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일 미얀마 시민이 헌법책을 불태우고 있다. 미얀마 헌법은 2008년 군부가 만들었다. ⓒEPA

미얀마의 위기는 3월27일 국군의 날을 기점으로 2단계에 접어드는 모양새다. 4월9일에는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박격포 등 중화기를 발포해 82명이 사망했다. 거리에서 목숨을 내놓고 연일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제외하고, 제도권에 있거나 혹은 민주화운동의 주도권을 쥐려는 민주 진영의 활동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과연 이들이 미얀마의 민주화를 견인할 역량을 갖추었는가? 이들이 그리는 민주주의 전략은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

현지 소식을 보면 시민불복종운동(CDM)을 비롯한 저항운동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군과 경찰은 이미 양곤을 포위했고, 밤마다 시위자와 시민들을 무차별로 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얀마 시민들은 부활절(4월4일)엔 삶은 달걀에, 새해 첫날(4월13일) 물축제에는 꽃 화분에 시위 구호를 새기면서 비폭력 시위를 이어간다. 국경을 넘는 사람의 수도 늘고 있으나 다음 세대에 군정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결의는 군부와 맞서기에 충분해 보인다.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출신 국회의원이 주축을 이룬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는 3월2일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10개 부처에 장관 5명을 임명했다. 3월27일에는 문건 2개를 발표했다. 하나는 2008년 제정된 헌법을 폐기하고 연방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내용을 담은 ‘연방민주주의헌장(Federal Democracy Charter)’이다. 다른 하나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 구성과 관련된 ‘임시헌법 계획안(Interim Constitutional Arrangement)’이다. 3월 초 CRPH는 소수민족 무장단체와 연대한 연방군 창설을 선언했고 현재 협상은 약 80%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다.

CRPH는 현재 상황을 수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주체가 되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드러냈다. 그러나 CRPH가 실패했던 민주화운동의 전철을 답습하려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하루빨리 이 혼란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모두 같겠지만, 미얀마 국민의 임시 대표기구로 나선 CRPH가 내놓은 전략에 대해서는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첫 번째 이유는 3월27일 발표한 문건의 실현 가능성과 발표 시기에 대한 의문이다. 두 문건은 2020년 총선 결과에 따라 향후 국민통합정부만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사실을 공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두 문건은 이미 2016년부터 NLD가 제시한 장래 민주정부의 청사진과 같은 맥락으로 소수민족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국가 구조와 흡사하다. 즉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니라 안정적인 국정 운영, 국민적 공감과 합의가 충족되었을 때 해당 문건이 발표되더라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각 문건에는 현재 상황에서 추진하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구금 중인 대통령, 국가고문, 부통령 등 고위 인사가 헌법 작성에 참여한다는 부분이 그렇다. 소수민족과 연방제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도 영토, 자원, 재정 등 다양한 영역을 소수민족과 어떻게 공유하고 분배할지 이해당사자들과의 오랜 숙의 과정이 필요한 문제다. 군부 쿠데타로 민주정부가 실각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니 정부의 정통성을 마련하는 차원해서 이 문건을 발표했다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 것에 불과하다. NLD는 1990년 당시에도 총선 승리에 도취해 군부를 전범재판에 보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군부가 다시 나섰고 이들을 탄압하며 최근까지 20년 이상 통치를 이어나갔다.

CRPH가 추진하는 연방군에 대한 기대도 높다. 연방군이 활동을 개시하면 내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연방군이 실제로 가동될지, 자칫 지금의 상황을 장기화하는 결과에 그치지 않을지 경계해야 한다. 미얀마 18개 소수민족 무장단체 가운데 10개 단체는 정부와 정전협정을 체결했지만 이번 쿠데타로 파기되었다. 미얀마 정규군은 40만명, 경찰은 9만6000명인 데 비해 무장단체는 모든 병력을 합치더라도 7만명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인 3만명을 보유한 와(Wa)족 무장단체인 와연방군(UWSA)은 중국계로 사실상 중국 편입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얀마의 소수민족 무장단체는 해당 민족 보호에 우선순위를 부여했고 무장단체 간 연대는커녕 갈등한 역사가 더 많다. 또한 대부분 무장단체는 미얀마의 밀림지대에서 게릴라 활동으로 생존했기 때문에 전투 방식이나 군사교리 측면에서도 동질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4월11일 서울 유엔인권위원회 한국사무소 앞에서 미얀마 소수민족 청년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미얀마 정치인의 역사 인식과 현실 대응

가장 중요하게는 연방군에 참여하는 무장단체의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 70년 이상 소수민족과 미얀마 정부 간의 갈등을 돌이켜보면 그렇다.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무장단체들은 논공행상을 놓고 갈등하며 연방이 다시 내분을 겪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군부는 다시 ‘연방의 분열을 묵과할 수 없다’며 정치에 개입할 명분을 쌓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일부 미얀마 국민은 사제 총을 들고 밀림으로 들어가 반군부 투쟁을 선언했다. 1988년 민주화운동이 실패한 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결기에 찬 젊은이들이 밀림으로 들어가 전버마민주학생전선(ABSDF)을 조직하고 군부정권에 대항한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10년도 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일부 미얀마인이 CRPH에 참여하며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를 해외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특히 CRPH의 국제관계 대표인 틴 린 아웅은 미국에 망명정부 수립을 시사하기도 했다. 틴 린 아웅 대표가 국제관계 사무소 개설을 요구하며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 메릴랜드에는 이미 실패한 망명정부였던 버마연방국민연합정부(NCGUB)가 터를 잡은 적이 있다. NCGUB는 1990년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중심으로 내각을 꾸리고 헌법을 선포하는 등 해외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세인 윈 총리를 비롯해 구성원 모두 고국의 민주화보다 자신의 신변에 관심을 두었고, 그 결과 2012년 공식 해체할 때까지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절망적이었다.

더구나 당시와 현재 상황은 다르다. 군부독재로 점철되었던 과거와 달리 미얀마는 최대 10년간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렸고, 쿠데타 이후 미얀마를 모르는 세계시민은 없을 것이다. 아웅산 수치는 국정 운영 경험이 있고 NLD를 비롯한 민주 진영도 전열을 갖췄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군부가 집권하면 민주 진영 인사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예상되는데 망명정부가 이들과 연대할 방안은 있는가?

앞선 세 가지 우려는 결국 미얀마 정치인들이 지난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현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와 맞닿아 있다. 지금 미얀마에 필요한 일은 활동 자체가 어려운 CRPH 소속 당원들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것, 국내적으로는 CRPH 확대를 통해 조직화 단계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거리의 이름 모를 국민과 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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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장준영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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