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두 건물 사이 좁은 길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스쳐 지나간다. 변한 것은 붉은색 가벽에 붙은 추모 메시지뿐. 200일 남짓 붙어 있던 종이쪽지들은 빛이 바랬다. 5월16일은 이태원 참사 200일이 되는 날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가족 6명을 만났다. 그들이 쓰던 방과 물건을 통해 떠난 이들의 세상을 살펴봤다. 서른한 살 박현진씨와 정주희씨, 대학생 박가영씨와 최민석씨, 열여섯 살 이재현 군, 스물여덟 청년 조경철씨. 이들의 시간은 여전히 지난해 10월에 머물러 있다. (※희생자들의 나이는 지난해 기준으로 표기했다.)

정주희씨의 어머니 이효숙씨가 주희씨 침대에서 사고 당시 신었던 구두를 들고 침대에 앉아 있다. ⓒ시사IN 박미소
정주희씨의 어머니 이효숙씨가 주희씨 침대에서 사고 당시 신었던 구두를 들고 침대에 앉아 있다. ⓒ시사IN 박미소

"(주희) 언니는 핀란드 사람이랑 결혼해서, 주희가 장녀 역할이며 다 했지. 동생도 잘 살피고 아우르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 정주희씨(31)의 어머니 이효숙씨는 주희씨가 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믿고 맡겼다. 여덟 살 때 주희씨는 밖에서 일하는 엄마를 대신했다. 네 살 터울 남동생이 어린이집에서 마치면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밥을 먹였다. 중학생 땐 큐빅 보석을 박은 휴대전화 투명케이스를 상품화해 인터넷에서 판매했다. 용돈 대신 본인이 사업으로 번 돈을 썼다.

정주희씨 남자친구가 선물해준 사진 앨범. ⓒ시사IN 박미소
정주희씨 남자친구가 선물해준 사진 앨범. ⓒ시사IN 박미소
정주희씨가 사고 당시 신었던 구두. 주희씨는 파란색을 좋아했다. ⓒ시사IN 박미소
정주희씨가 사고 당시 신었던 구두. 주희씨는 파란색을 좋아했다. ⓒ시사IN 박미소

주희씨는 ‘받은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사업 때문에 경기 용인시에 따로 사는 엄마를 자주 찾아갔다. ‘혼자 있으면 밥 잘 안 챙겨 먹게 된다’며 직접 만든 반찬을 엄마의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엄마에게서 배운 요리 솜씨는 엄마뿐 아니라 남자친구, 친구들에게도 선보였다. 아빠 정해문씨에겐 술친구이자 든든한 회사 직원이었다. 속옷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주희씨는 해외 유학을 포기하고 아빠의 사업을 도왔다. 무역 사업에 필요한 중국어를 배웠고,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중국 공장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대학 시절 방학 동안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베이징으로 어학 연수를 다녀왔다. 정주희씨는 영어, 일어, 독일어, 중국어를 익혔다. ⓒ시사IN 박미소
대학 시절 방학 동안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베이징으로 어학 연수를 다녀왔다. 정주희씨는 영어, 일어, 독일어, 중국어를 익혔다. ⓒ시사IN 박미소

엄마는 요즘도 무의식적으로 주희씨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 전화에 종료 버튼을 누른다. 어쩔 수 없이 녹음 파일로 남겨진 통화 내용을 듣는다. "엄마, 고생하니까 일하지 마." 수화기 너머 들리는 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엄마를 챙기고 있다.

패션디자인학과 학부생 시절 모아둔 의상 스크랩. 정주희씨는 속옷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시사IN 박미소
패션디자인학과 학부생 시절 모아둔 의상 스크랩. 정주희씨는 속옷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시사IN 박미소
정주희씨가 입던 옷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시사IN 박미소
정주희씨가 입던 옷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시사IN 박미소

※이태원 참사 2차 피해 우려가 있어 이 기사의 댓글 창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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