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순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수능 점수가 학력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사IN 이명익

박도순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81)는 수능 창시자라 불린다.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초대 원장이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의 대통령 교육정책자문회의에 몸담으며 ‘새로운 대입 평가’를 설계했고, 실험 평가를 거쳐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도입했다. 참여정부에서는 교육혁신위원회 선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원로 교육 관료 출신이자 학자인 그는 스스로 창안한 수능 제도에 몹시 부정적이다. “출제 경향도, 활용 방식에서도 구상과 너무도 다르다”라고 박 교수는 말한다. ‘줄 세우기’에 따른 불평등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학력 측정 방식으로서 수능은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수능 도입 과정은?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공약 중 하나가 대입제도 개선이었다. ‘학력고사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입시제도를 바꾸겠다’는 취지였다. 정부는 국가 단위 시험 없는 대입 자율화도 고려했는데, 비용과 역량이 부족해 직접 시험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대학이 거의 없었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교육정책자문회의에 있던 내게 “대학 입학 적성검사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연구를 시작한 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7차례 실험 평가를 실시한 뒤, 1994학년도 대입부터 적용했다.

학력고사와 어떻게 달랐나?

가장 중요한 건 ‘암기 위주 평가’에서 탈피하는 것이었다. 학습 부담 탓만은 아니다. 교육의 효용을 따졌다. 교육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보통 3년이 지나면 75%를 잊어버린다. 3년 내내 외워 응시하고, 그 후 3년이 흐르면 잊어버리는 게 의미 있는 교육이 아니라고 봤다. 최초의 내 구상은 고등학교 교과와의 연계를 끊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지능검사처럼 논리력, 사고력을 측정하려 했다. 그래서 응시 영역도 언어와 수리로 한정했다. 시험 구조가 완전히 바뀐다고 하니 문교부 출입기자들이 이해를 못했다. 기자실에 언어 영역 모의 문제지를 돌렸다. 다들 무난히 80점 이상을 받았다. 기자들에게 “이런 시험이다”라고 말했다. 말귀 알아듣는 사람이면 누구든 점수를 따는 시험을 구상했다.

과목이 늘고 난이도 조절이 중요해진 까닭은?

평가에서 빠지게 된 분야를 담당하는 교사들과 여타 전문가들이 비판했다. 어쩔 수 없이 과학, 사회, 영어로 과목을 늘렸다. 문제 난이도는, 대학이 우리(평가원) 취지를 따르지 않아 조절하게 됐다. 평가원은 수능을 일종의 자격고사쯤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400점 만점이면 ‘수능 300점 이상 지원 가능’ 정도의 헐거운 규정만 놓고, 대학이 스스로 별도 평가를 거쳐 뽑으리라고 봤다. 그래서 만점자가 어느 정도 나와야 할지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시험을 도입하고 보니 대학은 이걸로 줄을 세웠다. 수능 점수가 높은 사람을 학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

수능 점수가 학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학력이라는 말을 쉽게 쓰는데, 따져보면 사실 복잡한 개념이다. 교육학은 학력을 세 분야로 나누는데 수능은 ‘지적 분야’ 하나만 측정 가능하다. 지적 분야에는 또다시 일곱 단계가 있고, 그중 세 단계 정도만이 수능시험 문제로 출제할 만하다. 엄밀히 말해 수능이 재는 학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셈이다. 여기에 더해 ‘오차’까지 있다. 이건 수능만의 문제가 아니라 선다형 평가의 근본적 문제다. 시험을 오전에 치는지 오후에 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다른데, 연구에 따르면 이 점수 차가 적지 않다. 시험일이 아니라 다른 날 치면 또 결과가 달리 나온다. 스탠퍼드 비네 테스트와 같은 유명 지능검사는 이 오차를 줄이기 위해 연구원들이 꾸준히 문항을 가다듬는다. 수능은 매번 다른 출제자가 짧은 기간 만들어낸다. 이 시험 1, 2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시스템은 난센스다.

‘수능 줄 세우기’가 공정하다는 여론이 있다. 2018년 교육부의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과정에서도 수능 비중을 늘리자는 의견이 다소 우세했다.

우선 이 주제를 여론으로 정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다. 입시에 대한 의견이 가치관 차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대입에 관심이 높은 이들은 대부분 ‘이해당사자’다. 어떤 논의를 해도 수험생과 학부모는 자신에게 유리한 전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입시를 치르고 난 사람들은 이 문제에 무관심해진다. 제대로 된 합의가 어렵다. 수능으로 줄 세우는 방식이 공정해 보이는 까닭은 이해당사자도 수긍하기 쉬워서다. “390점이 커트라인인데 당신은 380점이니 불합격”이라는 말이, 교육학적으로는 헐겁지만 막상 반박하기는 어렵다. 수능은 공정한 게 아니라 평가자가 방어하기 쉬운 시스템일 뿐이다.

지난해 11월17일 치러진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연합뉴스

수능 점수에 사교육 영향은 큰가?

모든 시험은 유사 문제를 반복해 풀면 점수가 오른다. 잘 가르치는 사교육 강사에게 배우고 질 좋은 문제집을 풀면 자연히 고득점을 받을 거다. 사교육이 수능과 유사한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면, 그럴 수 있다. 수능 출제자나 기관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패턴’이 있다. 물론 평가원은 수능 출제 전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문제지를 참고해, 같은 문제는 내지 않는다. 그러나 고유한 패턴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수능에 한계가 있다면 고교 내신 위주 선발이 낫나?

‘예언타당도’라는 개념이 있다. 특정 평가 기준이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 대입 전형과 대학 입학 뒤 학점을 연결해보면, 내신이 수능보다 예언타당도가 높다. 풀어 말하면 내신이 좋아 합격한 학생이 수능이 높아 합격한 학생보다 대학에서 공부를 더 잘한다. 그렇다고 내신 100%가 능사라고 보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정량평가에 따른 줄세우기 자체가 교육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신이든 수능이든 절대평가해 참고만 하고, 대학이 면접으로 뽑는 게 낫다.

정부가 대입제도를 개편한다면 이상적인 방식은?

나는 (수능, 내신 반영 비율 등에서) 정부가 손을 떼고 대학 자율로 하는 게 가장 좋다고 본다. 입시 문제는 아무리 정부가 여론을 수렴해 반영 비율을 조정한들 이해당사자인 학생 절반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도 학생을 가르칠 사람이 뽑는 게 맞다. 학생의 어떤 역량이 대학 수학능력에 필요한지는 정부나 평가원, 대중보다 대학이 제일 잘 안다. 정치가 이끌어내야 하는 사회적 합의는 세부 요강이 아니라 더 큰 주제들이다. 경쟁을 완화할 것인지 강화할 것인지, 능력주의를 따를지 평등을 도모할지 등이다. 숙의가 필요한 건 이런 논쟁이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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