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난민 된 미얀마 탈영 군인, “미얀마 시민혁명은 현재 진행 중” 김영화 기자 양손이 가벼웠다. 무기와 짐은 내버려두었다. 2021년 3월14일 오전 10시, 린 텟 아웅 대위(당시 29세)는 조용히 군부대를 빠져나왔다. 중국, 타이와 국경을 맞댄 미얀마 북동부 샨주에 위치한 최전방 부대였다. 탈영 사실이 발각되면 최악의 경우 그 자리에서 사살될 수도 있다. 가까운 정글로 숨어든 린 텟 아웅 대위는 며칠을 홀로 헤맸다. 사흘 동안 물 이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해방 구역’이라 불리는 타이 국경지대에 발을 디딘 건 14일째 되던 날. 무모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에 이 미얀마의 봄, 혁명의 우먼파워를 비추다 메리초 (필명·미얀마 시민기자) 메리초 씨는 미얀마 동북부 샨주에서 활동하는 기자다. 그는 쿠데타 발발 이후 시민기자로 뛰어들었다. “군이 기자들을 탄압한 이후로 누구도 거리에서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군부의 만행을 취재해서 이 혁명에 함께하고 싶다.” 전국 곳곳에서 무장투쟁이 확산되자 시민방위군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거기서 그는 수많은 여성 방위군들을 만났다. 최전선에 서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성 방위군들의 역경과 투쟁을 조명해야겠다고 다짐한 까닭이다. 아래는 메리초 씨가 여성 게릴라군들을 취재해 쓴 글이다.미얀 미얀마 최전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아세인 (필명·미얀마 시민기자) 3월27일 ‘미얀마군의 날’은 1945년 일본군에 대항해 무장 저항을 시작한 날을 기념하며 제정되었다. 공교롭게도 1년 전 이날, 군부 쿠데타 이후 최악의 유혈 참사가 벌어졌다. 반(反)쿠데타 시위를 위해 거리에 나온 시민들을 군부가 무차별 진압하면서 하루 사망자가 100명에 육박했다. 미얀마 시민들은 3월27일을 ‘저항의 날’이라고 이름 붙였다.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미얀마 상황은 여전히 극도의 혼란 속에 놓여 있다. 도시에서 기습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또 하나 심화되고 있는 저항운동은 시민방위군(PDF)의 무장투쟁이다. 특 [미얀마 쿠데타 300일] 여기서는 여전히 사람이 다치고 죽는다 마 감 (필명·<프런티어 미얀마> 기자) 마 감(29) 씨는 2013년부터 미얀마의 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후, 그는 소수민족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반인륜 범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아웅산 수치는 2017년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하고 침묵했다. 주류 언론에서는 정부를 비판하기 어려웠다. 그는 소수민족 지역 기반의 매체 〈힌타르 미디어〉, 독립언론 〈미지마〉 〈프런티어 미얀마〉 등으로 옮겨 미얀마 국경에서 벌어지는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탄압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2021년 2월1 [미얀마 쿠데타 300일] 시위하다 체포된 한 기자의 ‘수감일기’ 버마 툰 (필명·<미지마> 기자)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권력은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에게 이양됐다.”2월1일 미얀마 쿠데타는 군부 소유의 ‘미야와디 TV’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득표율 83.2%로 압승하자 군부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군부와 시민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쿠데타가 감행되었다. 문민정부 2기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미얀마가 군부독재라는 과거로 회귀한 지 300일이 지났다.쿠데타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이 군부의 무차별 공격을 받고 쿠데타, 300일이 지났다 김영화 기자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권력은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에게 이양됐다.”2월1일 미얀마 쿠데타는 군부 소유의 ‘미야와디 TV’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득표율 83.2%로 압승하자 군부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군부와 시민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쿠데타가 감행되었다. 문민정부 2기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미얀마가 군부독재라는 과거로 회귀한 지 300일이 지났다.쿠데타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이 군부의 무차별 공격을 받고 미얀마 언론인 제1원칙, ‘계속해서 보도할 것, 붙잡히지 말 것’ 김영화 기자 ‘10년 전으로 퇴보하다.’ 국제 언론감시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지난 4월20일 미얀마의 언론 위기를 설명한 한 문장이다. 2021년 미얀마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40위. 지난해보다 한 단계 내려갔다.10년 전인 2012년은 민주화 이행이 막 시작되던 해였다. 검열과 체포 위협에서 벗어나 보도 역량을 확장해가던 미얀마 언론인들은 2021년 2월1일 이후 어둠의 시기를 맞았다. 