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참사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현장감식을 실시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10월30일 오전 5시,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약 7시간 후 A씨를 만났다.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하고 있는 20대 남성 A씨는 참사가 발생한 골목 한가운데 위치한 클럽에서 6개월째 ‘가드’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골목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고 느낀 건 10월29일 오후 9시 무렵부터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밀지 마세요”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밤 10시가 지나자,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사람들이 한 편으로 와르르 기울며 무너졌다. 사람들의 몸이 겹겹이 쌓였다.

불과 7시간 전 상황을 설명하던 A씨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연신 입에 가져갔다. “사고 전부터 분명 전조증상이 있었습니다. 사고 발생 직후 가게 밖으로 나가보니 가게 입구부터 골목 안쪽까지 사람들이 겹겹이 깔려 있더라고요. 우선 빼낼 수 있는 사람들을 가게 안쪽으로 옮겼어요. 가게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테이블을 모두 치우고 힘을 보탰습니다. 100명 가까운 사람들을 가게 안쪽으로 옮기고 심폐소생을 시도했지만 살리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A씨뿐만이 아니다. 2022년 10월29일 토요일 밤 10시,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이 시간과 공간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11월3일 현재까지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이들은 총 156명, 부상자도 187명에 달한다.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위치한 해밀톤 호텔 서쪽 골목에서 거대한 인파가 와르르 무너졌다. 폭 3.2m, 길이 40m, 경사도 10%의 골목길은 여전히 참사의 흔적을 남긴 채 경찰이 통행을 막고 있다. 참사 현장과 20m 떨어진 이태원역 1번 출구는 참사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계속된다. 추모객이 남긴 흰 국화꽃과 각종 쪽지가 우리 사회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참사 앞에서 사회 전체가 거대한 상실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참사는 어떻게 발생했나

이번 이태원 참사는 핼러윈데이를 앞둔 토요일 밤, 통제되지 않은 수많은 인파가 이태원역 북쪽 ‘세계음식특화거리(이태원로27가길)’로 몰려들어 발생했다. 참사가 발생한 골목은 남쪽 왕복 4차선 이태원로와 북쪽 ‘세계음식특화거리’를 이어주는 이면도로였다. 이곳 골목의 한쪽 면은 해밀톤 호텔 측에서 불법 설치한 가벽이 있어 폭이 좁았다. 골목에 위치한 점포가 얼마 되지 않아 평소 상주인구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참사가 발생한 당일은 수많은 인파가 클럽·주점·식당 등이 몰려 있는 세계음식특화거리로 진·출입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인파가 병목현상을 보였다.

현장에서 만난 다수 생존자들은 이른 저녁부터 인근 모든 골목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핼러윈데이의 특수성도 있다. 이날 이태원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특이한 분장과 개성 있는 옷차림을 준비해왔다. 어떤 가게를 들르려는 인파뿐 아니라 거리 분위기를 즐기려 돌아다니는 이들도 다수였다. ‘거리를 서성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밤, 이들을 포용하기에 길은 너무 좁았다.

11월1일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112 신고센터에 위험 신고가 처음 접수된 시각은 이날 오후 6시34분이었다. 처음 ‘압사 사고에 대한 위험’을 경찰에 알린 신고자는 “지금 너무 소름 끼쳐요.… 굉장히 좁은 골목인데 이태원역에서 내리는 인구가 다 올라오는데 거기서 빠져나오는 인구와 섞이고… 지금 아무도 통제 안 해요. 이거 경찰이 좀 서서 통제해서 (내려오는) 인구를 좀 뺀 다음에, 그다음에 안으로 들어오게 해줘야죠”라고 당시 현장을 설명했다.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이미 경고가 울린 것이다.

“저녁 8시쯤이었어요. 제가 운영하는 가게로 들어가려는데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골목 입구에서 가게까지(20m 이동하는 데에만) 30분이 걸리더라고요. 골목이 인파로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거든요. 큰일 나겠다 싶었어요.” 10월30일 새벽에 만난 지역 상인 구종명씨(가명)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구씨의 가게는 참사가 발생한 골목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구씨는 외출 후 8시 무렵 가게로 돌아오려 했지만, 인파에 밀려 진입하기 어려웠다.

