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시민군의 마지막 저항지인 구 전남도청 앞에 선 (왼쪽부터) 판 이 트 웨마웅 씨(광주미얀마네트워크 소속 유학생), 윤청자씨(오월민주여성회 회장), 초 진 트웨 씨(광주시 북구 가구공장 노동자)가 미얀마의 용기에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시사IN 이명익

“미얀마가 처음에 시작할 때 광주같이 했잖아요. 그란디 그렇게 희생자가 늘어나고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저것을 워쩌케 해야 쓸까? 계속하란 소리도 못하겄고 하지 마란 소리도 못하겄고. 그래도 도청에서 끝까지 싸우고 나왔기 땀시 5·18이라는 존재가 있지 그렇게 안 했으믄 없어. 저 사람들도 끝까지 해야 써. 근디 이것이 끝까지 하믄 너무 희생자가 많이 나오잖아요, 잉. 그 걱정일 뿐이여, 그 걱정일 뿐이여….”

김길자씨(82)는 요즘 다시 41년 전 광주로 돌아간 느낌이다.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싸운 아들이 주검으로 발견된 이후 어머니는 투사가 되었다. ‘전두환을 잡아야 한다’고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싸운 세월이 요즘 미얀마 상황 앞에 다시 겹쳐지고 있다. 이 기시감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5·18 당시 고3 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에 참여했던 김향득씨(59·사진작가)도 23세의 여성 노동자 신분으로 5·18에 참여했던 윤청자씨(64·오월민주여성회 회장)도 각자의 영역에서 미얀마와 함께하고 있다. 41년 전 오월의 광주를 겪어낸 세대들이 2021년의 미얀마에 응원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지금 당신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라고.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전남대 앞에 선 난트 샤 란 산 씨(왼쪽, 광주미얀마네트워크 소속 유학생)와 오태화씨(전남대 학생). 난트 샤 란 산 씨는 미얀마 국민통합정부(NUG) 지지를 호소했다. ⓒ시사IN 이명익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던 광주시 동구 전일빌딩 옥상에 선 김향득씨(사진작가)는 당시 계엄군의 고문과 구타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는 2008년부터 도청 사진을 찍어왔다. ⓒ시사IN 이명익
광주시 북구의 문건양(왼쪽)·김길자씨 부부는 미얀마 민주화운동이 끝까지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너무 많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이 걱정이다. ⓒ시사IN 이명익

 

기자명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sajin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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