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언론 〈토끼풀〉 ‘12·3 내란’ 호외판 사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중학교 사회1(교과서)은 권력을 가진 소수가 아닌 다수의 시민에 의해 국가가 통치되는 정치형태를 민주주의라고 정의 내린다.’ 이 글은 서울 은평구 연신중학교 3학년 문성호 편집장이 작성했다. 2024년 4월, 문 편집장은 친구들과 함께 교내 신문부를 만들었다. 자율 동아리로 시작된 활동은 점차 확대되어 은평구에 있는 4개 학교 기자 32명이 소속된 ‘청소년 독립 언론’으로 성장했다. 현재 〈토끼풀〉은 한 달에 한 번 신문 2000부를 발행해 4개 학
“저희는 이집트에서의 정치적 억압과 공포를 피해 한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땅이 정의와 함께 정치적 탄압을 받는 이들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의 탄압과 귀국 시에 겪게 될 가혹할 처벌까지 모든 증거를 제출했지만 대한민국 법원으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10월2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앞 재한 이집트인 정치 난민들과 함께 기자회견에 나선 살로마 살림 사드 모하메드씨(42·이하 살림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2018년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지 햇수로 8년. 2021년 남은 가족
분홍빛 케이크를 둘러싼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애진아 생일 축하해.”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신애진씨(1998년생)의 생일을 하루 앞둔 10월18일 서울 성동구의 한 공유 공간에서 정성이 담긴 생일 모임이 열렸다. 올해로 세 번째다.그녀가 떠난 후 첫해 생일은 친구들끼리 모여 자신들만이 아는 애진씨의 비밀을 공유했다. 두 번째 해에는 사진전이 열렸다. 방을 재현한 공간에는 애진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다른 한편에는 엄마 김남희씨가 그린 그림을 전시했다. 엄마는 견딜 수 없는 밤에, 아이와의 기억을 단 하나도 잊지 않고 싶어서
두 노인이 손을 잡고 오르막길을 걸어갔다.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김영식씨(70)와 김윤선씨(66)가 서로를 알아봤다. “말투가 그대로네, 너 별명이 맴맴이었잖아. 선감도 나와서는 인천 연안부두 앞 횟집에서 회 뜨는 거 배우지 않았냐.” 50년도 훌쩍 지난 기억이 둘 사이를 오고 갔다.9월27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감학원 옛터에서 ‘선감학원 추모제’가 열렸다. 선감학원은 1946년부터 1982년까지 경기도가 운영한 아동 강제수용소다. 아동 5759명이 거쳐 갔다. 대부분 7~17세였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강제노역과 폭행, 굶주림,
“폐의약품을 어떻게 처리하셨나요?”①종량제 봉투 ②싱크대나 변기에 배출 ③집에 계속 보관 ④재활용품 수거함에 배출 ⑤약국, 보건소, 주민센터 수거함 또는 우체통 배출.9월5일 서울 여의도 한강변에 마련된 ‘지구처방전’ 체험 부스를 찾은 시민들이 설문지에 표시한 선택지는 제각각이었다. 올바른 처리 방법은 ⑤번이다. ‘지구처방전’은 올바른 폐의약품 배출 방법을 알리기 위해 환경재단과 퀴네앤드나겔이 공동주최한 캠페인이다. 지난 5월 한 달간 진행한 시민 설문조사에서, 최근 폐의약품을 처리한 적이 있다고 밝힌 2264명 중 절반에 가까운
“내가 스물서이 때(23) 시집을 와서 다녔으니까 이제는 50년도 넘었지. 그때는 이렇게 큰 시장이 있는지도 몰랐어. 아버지가 하는 말이 시집을 가면 여기로 장을 보러 올 거다. 파수(강원도 동해시 이로동) 안에 이 장이 제일 크다 이런 소리를 해. 그런데 와서 보니 정말 크고 좋더라고.”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사는 심옥선씨(77)는 결혼 후에야 북평오일장을 알게 됐다. 그때는 지역 주민들에게 ‘뒷들장’이라고 불리던 시장이었다. 골목과 골목을 가득 채운 시장은 지금도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북평오일장은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에서
햇볕을 받아 하얗게 탈색된 꽃게 사체들이 머리카락보다 가는 닻자망 그물과 뒤죽박죽 엉켜 산을 이루고 있었다. 7~8월 금어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가을 꽃게 조업이 시작되던 9월1일 오후 연평도 구리동 폐그물 적환장의 모습이다. 고약한 냄새로 온갖 민원에 시달리던 꽃게잡이용 폐그물 557t이 얼마 전 치워졌지만, 적환장 내부에는 아직도 꽃게 썩는 냄새를 풍기는 그물 상당량이 쌓여 있었다.꽃게는 일반적으로 안강망, 통발, 자망으로 조업을 하는데 연평도에서는 닻자망이 90%를 차지한다. 닻자망은 무게가 1t가량 나가는 대형 닻을 이용해 8