같은 시각 현장에서 112 신고센터로 걸려온 신고 전화에도 비슷한 증언이 남아 있다. 오후 8시33분에 112 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 녹취록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 지금 사람들이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서, 지금 길바닥에 쓰러지고… 막 지금 너무 이거 사고 날 것 같은데, 위험한데… 지금 이게 통제가 안 돼요.” 오후 8시53분에는 또 다른 신고자가 “지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압사당하고 있어요”라며 112 신고센터를 찾았다. 참사 발생 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위험을 느꼈다. 이미 그 시간에 간헐적으로 넘어지는 이들도 생겨났다.

“산사태가 나듯 골목 경사 아래쪽(이태원역 방향)으로 사람들이 와르르 무너졌어요. 저와 친구들은 죽고 싶지 않아 인근 가게 발코니 난간에 매달렸고요. 원래 이 골목으로 들어오려던 것도 아니었어요. 인파에 떠밀려 제가 가려던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게 됐어요.” 경기도 양주에서 친구들과 이태원을 찾은 김종혁씨(가명·24)는 사고가 발생한 오후 10시15분경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고 발생 직전, 김씨와 친구들은 참사 발생 지점과는 50m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핼러윈데이를 즐기러 이태원을 찾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김씨는 이태원역으로 내려가는 게 어렵겠다 싶어 서쪽 녹사평역 방향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밀집한 군중 사이에서 자신이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대로 걸어가는 건 불가능했고, 인파가 만들어낸 흐름을 따라 참사 발생 지점으로 떠밀렸다. 김씨의 설명은 이 사고가 특정 골목 한 지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참사 발생 지점에 유독 사람이 많이 몰린 게 아니라, 인근 다른 골목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인파가 마치 혈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참사 직후 사고 수습도 쉽지 않았다. 골목 끄트머리에서 쓰러진 사람들은 그나마 빠르게 구조될 수 있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이들은 골목 한가운데 모여 있던 사람들이다. A씨나 구종명씨처럼 일부 상인들이 가게 내부로 사람들을 당겨 빼내긴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골목 가운데에 겹겹이 쓰러져 있던 사람들을 빼내는 데만 1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구씨는 “사람들이 제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아예 가게 밖으로 발을 내딛기도 어려웠어요. 되는 대로 사람들을 꺼내 가게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11시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골목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과 소방 인력이 급히 증원됐으나 현장 도착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참사가 발생한 이태원 일대는 길이 좁고 차량이 많았다. 인근 지역의 교통이 통제되지도 않았다. 300명 넘는 위급 환자를 서울시 주요 응급실로 급히 이송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마지막 앰뷸런스가 이태원을 빠져나간 시각은 10월30일 오전 3시 무렵이었다.

■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모였나

이번 참사의 원인을 두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정부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10월31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참사에 대해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 (그렇게 많은) 인파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단기간에 많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핼러윈 행사는 주최 측이 없어 축제가 아니라 현상으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박 구청장의 말과 달리 이번 참사는 위험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KT 통신 데이터를 보정해 ‘생활인구’ 데이터를 추출한다. 특정 지역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특정 시간대에 모이는지를 측정하는 빅데이터다. 생활인구는 ‘집계구’ 단위로 추출한다. 서울시를 1만9153개 ‘집계구’로 쪼개 시간대별로 인구 규모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가령 참사가 발생한 이태원1동은 해밀톤 호텔 일대를 비롯해 총 11개 집계구로 나뉘어 있다. 〈시사IN〉은 이번 참사가 발생한 10월29일 집계구·행정동 생활인구를 분석했다(내국인 기준).

〈그림 1〉은 핼러윈데이가 낀 토요일 저녁에 참사 발생 지역 집계구의 생활인구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그래프다. 예년에 비해 올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살펴보기 위해 2018, 2020, 2021년도 데이터(핼러윈데이가 낀 토요일 기준)를 함께 살펴보았다. 2019년 핼러윈데이 기간은 KT 기지국 문제로 생활인구 자료를 집계하지 못해 불가피하게 누락되었다.

