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윤석열의 ‘총아(寵兒)’였다. 윤석열은 취임 초기부터 충암고·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상민 전 장관(이하 이상민)을 중용했다. 이태원 참사 책임을 두고 이상민 경질 요구가 쏟아질 때에도 그를 감쌌다. 당시 윤석열이 내뱉은 말이 바로 ‘딱딱 발언’이다.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2022년 11월7일).” 발언 나흘 후인 2024년 11월11일에는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길을 환송하던 이상민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리며 공개적으로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윤석열 정부 초대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상민은 2024년 12월8일 스스로 사퇴하기 전까지 한 번도 교체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경찰국 설치,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 숱한 논란에도 윤석열은 이상민을 끝까지 믿고 일을 맡겼다. 결국 이상민은 ‘운명 공동체’였던 윤석열의 ‘내란 공범’이 되었다. 8월1일 구속됐고, 8월19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중요임무종사, 직권남용, 위증 등 혐의를 받는다. 이상민은 수감됐지만, 그가 저지른 일들의 후과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 3년간 이상민이 우리 사회에 남긴 상흔을 짚었다.
이상민이 ‘윤석열의 사람’으로 처음 알려진 건 2021년 12월3일이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이날 이상민을 선거대책위원회 경제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공개된 그의 경력은 1992년부터 2007년까지 판사를 했다는 것, 그 후 줄곧 변호사로 일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1월부터 2년간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는 것 정도였다. 이완규·주진우 변호사 등 윤석열 측근으로 알려진 검찰 출신 인사들의 외곽 캠프 합류 소식에 비해 그리 눈에 띄는 인선은 아니었다.
그즈음 드러난 것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깊었다. 이상민은 지난해 내란 피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고시생 때부터 윤석열을 알았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고등학교 후배고, 대학교 후배고, (둘 다) 충암고 법조인 모임 충법회 멤버이다. 대통령과 4년 터울이라 같이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닌 적은 없다. 학창 시절 다 거치고 고시 공부할 때 처음 보았다. 연세대 도서관을 다니면서 고시 공부 하다가 알게 됐고, 사법시험이 되고 나서는 동문회 때만 만나던 사이다. 그러다 대선캠프 때 내가 도왔고 그걸 계기로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호방함이나 풍류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부분이라 너무 좋아한다(2024년 12월16일).”

2022년 4월13일, 윤석열은 별다른 행정 경험이 없는 이상민을 돌연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국민 권익 향상과 공공기관 청렴도, 공직자 윤리의식 제고를 위해 헌신”해왔고 “명확한 원칙과 예측 가능한 기준으로 투명하고 효율적인 공직 인사와 행정을 구현할 적임자”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때부터 이상민이 윤석열의 최측근으로 떠올랐다. 이상민 스스로는 지명 이유를 “오랜 기간 법관 생활을 하면서 몸소 체득한 공정과 정의 관념 때문”이라고 짚었지만, 당시 대다수 언론은 이상민이 윤석열의 ‘학교 후배’ ‘복심’이라는 등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에 주목했다.
‘돌격대장’ 역할 자처한 이상민
같은 날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한동훈 당시 법무연수원 부원장과 나란히 두고 보면, 윤석열의 인선 의도가 보다 선명히 드러난다. 한동훈 후보자는 윤석열과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검찰 출신 최측근 인사였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에 대한 지휘·감독권이 있다. 윤석열은 행정안전부에, 31년 전 사라진 경찰국 부활을 예고했다. 검찰과 경찰 두 권력을 사적으로 ‘믿을 구석’에 맡기려는 셈이었다. 아빠 찬스, 위장전입, 부당 변호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상민에 대한 국회 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됐지만, 윤석열은 이상민 임명을 강행했다.
이상민은 취임 직후부터 ‘돌격대장’ 역할을 자처했다. 취임 첫날인 2022년 5월13일, 행정안전부 장관 직속 경찰제도개선자문위원회(이하 자문위) 구성을 지시하고 경찰 개혁을 공언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권한이 커진 경찰을 견제하겠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자문위는 한 달 남짓 동안 네 차례 회의를 연 뒤 행정안전부 안에 ‘경찰국’ 신설을 골자로 하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권고안이 현실화하면, 1991년 경찰법 제정 후 독립 외청으로 있던 경찰청이 다시 행정안전부 지휘 체계로 편입돼 장관의 관리감독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현장에서 ‘정치적 중립성 훼손’ ‘권력의 경찰 장악’이라는 등의 반발이 나왔다.