큰뒷부리도요새는 서식지인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출발해 번식지인 알래스카·시베리아까지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를 종단하는 도요새과의 철새다. 번식과 서식을 위해 1만3000㎞를 비행하는 여정에서 큰뒷부리도요새가 단 한 번 쉬는 중간 기착지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서해갯벌이다. 새만금신공항이 들어설 예정인 수라갯벌도 그 쉼터 중 하나다.뉴질랜드에서 출발해 수라갯벌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 그동안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큰뒷부리도요새의 몸무게는 40%나 감소한다. 길고 두꺼우며 끝이 살짝 아래로 휘어진 주둥이는 갯벌 속 깊
30년 전 딸을 잃은 진옥자씨(72)가 서울 서초구 법원 청사 맞은편 아크로비스타 건물 앞에 섰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아무것도 없네.” 윤석열 부부가 살던 아파트로 유명한 이곳은 30년 전인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A동이 무너져 내린 장소다. 사망자 502명(실종자 32명)과 부상자 937명이 발생한, 건국 이래 최대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였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진씨의 첫째 딸 정창숙씨는 삼풍백화점 A동 지하 1층 아동복 매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분장사 자격증을 딴 후 유학을 목표로 돈을 벌겠다고 시
8월7일 경북 예천군 감천면사무소 회의실에서 이장 28명과 부녀회장 5명이 스크린을 집중해서 보고 있다. 스크린에는 ‘마 어서 대피하이소’란 글자가 띄워져 있었다. 강단에 선 이재용 경운대학교 산업재난안전학과 교수가 말했다. “‘마’을 순찰대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대피하이소’라는 뜻입니다. 마을 순찰대는 기후위기 대응 상비군입니다.”마을 순찰대는 ‘경북형 주민 대피 시스템’의 일환으로 2024년부터 운영됐다. 마을 이장과 방범대원 등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할은 ‘사전 순찰, 상황 전파, 주민 대피 지원’이다. 일
강원도 홍천군의 풍천리 마을은 울창한 잣나무 숲을 품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화전 정리를 거치면서 조성된 잣나무 숲은 국내 최대(단일 수종 기준)인 1800㏊ 규모를 자랑한다. 2023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명품숲에 지정되기도 했다. 풍천리 마을은 국내 잣 생산량의 약 70%를 담당하고 있는 ‘100년 잣나무’의 고장이다.주민 80%가 잣 생산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작은 마을에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 건 2018년 이곳이 양수발전소 후보 택지로 선정되면서부터다. 양수발전소는 상부 댐에 저장된 물을 하부 댐으로 내려보내며 발전을 하는 방
가운을 입은 할머니 손님이 빗자루로 머리카락을 쓸어 담는다. 샴푸실에서 나온 손님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직접 말린다. 머리 손질을 마친 빨간색 정장 차림의 김미선 원장(67)이 손님에게 3000원을 받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 밥 먹으러 가요.”7월14일 오전 11시30분, 전북 전주시 각시 미용실에 있던 손님들이 밖으로 나섰다. 바로 건너편 건물 식당에서 옹기종기 줄을 서서, 그릇에다 고추멸치조림·미역줄기·열무김치와 보리밥을 담고 식탁에 앉아 미역국에 곁들여 먹는다. 뒤늦게 들어온 김 원장이 말했다. ‘멸치조림의 고추를 더
6월27일 새벽 4시30분. 산 중턱에 안개가 걸쳐진 풍경 앞에서 사람들이 눈을 감았다. 바닥에 놓인 마이크에는 헤드셋이 연결되어 있다. 멈추고, 침묵하며, 몰입한다. ‘왼쪽엔 쏙독새, 아래에는 옴개구리, 오른쪽에 호랑지빠귀’라고 메모하며,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는 존재들을 소리로 찾아냈다. 서서히 동이 트자 숲속을 지나 냇가를, 꽃밭을 조심스레 거닐며 듣는다. 20분 거리를 2시간 동안 걸었다. 느리지만 풍요로운 ‘사운드 워커’의 아침 풍경이다.숲해설가, 유아 숲지도사로 오랜 경력을 쌓은 김산아, 정효은, 엄효정,