더 이상 길거리에서 ‘PRESS(언론)’라고 쓰인 조끼를 입거나 카메라를 들 수 없다.10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바로 독립언론의 존재 코로나19 확산, 미얀마 군부의 새로운 무기 되다 세인트 (필명·미얀마 독립언론 기자) 미얀마에서 다시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대유행이 발생했다. 〈시사IN〉 제715호 ‘포스코가 미얀마 군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 기사를 기고한 언론인 세인트 씨도 7월15일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가족도 모두 확진되었다. “양곤 도시 전체가 감염되고 있다. 군부가 의료자원을 통제해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다.” 쿠데타 이후 코로나19 백신 도입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백신접종 기회가 없었다. 7월18일 세인트 씨는 “더 이상 부끄럽게 살기 싫어 집을 나왔습니다” 웨 노에 흐닌 쏘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 활동가) 미얀마를 위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재한 미얀마인들로 구성된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는 미얀마 현지 목소리를 한국에 전달하는 것이 미얀마 군부를 압박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2월부터 반쿠데타 저항운동에 나선 미얀마 현지인과 한국인의 줌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시위 조직가, 초등 교사, NGO 활동가, 청소년, 국립병원 의사와 연결해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다(유튜브 ‘Voice of Asia People’). 인터뷰를 미얀마어에서 한국어로 통역할 때마다 매번 분노했고 가슴이 아팠다. 그중에서도 꼭 기록 미얀마 군부의 끝없는 위협, 결국 무기 든 시민들 제이 파잉 (미얀마 사진기자 모임(MPA) 편집장) 제이 파잉 씨(35)는 미얀마 사진기자 모임 ‘MPA(Myanmar Pressphoto Agency)’의 편집장이다. 사진기자 17명이 소속된 이 비영리 매체는 지난 넉 달간 미얀마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쿠데타 시위 현장을 최일선에서 기록했다. 30만명이 팔로하는 MPA의 페이스북에는 쿠데타 초기 대규모 집회부터 총격 현장, 게릴라 시위 등이 매일 업로드되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MPA 기자 2명이 양곤과 만달레이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제이 파잉 씨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릴 것이다”라고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16km를 걸어가야 합니다” 슈웨 포 에인 (프리랜서 기자·시인) 미얀마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슈웨 포 에인 씨(34)는 인쇄매체에 시와 에세이를 쓰던 작가였다. 지역 언론의 기자로도 활동했다. 주로 소수민족과 군부 사이 벌어진 내전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뤘다. 2016년부터 자신의 작품을 엮어 책을 냈다. 문민정부가 집권한 5년은, 미약했지만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전례 없이’ 허용되던 시기였다. 이제 자신을 비롯한 미얀마 언론인들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집을 떠났고 일부는 타이·인도 국경을 넘는다. 유엔은 지난 쿠데타 이후 최소 미얀마 언론인 84명이 체포되었고 이 가운데 48명은 포스코가 미얀마 군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 세인트(미얀마 독립언론 기자) 세인트 기자(가명)와 연락이 닿을 때마다 그의 거처가 바뀌어 있었다. “군인들이 쫓아와서 숨어 있었다(5월15일).” “시민방위군(People Defense Force)에 방어 장비를 공급하던 동료 한 명이 어제 체포되었다(5월17일).”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5월18일).” 툰 민 기자는 마감이 늦는다며 미안해했다. 그가 속한 언론사는 군부가 폐쇄한 독립 언론 중 한 곳이다. 회사가 문을 닫은 후, 군경을 피해 인터넷을 찾아다니며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Myanmar Now)〉 등에 기고 중이다 이제 미얀마 정치인이 목숨 걸고 싸울 때다 웨 노에 흐닌 쏘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 활동가) 어느 날 불쑥 내 삶에 끼어든 쿠데타라는 괴물과 싸움을 시작한 지 100일이다. 쉽게 끝나지 않을, 희생이 따를 싸움이라는 것을 짐작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 800여 명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과연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100일간의 반쿠데타 저항운동 속에서 보여준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와 열망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60여 년 동안 국민 위에 군림하며 국민을 탄압해온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얀마의 민주화를 응원한다는 것 김영화 기자 미얀마 사태가 3개월째로 접어들었다. 대규모 집회가 게릴라전으로 바뀌었고 해외에서는 민주 진영을 중심으로 한 국민통합정부(NUG)가 출범했다.