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6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저항의 상징인 공작새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온 시민들. ⓒ조조 제공

〈시사IN〉은 제709호부터 미얀마 언론인의 기고를 연재하고 있다. 군부의 탄압과 불안정한 인터넷 환경 속에서 분투 중인 미얀마 언론인들에게 지면을 내어줌으로써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다. 제709호 ‘매일 밤 8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사를 기고한 조 조 씨는 “미얀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에 알릴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흐닌 누 트웨 기자는 양곤 지역의 온라인 매체인 〈틴간준 포스트(Thingangyun Post)〉의 편집장이다(현재 미얀마 여성기자협회 대표다). 쿠데타 발발 이후 손에 휴대전화만 쥐고 시위 현장에 들어갔다. 시위대와 군경이 대치하는 상황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하다 군부의 타깃이 되었다. 그는 “군부의 탄압으로 많은 언론인이 실직해서 월급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원고료로 미얀마 언론인을 지원하고 싶다고 말하자 “좋은 생각”이라며 동참하겠다고 했다. 4월14일 그는 ‘미얀마 봄의 혁명에서 언론인’이란 제목을 단 미얀마어 원고를 보내왔다. 왜 목숨 걸고 취재하는지에 대한 한 현지 기자의 답변이다.

2월1일 새벽 5시, 어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되물었다. 페이스북을 켜자 윈 민 대통령과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나왔다. 군부의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미얀마 군부는 2020년 11월 치러진 총선이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1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옷을 챙겨 방을 나오니 가족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TV 앞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어머니의 말에 눈물이 흘렀다. 짧은 시간, 집 안의 모든 사람이 슬픔에 잠겼다.

그날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민 7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000명 넘게 체포되었다. 미얀마의 언론인들은 쉬는 날 없이 부고 기사를 썼다. 시민들의 저항운동은 대규모 가두시위에서 침묵시위, 심야 새벽 시위, 군부 기업 보이콧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든 막으려는 군부는 최루탄, 실탄, 폭탄 등으로 시위대를 해산하는 데 여념이 없다. 최근에는 유탄발사기와 박격포까지 동원되고 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이 물건이 세 사람의 몸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화기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3월 중순 이후 양곤에서 거리 시위는 급격히 둔화되었다.

3월14일 양곤시 틴간준 타운십에서 있었던 일은 기자로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다. 시민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 양곤 시위대는 틴간준 타운십의 경찰서를 포위했다. 군경이 시위가 일어난 미얀마 공업단지인 흘라잉타야 지역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다. 흘라잉타야에서는 군경의 강경 진압으로 시민 63명이 희생되었고, 틴간준·남다곤·북다곤 타운십에서도 20명 이상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은 날이었다.

나는 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경찰서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문에 도로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갇혀 있다고 했다.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고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가진 것이라곤 휴대전화 한 대와 머리를 가리기 위한 모자뿐이었다.

청년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경찰서 맞은편의 한 쇼핑몰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경찰서를 향해 휘발유, 엔진오일, 테레빈유 등으로 만든 화염병을 던졌다. 새총과 표창 등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 쪽에서는 총으로 시위대에 대응사격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대 쪽에 희생자가 하나둘 생겼다. 이 과정을 나는 최전선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미얀마 시민들이 〈틴간준 포스트〉에 보내준 사진들. 4월2일 사우스 오칼라파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열린 꽃파업 시위 풍경. ⓒ미얀마 시민기자(CJ)

목숨 걸고 올린 뉴스라면

시위대는 오래된 냉장고와 나무판자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대놓고 영상을 찍으면 경찰 쪽에서 바로 총을 쏴버리니 냉장고 뒤쪽에 몸을 최대한 숨기고 휴대전화 카메라만 들어 올렸다. 경찰과 나의 거리는 불과 30m 정도였다. 경찰은 촬영 중인 휴대전화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갔다. 깜짝 놀라 벌벌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상처를 입진 않았다는 걸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날아간 모자를 집어 다시 눌러썼다.

대치 상황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사상자가 많아져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시위대는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뒤로 물러설수록 경찰은 마구잡이로 총탄을 쏘며 반경을 좁혀왔다. 나도 쇼핑몰 근처 주차장으로 내몰렸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총에 맞겠다 싶어 주차된 차량을 방탄막으로 삼았다. 이때, 시위대는 경찰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화염병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내가 피하려고 했던 차 앞바퀴에 커다란 화염이 튀었다. 도저히 지나가지 못할 상황이었다. 나는 동료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주차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떨리는 목소리로 알렸다. ‘아 이제 경찰에 잡히겠구나.’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다.

