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축복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아이 보는 일의 괴로움은 경험자만 안다. 넉 달 전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몰라서 못하는 일’이 이렇게 많을지 예상 못했다. 분유 먹이는 각도는 어때야 하나, 무엇이 황금 변인가, 어느 정도 큰 소리가 나야 트림으로 간주할 것인가 등 자꾸 새 질문이 튀어나왔다. 절규하는 아이를 안고 유튜버들의 의견 대립 사이에서 고뇌하다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왜 이걸 모르지? 인구 절반이 출산하는데 학교는 이런 걸 안 가르치고 뭘 하나?’
학교에서 뭘 배웠던가. 중학교 가정 시험 문제에 생각이 닿았다. 중간·기말 고사마다 교과의 핵심과 먼, 비비 꼬여 있는 문제가 여럿 나왔다. ‘다음 중 비타민 D가 두 번째로 많은 식품을 고르시오’ 따위였다(답은 쇠고기였다). 나는 교과서 온 구석구석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외워 이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지독한 학생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그만 편식이 심하고 바느질에 젬병이며 출산과 육아에 대해 거의 모르는 성인이 되고 말았다. 수능을 취재하며 가정 시험을 다시 떠올렸다.
지난주 수능과 사교육에 대한 기사(〈시사IN〉 제821호 참조)를 보고 ‘그래도 수시가 더 불공정하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 여러 차례 보도된 사례들이 근거다. 고교 교사는 진학 실적을 높이려 내신 성적을 부풀리고, 대학교수는 지인의 자식에게 점수를 더 줬다. 많은 이들이 믿는 바와 달리 ‘흙수저’일수록 수시를 선호한다는 연구가 있다. 하지만 평균적인 계급 재분배 효과가 있다고 해서 불공정한 사례를 가리지는 못한다.
그런데 수시가 더 불공정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도 수능이 괜찮은 제도가 되는 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철석같이 믿어온 이 시험의 ‘변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른바 킬러 문항은 10명 중 9명, 100명 중 99명을 떨어트려 옥석을 가리는데, 이 문항의 질에 시비가 있다. 사교육을 통하면 쉽게 풀고 그렇지 못하면 풀기 너무 어렵다. 반복 연습을 하면 시간 내에 풀고 그러지 않으면 시간을 넘긴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직업을 갖는 데에 이 경험이 필요한가? 해당 교과 교수들도 고개를 젓는다. 국어 킬러 문항은 직접 풀어봤다. 기자 생활을 하며 배운 ‘좋은 글’과 거리가 먼 지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기사를 읽은 이들이 우선 ‘현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데까지만 생각하면 좋겠다. 킬러 문항 금지나 사교육 제재는 학생을 줄 세우는 이상 실효가 없다. 그렇다고 대입 시험 폐지나 대학 서열 해체 주장은 실현 가능성도 낮고, 그게 이상적인지도 논란거리다. 다만 어떻게든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더 의미 있게, 비슷한 조건에서 치르도록 고민해볼 수는 있다. 그게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낫다. 서울대 학종을 설계한 김경범 교수는 ‘수능을 개선한다면 정시 100%도 괜찮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현 수능은 다양성을 낮춘다. 학문이든 사회든 ‘동종교배’는 망하는 지름길이다. 이대로면 미래의 한국 사회는 가난해질 것이다.”
입시 경쟁은 트라우마다. 나와 친구들은 아직도 시험 보는 꿈을 꾸고, 대학 졸업한 지 40여 년 된 아버지마저 최근에야 이 꿈이 멎었다고 한다. 울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종종 어떤 모양의 악몽을 물려주게 될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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