2022년 10월29일 이 집계구의 생활인구는 오후 5시부터 가파르게 상승한다. 112 신고센터에 첫 신고가 접수된 오후 6시 생활인구는 1만1468명이지만, 3시간 만인 오후 9시에 그 숫자는 1만6001명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는 지난해(2021년 10월30일 토요일)의 두 배 수준이다. 2021년에는 오후 9시 생활인구가 8034명에 그쳤다.

이 그래프에서 두 가지 포인트를 주목해야 한다. 우선 10월29일 새벽 시간대 생활인구다. 이날 오전 0시 생활인구는 2021년에 비해 8배 많은 수치였다. 이미 전날인 10월28일 금요일 밤부터 예년에 비해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시와 용산구 역시 이 사실을 미리 인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포인트는 ‘코로나19 이전만큼 사람이 모인다’는 점이다. 〈그림 1〉에서 2022년 데이터는 2018년과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적어도 코로나19 이전 수준의 대비를 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데이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코로나19 이전인 2018년 10월27일 토요일에도 2022년 10월29일 토요일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렸지만 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2018년과 2022년의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2018년 당시 경찰과 지자체가 이태원 일대를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데이터만 놓고 보았을 때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첫 번째는 집계 과정의 ‘버퍼링’ 문제다. 다수 생존자들은 이날 밤 참사 지점 인근에서 통신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생활인구는 KT 통신망(LTE, 5G 신호) 데이터로 추계한다. 통신 장애가 발생한 상태에서 집계구라는 ‘좁은 지역’의 생활인구를 측정하는 것은 정확도가 다소 떨어질 수 있다고 데이터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두 번째는 이 집계구(참사 지점)뿐 아니라 인근 지역 전체가 병목현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다. 만약 이태원1동 생활인구가 2018년보다 늘어났다면, 이 집계구에 있던 인파가 흘러 나갈 공간이 부족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좀 더 넓은 범주인 ‘행정동 단위’ 생활인구 데이터도 살펴보았다. 〈그림 2〉는 참사가 발생한 이태원1동 전체 생활인구를 분석한 결과다. 오후 6시 기준 이태원1동 생활인구는 2018년 3만3674명, 2021년 3만2421명, 2022년 4만2789명이다. 참사가 일어난 날, 코로나19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태원 일대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생활인구 데이터는 오후 9시 무렵에 급증한다. 2018년 5만3341명, 2021년 3만3141명, 2022년은 6만614명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이전보다 많은 인파가 이태원 일대를 채웠다는 걸 알 수 있다.

이태원을 찾는 사람들이 예년에 비해 늘었다는 건 서울지하철 승·하차 정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은 서울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의 승·하차 인구를 보여준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 10월26일 토요일에는 승차 3만8619명, 하차 5만7844명을 기록했다. 하차 인원이 1만9225명 더 많다. 그런데 2022년 10월29일 토요일에는 승차 4만8459명, 하차 8만1362명으로 승·하차 모두 이용객이 늘어났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2022년 승·하차 차이는 3만2903명으로 이날 이태원에 밤 12시가 넘을 때까지 남아 있던 인구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인구 데이터, 지하철 승·하차 데이터는 서울시와 용산구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공공데이터다. 게다가 서울시는 ‘서울 실시간 도시 데이터’라는 사이트를 통해 이태원 일대의 실시간 생활인구와 인구밀도를 측정해 공개하고 있다. 도시 데이터를 집계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은 갖추었지만, 이 시스템을 이용해 ‘위험을 감지하고 활용하는’ 행정력은 발휘되지 못했다.

■ 애도를 넘어 책임으로

참사 다음 날인 10월30일 오전 9시50분, 윤석열 대통령은 긴급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며 “오늘부터 사고 수습이 일단락될 때까지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본건 사고 수습과 후속 조치에 두겠다”라고 말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합동 분향소가 설치되고, 전국적으로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남겨진 이들의 슬픔에 많은 시민들이 공감했다. 10월31일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시사IN〉과 만난 한 조문객은 “뉴스를 통해 희생자 유가족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분향소를 찾았다. 여기(분향소)서 사람이 많이 줄 서 있는 걸 직접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참사 자체는) 소름이 끼쳤는데,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니 따뜻하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말했다.