다행히 화염이 잦아들었고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시민들이 길을 터주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정신없이 도망쳤다. 동료 기자를 만나고서야 그의 어깨를 꽉 잡고 숨을 내쉬었다. 그날 난 머리로 날아오는 총탄을 피했고 주차장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왔다. 이 경험보다 더 끔찍하고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은 도망치던 길에 봤던 희생된 청년들의 시신이었다. 내가 그날 입고 나갔던 분홍색 옷에도 다른 이의 피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이후로도 군경의 표적이 되었던 순간은 자주 있었다. 미얀마 군부는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편집국에 무단 침입하는가 하면 기자들을 체포·구금했다. 3월26일 저녁, 우리 집에도 경찰이 쳐들어왔다. 다행히 가족 모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이웃들에게 ‘경찰서로 오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나 말고도 언론인 대다수는 더 이상 자신의 집에 머무를 수 없다. 군경이 기자 대신 남아 있는 가족을 구타하고 체포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쿠데타 이후 지난 두 달간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나는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하고 있다.

‘왜 목숨 걸고 취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나에게 ‘언론인’은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은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시민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 싶어서’ 이 직업을 선택했다. 지금 같은 쿠데타 국면은 언론인들에게 위험 부담이 크다. 독립언론사들이 폐쇄되고, 모바일 데이터와 인터넷·전화선이 중단되고 있다. 특히 최근엔 언론인들을 정권의 끄나풀로 오해하게 만들거나, 기자와 시민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가짜 뉴스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민들이 ‘기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상황에서 취재 활동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장 취재기자로서 목숨을 걸고 올린 뉴스라면 시민들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틴간준 포스트〉는 나를 포함해 기자 세 명이 운영하는 독립언론이다. 외부 필자들은 현재 원고료를 받지 않고 글을 준다. 덕분에 이 언론사가 명맥을 이어왔다. 기자 세 명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진실된 정보를 전달하자고 독립언론을 만든 지 올해로 2년이 되어간다.

자유로운 독립언론으로 남는다는 것은 군부독재 아래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상당수가 군부독재 통치를 경험했거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얀마 봄의 혁명’이 ‘아시아 봄의 혁명’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카메라를 들었다. 군부독재에 자금을 대는 친군부 기업부터 군경의 폭력적인 만행들이 더 알려져야, 국제사회의 더 많은 시민들도 반쿠데타 저항운동에 적극 관심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담긴 화분. ⓒ미얀마 시민기자(CJ)

미얀마 봄의 혁명

4월13일은 미얀마의 새해 첫날이었다. 이맘때면 열리는 틴잔 물축제는 불결하고 불순한 것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새해맞이 전통 행사다. 올해 축제는 조금 달랐다.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틴잔 축제를 보이콧했다. 대신 청년들은 ‘쿠데타 반대’ 구호가 적힌 화분을 들고 침묵 행진을 했고 그 누구도 거리에서 춤추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시민들의 저항은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군부의 폭력과 맞서려면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2020년 선거에서 선출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속 정치인들이 만든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는 국제사회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투 중이다. CRPH가 임명한 ‘닥터 사사(Dr. Sasa)’ 유엔 특사는 ‘연방군’의 일원이 되었다. 7개 이상 소수민족 무장단체도 미얀마 군부를 압박하고 있으며, 양곤의 젊은 청년들은 이들 무장단체와 함께 연방군 창설을 위한 군사 훈련을 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시민불복종운동(CDM)을 통해 군부의 국정 운영을 어렵게 하고, 다른 쪽에서는 군부를 정치적으로 압박할 민주적인 연방정부가 고개를 들고 있다.

나는 ‘미얀마 봄의 혁명’이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무장한 군부 세력이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군부는 무기 외엔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해 동네 단위의 행정명령을 강제로 내려야 하는 등 경제적·군사적·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 또한 코로나19로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는 미얀마 경제를 회복시킬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군경은 시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생명을 앗아간다. 미얀마 시민들은 이 같은 군부의 무능력과 만행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불완전한 문민 정권의 임기였지만, 미얀마 국민들은 지난 5년간 누렸던 ‘민주주의의 맛’을 안다. 미얀마의 청년들은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군부 집권을 막기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맨몸으로 거리에 나왔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무리 중무장한 군경이라도 국민의 의지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 봄의 혁명’ 속에서 더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미얀마 국민들이 이번 항쟁에서 기필코 이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내가 지난 두 달간 거리에서 목격한 미얀마의 현재다.

기자명 흐닌 누 트웨 (<틴간준 포스트>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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