이상민은 거침이 없었다. 2022년 7월25일 이상민은 경찰국 설치에 반대하는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쿠데타에 빗댔다. “거의 하나회의 12·12 쿠데타에 준하는 상황으로 대단히 부적절하다.” “특정(경찰대) 출신들이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회에 준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참석자들을 징계하거나 좌천 인사를 내면서 힘으로 경찰의 반발을 누르고, 2022년 8월 경찰국 설치를 강행했다. 올해 8월26일, 행정안전부는 경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해 경찰국을 3년 만에 폐지했다. 애초 만들지 말았어야 할 조직을 설치한 결과였다.
2022년 10월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에서 15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이후 참사 부상자 1명이 목숨을 끊어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총 159명이 됐다). 그날 밤 10시15분 첫 신고가 접수됐다. 재난안전관리 주무 부처 장관이었던 이상민은 밤 11시20분 참사를 처음 인지했다. 하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경기 고양시에 거주하는 운전기사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 오기까지 기다린 다음, 참사 인지 시간으로부터 1시간45분이 지난 10월30일 새벽 1시5분에야 현장 지휘소에 도착했다. 재난의 초동 조치와 지휘를 담당할 중앙사고수습본부는 설치되지 않았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참사 발생 4시간이 넘게 지난 10월30일 오전 2시30분, 대통령 주재 긴급상황점검회의 이후에야 가동됐다.
이상민은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부터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2022년 10월30일)”라거나 “이미 골든타임을 지난 시간이었다(2022년 12월27일)”라며 참사의 원인을 섣부르게 단정했다. ‘재난관리 주관기관’ 지정 여부, 유가족 명단 확보 등을 두고는 위증 논란을 일으켰다.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요구에는 “누군들 폼 나게 사표 던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그건 국민에 대한 도리도, 고위공직자의 책임 있는 자세도 아니다(2022년 11월11일)”라고 주장하며 자리를 지켰다.
국회는 여러 차례 이상민에게 참사의 책임을 물었다. 2022년 12월11일, 이상민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윤석열은 ‘진상 확인’을 앞세우며 해임을 거부했다. 2023년 7월25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명 전원일치로 이상민에 대한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피청구인이 재난관리 주무 부처의 장인 행정안전부 장관으로서 재난 대응 과정에서 최적의 판단과 대응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재난 대응의 미흡함을 이유로 그 책임을 묻는 것은 규범적 심판 절차인 탄핵심판 절차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상민을 탄핵하려면 더 명백한 법 위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날 헌재 판결 직후, 5개월 만에 장관직에 복귀한 이상민은 “이번 기각 결정을 계기로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소모적인 정쟁을 멈추고 (···)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라는 입장을 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충남 청양군 수해 현장으로 향했다. 그날 헌법재판소 앞에 모여 ‘이상민 장관 업무 복귀 환영’ 등의 피켓을 든 보수 단체 회원들은 유가족들에게 “울고 난리 났네” “다 집에나 가”라며 조롱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유가족 한 명이 실신해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됐다. 이정민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잘못된 권력을 응징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이런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불행한 국민에게 더 불행을 강요하는 행태가 계속될 것이다.”
잘못된 권력을 단죄하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이 반복될 것이란 경고는 현실이 됐다. 8월19일 내란 특검(특별검사 조은석)은 “윤석열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헌 문란 목적의 폭동에 가담했다”라고 보고 이상민을 내란중요임무종사, 직권남용, 위증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12·3 비상계엄 당일 윤석열이 ‘우선 호출’한 국무위원 다섯 명 중 한 명인 이상민은 위법한 비상계엄 선포를 방조한 데다, 경찰청과 소방청에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전달하는 등 윤석열 내란 범죄에 순차 가담한 혐의를 받는다. 2월11일 윤석열 탄핵심판에서 ‘대통령에게 관련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 취지로 허위 증언한 혐의도 있다.
윤석열은 평소 이상민과 수시로 통화했다. 〈시사IN〉이 확인한 윤석열 개인 명의 휴대전화(2024년 3월1일부터 12월12일까지) 통화 내역에서, 윤석열은 이상민과 66차례 통화했다. 계엄 다음 날에도 윤석열은 이상민을 찾았다. 2024년 12월4일 오후 1시6분과 오후 1시45분 두 사람 사이 통화가 오갔다. 이상민은 윤석열과의 통화를 전후해 그날 저녁 서울 삼청동 대통령 안전가옥에서, 자신을 포함해 김주현 당시 민정수석과 박성재 법무부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한정화 대통령실 법률비서관 등이 참석하는 법조인 출신 모임을 추진했다. 내란 특검은 이 자리가 비상계엄의 위법성을 해소하려는 등의 목적으로 후속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단죄하지 않으면 더 큰 불행 반복될 것”
이상민은 12·3 비상계엄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윤석열의 ‘호위무사’로 남았다. 2024년 12월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서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는 통치 행위이므로 사법적 심사 대상으로 삼는 건 적절하지 않다” “이번 계엄은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됐다”라고 윤석열을 두둔했다. “윤석열을 향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경찰 조사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국회에서 말하는 건 정치 공방 중 하나다. 민주당 쪽에서는 대통령을 공격하니 각료 입장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정치적인 공세에 대응했다(2024년 12월16일).” 반성은 없었다.