참사 직후에만 해도 이 같은 애도 분위기는 희생된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시사IN〉이 서울광장 분향소와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만난 추모객들은 한목소리로 “(희생자들이) 젊은 친구들인데 안타깝다” “충격이 컸다”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론은 책임을 추궁할 대상을 명확하게 지목하진 않았다. ‘집회 탓’을 제기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비판은 일었지만, 정부에 대한 책임론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인 11월1일, 112 신고센터 녹취 내용이 공개되면서 현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경찰에 대한 책임론이 부각됐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각종 실언이 누적되던 와중에 경찰이 참사 당시 오후 6시34분부터 사태 파악에 나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 책임론’이 강하게 부각됐다. 희생자들의 유가족이나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참사로 대학원 동기를 잃은 권지만씨(가명)는 11월2일 〈시사IN〉 취재진에게 “맨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땐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10월30일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참사 현장에 도착해 살펴보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당일 이태원 일대에 경찰이 배치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도 진실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경찰청은 11월1일 발표한 ‘이태원 사고 관련 조치 및 향후대책’ 자료에서 참사가 발생하기 사흘 전인 10월26일 용산구청·상인연합회(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와 핼러윈데이를 대비하기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이 자료에서 “일부 상인들이 과도한 경찰력 배치 시 핼러윈 분위기 위축 우려를 제기하며 상인회의 자정노력을 언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사IN〉 취재 결과, 상인연합회 측의 설명은 달랐다. 상인연합회 이 아무개 회장은 11월2일 〈시사IN〉 취재진에게 “경찰 차량을 길가에 세워놓으면 통행에 지장이 있고 위압감을 조성할 수 있으니 보이지 않는 곳에 주차해달라고 얘기를 한 것뿐이다”라며 경찰력 배치를 상인연합회 측에서 거부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간담회에 참석한 용산경찰서 정 아무개 경감은 이 같은 상인연합회의 설명을 부인한다. 정 경감은 11월2일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경찰력 투입 자제만 요청한 게 아니라 단속을 나올 때 경찰복을 입고 오지 말아달라고까지 했다. 간담회 자리에서 상인연합회 측 사람이 ‘호각 불면서 그렇게 하면(단속하고 통제하면) 안 된다’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까지 정확하게 기억난다. 꽤 강하게 이야기했다”라고 말했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당시 이야기는 정식 회의가 아닌 간담회라 회의록 등이 없다”라고 말했다.

참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무엇보다 남겨진 유가족과 생존자, 현장을 목격하며 구조에 동참한 시민들의 충격이 여전히 남아 있다. 11월2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유실물센터에서 만난 한 20대 여성 생존자는 “(참사 당시)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숨 막혔고 잠시 실신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소리쳐주어서 깨어났고 구조될 때까지 버텼다. 지금은 너무 멍하다. 당시 상황은 너무 무서웠는데, 그래도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든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참사는 언론 보도보다 SNS 영상을 통한 전파가 빨랐다. 각종 영상 기록으로 전해진 참사 현장의 모습은 현장에 없던 시민들에게도 큰 충격과 트라우마를 남겼다. 소셜미디어로 연결망이 강화된 까닭에 사회 전체가 집단 트라우마 현상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이태원 사고 통합심리지원단’을 구성해 부상자·목격자·유가족 등 1000여 명에 대한 심리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각종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겨진 이들의 슬픔과 정신적 충격은 여전하다. 현장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린 구종명씨는 11월3일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사 발생 후 이틀간 잠을 5시간밖에 못 잤어요. 자꾸 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병원 가서 약도 처방받았는데, 의사가 혼자 있지 말라고 하네요. 서울에 혼자 살고 있어서 잠시 고향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가서 억지로라도 고향 친구들과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10월29일 밤 우리는 잊기 힘든 상실을 겪었다. 한국 사회는 이 참사의 충격을 온몸으로 견디는 이들을 어떻게 품어낼 것인가.

기자명 김동인·이상원·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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