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과천
7월22일,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초·중학교 앞에 놓인 왕복 2차선 도로 가운데 색이 선명한 시선유도봉 10개가 박혀 있었다. 주황색 봉들은 학교에서 바라봤을 때 경사로 오른쪽에 위치한 주차장 입구에도 여럿 설치되어 있다. 부산의 택시기사 김영경씨는 운전대를 잡고 말했다. “이거 설치한 거 보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싶었어요. 이 동네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아는데, 그 주차장에서 나올 땐 우회전이 아니라 불법으로 좌회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역이거든요. 마침 그 앞 도로에 중앙분리대도 없었으니까.”
김씨가 말하는 ‘소 잃은 사건’은 지난해 6월15일 이곳에서 일어난 어린이 사망사고를 의미한다. 주차장에서 나온 승용차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불법 좌회전을 시도하다 신호 대기 중이던 승용차의 옆을 들이박았다. 서 있던 승용차는 중심을 잃었다. 휘청거리다가 갑자기 속도를 냈다. 길은 내리막길이어서 더 가속이 붙었다. 차량이 돌진한 곳은 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 인도. 그곳을 걷고 있던 어린이 E양(6)이 사망했다.
어린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길을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들 중 하나가 ‘경사로’다.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에서 자동차가 걷는 어린이를 만나면 사고 확률과 강도가 높아진다. E양이 사망한 경사로 삼거리에선, 2014년 5월17일(5·남, 경상), 2014년 5월15일(6·남, 경상), 2015년 8월7일(8·여, 중상) 등 여러 어린이들이 이미 보행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곳에서 오르막길로 50m쯤 올라가면 역시 경사가 심한 골목 교차로가 나온다. 2018년(8·남)과 2019년(2·남)에 각각 중상 사고가 발생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사망사고 지점이 나타난다. 2015년 6월11일 오후 4시 F양(11)이 승용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그림 8〉).
작은 경사라도 운전자의 실수와 만나면 아주 쉽게 참극으로 이어진다. 고 최하준 군(2)과 고 이해인 양(4)이 당한 사고가 그런 경우다. 하준 군 사고는 2017년 10월1일 경기 과천시 서울랜드 주차장에서 일어났다. 멀리서부터 천천히 SUV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중력에 따라 굴러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하준 군과 가족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준 군을 안치한 납골당에서 엄마는 아들과 꼭 닮은 죽음을 겪은 고 이해인 양을 만났다. 해인 양은 2016년 4월14일 어린이집 하원 버스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바로 앞 유치원 입구에서 SUV 한 대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역시 제동장치가 걸려 있지 않던 차였다. 서울랜드 주차장 바닥의 경사도는 1.15°, 하준 군에게로 굴러온 차량 속도는 불과 시속 4㎞였다. 그래도 아이는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차는 너무 크고 무겁고, 아이는 작고 약하기 때문이다.
하준 군 사고의 경우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면서 기어를 ‘D’에 놓는 실수를 한 것이 1차 원인이었다. 하지만 다른 주차장도 아닌 어린이 놀이공원 주차장이었다. 만일의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평탄화 작업이 돼 있었더라면, 안전요원이 상주했더라면, 하다못해 제동장치를 점검하고 내리라는 안내문이라도 눈에 잘 띄는 곳 어딘가 붙어 있었다면 하준 군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차장 내 미끄럼 방지 조치를 의무화한 ‘하준이법’이 지난해 6월25일부터 시행됐다. 하지만 이 법률은 누가 어떤 장치와 조치를 어떻게 마련하라는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 위반 시 처벌 대상도 모호하고 운전자들에 대한 홍보도 부족하다. 여전히 비탈길 등 위험 요소가 많은 어린이 보행 지역에선 운전자가 실수하지 않겠거니 하는 기대에 아이들 목숨이 걸려 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시사IN〉 특별기획 ‘스쿨존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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