2월11일 이상민이 윤석열 탄핵심판 7차 변론에 증인으로 출석해 한 이야기는 그의 ‘생존 전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앞서 1월13일 허석곤 소방청장은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계엄 당시 이상민에게 “경찰청에서 단전·단수 요청이 있으면 협조하라는 전화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정작 이날 심판정 증인석에 선 이상민은 윤석열에게 언론사 단전·단수 조치 지시를 받은 적이 “전혀 없다”라고 증언했다. 그 대신 윤석열 집무실 책상 위에서 머리말에 ‘소방청장’이라는 단어와 함께, MBC·JTBC·한겨레·여론조사 꽃의 이름이 적힌 문건을 얼핏 봤다고 부연했다.
“대통령실에서 종이 쪽지 몇 개를 멀리서 본 게 있는데, 그 쪽지 중에 소방청, 단전, 단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윤석열에게 계엄 선포를) 만류하러 들어간 자리에서 짧게 1∼2분 머무를 때 잠깐 얼핏 보게 됐다.” “쪽지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는데 소방이 임의대로 단전·단수를 무작정 하게 되면 큰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겠다 싶었다. 소방청장에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국민의 안전에 대해 최우선으로 꼼꼼히 챙겨달라는 취지의 당부를 했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내가 소방청장에게 단전·단수를 지시한 게 아니다.”
이상민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윤석열은 아무 지시도 안 했다. 다만 이상민은 윤석열 집무실에서 언론사 등에 대한 단전·단수가 언급된 문건을 보고 소방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다고 단전·단수를 지시한 건 아니다. 그저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겨달라’는 당부를 남겼을 뿐이다. 그런데 소방청장은 정확하게 단전·단수해야 하는 5곳을 알고 있었고, 경찰의 협조 요청이 오면 응할 생각이었다. 이상민이 윤석열과 자신을 지키고, 아랫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다 보니 말의 앞뒤가 어긋났다.
결국 스스로 내뱉은 말에 발목이 잡혔다. 내란 특검은 이상민이 단전·단수 지시가 포함된 것으로 의심되는 문건을 들고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담긴 대통령실 CCTV를 토대로 해당 증언이 위증이라고 판단했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이상민이 기소되자 “참 합리적이고 점잖은 사람인데,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은 격이 돼버렸다”라고 말했다. 틀린 평가다. 지난 3년간 이상민의 행적을 돌아보면, 스스로 자초한 결과에 가깝다. 피고인 이상민에 대한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 등 재판은 9월19일 시작된다. 그에게 책임을 물을 시간이 다가왔다.
-
윤석열 후배 행안부 장관의 경찰 통제 논란
정부의 경찰 통제 방안 마련 작업이 본격화됐다. 수사권 확대로 권한이 늘어난 만큼 확실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최측근 장관이 경찰을 직접 통제하는 방향으로 논의...
-
윤석열의 ‘살 궁리’ 정황, 통화 기록에 남았다
〈시사IN〉은 경찰 국가수사본부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이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윤석열의 통화 기록을 전체 입수했다. 윤석열 개인 명의 휴대전화(2024년 3월1일부터 2024년 12월...
-
[단독]‘단전·단수’ 협조 요청받은 소방, 언론사 건물 도면 가지고 있었다
〈시사IN〉은 12·3 비상계엄 선포 관련 단전·단수 조치 대상이 된 언론사의 소방 도면들을 단독 입수했다. 이 도면을 보면 해당 언론사들의 핵심 시설과 공간 등이 한 눈에 확인된...
-
이상민 장관 탄핵 기각, 이태원 참사 누가 책임지나
“주문. 이 사건 심판 청구를 기각한다.” 7월25일 헌법재판소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국회의 탄핵 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헌법재판관 9명 전원일치 의견이었다. 선고 직후...
-
“그때 이상민 장관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탄핵 심판대에 올랐다. 국무위원이 탄핵 심판을 받는 건 헌정 사상 최초다. 헌법은 공직자가 직무집행 과정에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했을 때 파면할 수 있다고...
-
그날 저녁 만찬이 급히 취소된 이유··· 공소장에 적힌 이상민의 12·3 행적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 12·3 비상계엄 선포 당일 오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과 대화한 이후 예정돼 있던 지방 만찬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복귀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
-
이태원 참사 3주기, 아로새긴 기억들로 존재하는 별들 [시선]
분홍빛 케이크를 둘러싼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애진아 생일 축하해.”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신애진씨(1998년생)의 생일을 하루 앞둔 10월18일 서울 성동구의 한 공유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