀마의 많은 국민들은 그들에게 권리를 위임하고 기대를 했지만 군부의 억압에 무력했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사과와 빠른 대책이 나와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 그것이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인들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물론 군부의 오랜 지배 아래서 벗어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변명의 여지도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피 흘리고 죽기 전에 국정 책임자들이 국민을 위해 죽을 각오로 군부와 싸웠다면 이처럼 쉽게 국가권력을 빼앗기지 않았을 터이다. 100일 동안 국민들은 군부 쿠데타에 맞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싸웠고 다쳤고 그리고 죽었다. 늦었지만 이제 정치인들이 싸워야 한다. 고귀한 희생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이제 미얀마 정치인들이 군부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울 차례다. 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이후 ‘협상’ ’타협’이라는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청년 저항운동 세력 내에서는 이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 집단에 대한 형식적인 처벌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크다. 만약 군부와의 협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NUG는 죽을 각오로 그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죽음으로써 저항한 시민들의 뜻에 그나마 가까워지리라고 믿는다.

3월27일 ‘미얀마 군의 날’, 서울 홍대 앞에 세워진 미얀마 희생자 분향소에 시민들이 붙인 추모 글. ⓒ시사IN 조남진

1980년 5월의 광주와 데칼코마니

돌아보면 지난 100일은 평범하기만 했던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미얀마 내에서는 잔혹한 군부의 총탄에 맞서 시민들이 맨몸으로 싸우며 분노에 찬 전사가 되었다. 이뿐 아니라 해외에서 유학하는 미얀마 학생들과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조국의 민주화를 외치는 운동가가 되었다. 2009년 한국에 유학을 와서 2년 전 한국인과 결혼한 나 역시 코로나19를 걱정하고 임신한 뒤엔 뱃속 아기를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는 평범한 주부였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내 삶은 모든 게 미얀마의 상황에 맞춰져 움직였다. 반쿠데타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평화적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 소식들을 유튜브와 페이스북에 실어 날랐다. 그러나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희생자 수에 좌절했고 어린 동생들의 연이은 죽음에 더욱 분노하고 오열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고국의 저항 시민들을 생각하면 뭐라도 해야 덜 미안하고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재한 미얀마 유학생들과 이주노동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갔다. 이주노동자들은 쉬는 주말을 이용해 1인 피켓 시위, 가두행진을 하며 군부의 잔혹함을 외쳤고 유학생들은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미얀마의 진실을 알리려고 동분서주했다. 모두가 바쁜 100일이었고 나 또한 뱃속의 아기에게 미안하지만 태교 대신 잔인무도하고 끔찍한 살인 현장 영상을 매일같이 보며 통번역을 해야 했다. 나뿐 아니라 미얀마의 엄마 아빠들은 같은 생각으로 100일을 싸워오고 있다. “너희 세대에겐 부끄러운 군부통치의 나라에 살게 하지 않겠다. 가난한 군부독재의 나라에 태어난 게 죄인가 하는 자괴감도 너희에겐 없을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겠다”라고 말하면서.

과거 반군부·반독재 투쟁들과 달리 이번 쿠데타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저항운동은 전국 단위로 조직적이며 체계적이다. 하지만 60여 년간 국민을 억압해온 미얀마 군부, 그들의 방식은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살인에 주저함이 없었고 더욱 잔인하고 포악해져갔다. 점점 고립되어가는 시위대 상황은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했다. 미얀마 국내외에서 유엔의 보호책임 원칙 R2P(Responsibility to protect)를 외쳤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외면했고 강제력도 구속력도 없는 성명서만 외칠 뿐이었다.

이런 냉혹한 국제사회의 민낯 속에서 과거의 비슷한 경험치로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내가 속한, 미얀마 유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는 주말이면 서울 인사동에서 피켓 시위를 한다.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 지나가는 한국인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매주 나와서 동참해주는 분도 계시는데, 독일에서 유학했다는 할머니는 유학 시절 사회운동을 함께한 미얀마 동료가 요즘 들어 생각이 많이 난다며 눈물을 훔치셨다. 당신은 5·18 광주민주항쟁을 독일에서 경험했는데 해외에 나와 있는 유학생들의 몫이 크다고 우리를 격려하셨다. 많은 이들이 외신을 통해 본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모습은 1980년 5월의 광주와 데칼코마니 같다고 한다. 고립된 광주에서 벌어진 잔혹한 역사가 현재 미얀마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같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좌절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더디지만 역사는 진보한다.”

대한민국 역시 오랜 군부독재 정권을 거쳐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군부독재 아래 피 흘리며 싸워온 결과로 얻어진 값진 열매가 민주주의다. 하지만 힘들게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오늘날도 치열하게 토론하고 논쟁을 그치지 않는다. 그만큼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은 어렵다. 연방제에 근거한 민주정부를 지향하는 미얀마.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멀고 그 길은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가 말씀하신 유학생들의 몫을 찾아 100일 또 100일 그리고 또 100일을 고민하며 싸워나가리라 다짐해본다.

기자명 웨 노에 흐닌 쏘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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