서울 서초구 방배동 우면산 자락 아래 성뒤마을이 있었다. 낮은 지붕의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성뒤마을 재개발 지역의 건물 해체 공사는 지난 4월22일부터 시작됐다. 폐허가 된 이곳을 남혜영씨(51)는 매주 화·금요일에 한 시간 반을 운전해서 찾아온다. 남아 있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 주고,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서다.6월17일 오전, 성뒤마을에서 만난 남씨는 날카로운 철제 구조물 틈 사이로 몸을 구부려 들어갔다. 옴짝달싹 못할 만큼 비좁은 구석으로 들어가 사료와 물을 채우고, 통조림 참치를 놓아둔다. 이렇게 고양이들의
5월10일 충북 청주시에서 열린 ‘그린 페스티벌’ 현장에는 종이컵 같은 일회용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곳곳에 있는 ‘다회용기 반납함’이 눈에 띄었다. 청주시가 시에서 후원하는 축제에 다회용기 사용만 허용했기 때문이다.“다회용기를 쓰게 하는 것만큼 회수도 중요해요.” 축제를 둘러보던 ㈜뽕나무한그루 류재형 총괄이사(60)가 말했다. 이 회사는 지난 3월17일 문을 연 ‘청주시 다회용기 공공세척센터’ 운영을 맡았다. “수익이 없는 상황을 각오하고 시작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고 꼭 필요한 일이니까요.” 2021년 입국한 아프가니스탄
“저 뒤에 있는 서울시교육청의 슬로건을 보십시요 ‘학생의 꿈, 교사의 긍지, 부모의 신뢰. 미래를 여는 협력 교육.’ 저 중 어느 것이라도 지금의 현실과 맞는 게 있습니까? 지혜복 교사가 A학교로 복직하지 않는 이상 모두 의미 없는 구호일 뿐입니다.”5월14일 오후 서울시교육청 앞 집회에 나온 지혜복 교사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연대 발언을 듣고 있었다. 학교 내 성폭력 사안을 공론화 한후 해임된 지혜복 교사는 거리에서 500일 가까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날 결국 삭발을 결심했다.“저는 A학교에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에 핀 민들레, 쓰레기 더미에서 돋아난 새싹. 사진마다 척박한 환경에 사는 생명들이 등장했다. “모퉁이에 시선이 가나 봐요. 사진이 좋네요.” “쟤네(풀)도 주목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고립·은둔 청년들의 자조 모임터 ‘두더집’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사진 치유 워크숍’. 4월18일, 소파에 둘러앉아 사진을 보는 이들이 소소한 대화를 이어갔다.“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아요.” 고립 경험이 있는 박상은씨(26)는 이 수업의 강사를 맡으며 ‘시야 넓히기, 나를 만나기’로 이름 지었다
그날이 오면 부모는 11년째 바다로 간다. 매년 4월16일이면 세월호가 침몰한 해역을 찾는 유가족들이 참사 11주기를 맞아 ‘선상 추모식’을 열었다. 이날 유가족을 태운 버스는 새벽 2시30분 경기도 안산을 출발해 오전 7시 전남 목포시 해경 전용부두에 도착했다. 이들은 해경이 나눠준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고 배에 올랐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사비를 모아 낚싯배를 빌렸던 유가족들은 2020년부터 4·16재단과 해경의 도움으로 경비함을 타고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사단법인 0416단원고가족협의회 유가족과 지인 등 총 75명을
‘큰 인간’은 따분하고 진지하다. 오직 ‘작은 인간’만이 달을 보고 “맛있어 보인다”라는 발칙한 상상을 한다. 지난해 전남 화순군에 있는 동복초등학교 천체사진반 학생 15명은 서충현 선생님(38)과 함께 카메라로 우주를 탐험했다.2023년 가을, 전교생 17명의 동복초등학교에 천체사진교육 프로그램이 처음 생겼다. 그해 봄, 서충현 선생님이 학교에 부임하면서다. 마을에 또래가 적어서 혼자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때마침 방과후 교육을 맡을 교사가 필요했다. 어릴 적부터 천체 사진을 좋아하던 그는 이 프로그램을 만
도로를 채운 자동차들 소음을 깨고 우렁찬 음성이 귀에 꽂혔다. “괜찮습니다!” 밤새 내려 쌓인 눈이 녹고 있던 3월18일 오후, 한 시민이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지부장에게 안부를 묻자 그가 힘찬 목소리로 답했다.지난 2월13일 고진수 지부장은 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 지하차도 위 높이 10m 철제 구조물에 올랐다. 길이 9m, 폭 80㎝의 도로 시설 구조물에는 ‘복직 없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하라!’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그는 2001년 일식조리사로 세종호텔에 입사해 2021년 12월 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