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로 인한 사망자 수가 800명을 바라보는 동안 상황을 전환할 만한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민간인 학살을 멈추라는 당연한 요구부터 유엔의 R2P(보호책임 원칙) 결의, 국민통합정부(NUG)의 정식 인정 등 국제사회를 향한 개입 요구는 미얀마 국내외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에 가로막혀 있다(〈시사IN〉 제709호 ‘얼마나 더 죽어야 국제사회가 움직일 것인가’ 기사 참조).미 경찰이 휴대전화를 쏘자 모자가 날아갔다 흐닌 누 트웨 (<틴간준 포스트> 기자) 〈시사IN〉은 제709호부터 미얀마 언론인의 기고를 연재하고 있다. 군부의 탄압과 불안정한 인터넷 환경 속에서 분투 중인 미얀마 언론인들에게 지면을 내어줌으로써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다. 제709호 ‘매일 밤 8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사를 기고한 조 조 씨는 “미얀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에 알릴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라고 말했다.흐닌 누 트웨 기자는 양곤 지역의 온라인 매체인 〈틴간준 포스트(Thingangyun Post)〉의 편집장이다(현재 미얀마 여성기자협회 대표다). 쿠데타 발발 이후 손에 휴대전화만 쥐고 시위 현장에 미얀마와 포스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전혜원·김영화 기자 미얀마 항쟁 사망자가 500명을 넘기면서, 미얀마 군부를 주저앉힐 방법을 찾는 논의가 활발하다. 특히 군부의 자금줄을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의 철강그룹 포스코의 자회사인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비난받고 있다. 미얀마의 외화벌이 통로가 석유와 가스인데,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미얀마 4대 가스전 중 하나인 슈웨(Shwe) 가스전을 최대 주주로서 운영한다. 슈웨 가스전의 수익금은 55%가 미얀마 정부에, 45%는 지분을 가진 여러 회사들에 배분된다. 슈웨 가스전의 지분은 포스코인터내셔널 51%, 미얀마 국영석유가스회사( 미얀마 임시정부가 지금 해야 하는 일 장준영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교수) 미얀마의 위기는 3월27일 국군의 날을 기점으로 2단계에 접어드는 모양새다. 4월9일에는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박격포 등 중화기를 발포해 82명이 사망했다. 거리에서 목숨을 내놓고 연일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제외하고, 제도권에 있거나 혹은 민주화운동의 주도권을 쥐려는 민주 진영의 활동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과연 이들이 미얀마의 민주화를 견인할 역량을 갖추었는가? 이들이 그리는 민주주의 전략은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현지 소식을 보면 시민불복종운동(CDM)을 비롯한 저항운동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군과 경찰은 이미 양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티켓을 던져버렸다 밀크티 (가명·프리랜서 기자) 밀크티 씨는 2004년부터 취재기자로 일했다. 미얀마 언론 〈투모로 뉴스(Tomorrow News)〉의 편집장을 지낸 후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쿠데타 발발 이후 군경을 피해 안전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취재 중이다. 4월1일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가 민족통합정부 출범을 발표하자 그는 “국제사회에서 정부로 인정받는다면 아마 굉장한 변화가 생길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인터넷 연결이 불안해 대화가 자주 끊겼다. 4월6일 밤 10시, 예정 마감일보다 5일 일찍 원고를 보내왔다. “여기도 위험해졌다. 내일 새벽부터 다른 미얀마의 밤, 매일 8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 조 (<이라와디> 사진기자) 미얀마 언론인들과의 대화는 오전 11시30분쯤 재개되었다. 현지 시각 새벽 1시부터 오전 9시까지 인터넷이 끊기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연결되면 이들은 피와 연기가 뒤덮인 사진 수십 장을 보내며 “이 뉴스를 한국에 꼭 전해달라”고 말했다. 군부의 언론 통제로 미얀마에는 독립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는 곳이 모두 사라졌다(〈시사IN〉 제707호 “PRESS 쓰인 조끼 입으면 더 위험하다” 기사 참조). 〈시사IN〉은 미얀마 언론인들과 지속적으로 연대할 방법을 찾았다. 첫 번째로 현지 기자들이 보내온 기사와 사진을 차례로 연재한다. 미얀마 사 얼마나 더 죽어야 국제사회가 움직일 것인가 김영화 기자 “미얀마는 전쟁터가 아니다. 전쟁은 적어도 양쪽이 무기를 갖고 싸울 때 가능한 것이다. 맨몸으로 군경과 맞서는 상황을 어떻게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겠나?”미얀마 반쿠데타 시위에 참여 중인 메코 마웅 씨의 이야기다. 그가 시위에 나간 지 두 달이 지났다. 4월6일까지 570명이 사망했고 2700여 명이 체포되었다(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 자료). 3월 초 SNS에서는 ‘얼마나 더 죽어야 유엔이 움직일 것인가?’라는 해시태그가 올라왔으나 이제 미얀마에서는 ‘우리끼리 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위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