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1일 일본 도쿄 시부야에 핼러윈을 즐기려는 인파가 몰린 가운데 경찰이 투입돼 일부 지역을 통제하고 있다. ⓒAP Photo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일본인은 홋카이도 네무로시 출신 도미카와 메이 씨(26)와 사이타마현 출신 고즈치 안 씨(18) 두 명이다. 둘 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하고 있었다. 참사 3시간 전에도 비빔밥이 맛있었다는 문자를 딸한테 받은 메이 씨의 아버지 도미카와 아유무 씨(60)는 “딸이 한국을 무척 좋아했다. 빨리 만나고 싶다”라며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한국으로 향했다. 고즈치 안 씨 가족도 외무성을 통해 “딸은 우리의 보물이다. 보물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현실을 지금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한국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희생자 수가 많았던 군중 사고로는 1956년 새해 첫날 니가타현 야히코 신사에서 일어난 참사다. ‘떡 뿌리기’ 행사에 사람들이 몰려 124명이 숨졌다. 현재 일본인들은 2001년 7월21일 밤 효고현 아카시시 육교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를 떠올린다. 이날 불꽃축제 관람객 11명(어린이 9명, 노인 2명)이 압사했다. JR 산요 본선 아사기리역에서 선로와 국도를 가로지르는 육교는 당일 열린 불꽃축제 장소인 오쿠라 해안과 연결되어 있었다. 불꽃축제가 끝난 오후 8시30분쯤 귀가하려고 역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축제가 열리는 해안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100m 길이의 다리 위에 밀집했다. 통로 폭은 6m이지만 해안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통로의 절반 정도 폭에 불과한 병목 구조가 문제였다. “밀지 마” “돌아와” “살려달라”는 절규가 난무했다. 결국 연약한 아이와 노인들이 지옥의 그림자가 드리운 다리에서 맥을 못 추고 숨졌다.

고베시의 시모무라 세이지 씨(64)는 당시 세 살이 되기 직전인 둘째 아들을 잃었다. 그는 사고 후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활동 등에 힘쓰며 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유족 가운데는 이 사고로 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이도 있다. 당시 71세였던 한 할아버지는 낯선 아이를 살리기 위해 높이 들어 올려 아이는 살리고 본인이 숨지기도 했다. 이날 육교에서 약 6000명이 엉켜 있었다. 한 사람 위에 쏟아진 압박감이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 무게였다고 한다.

서울 이태원 참사와 아카시시 불꽃축제 육교 사고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전에 경찰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한국 경찰은 마약 밀매 적발에 집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카시시 사고에서도 경찰은 폭주족 단속에 300명 이상을 투입했다. 불꽃축제 현장에는 경찰 30여 명만 배치했다.

불꽃축제 주최는 아카시시였다. 시는 오사카의 니시칸이라는 경비 회사에 경비를 위탁했다. 니시칸이 효고현 경찰에 제출한 경비계획서는 전년도에 열린 불꽃축제 계획서를 그대로 베낀 것으로 사고 후 밝혀졌다. 전년도 행사에는 5만여 명이었지만 그해 불꽃축제에는 15만명 이상이 몰렸다.

2001년 7월 효고현 아카시시 불꽃놀이 축제 당시 혼잡한 육교 모습. ⓒSNS 갈무리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 니시칸은 다리 위의 갈색 머리 젊은이들이 일부러 밀어서 사고가 났다는 정보를 흘렸다. 당시 이를 ‘진실’로 여기고 보도한 언론도 있었다. 오히려 젊은이들은 다리 지붕으로 올라가 구급차를 부르거나 역에서 행사장으로 오는 사람을 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등 사고를 막기 위해 애쓴 것으로 드러났다. 시모무라 세이지 씨는 사고 사흘 후 기자회견을 열어 현장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워낙 자세히 기억하고 있어서 당시 필자가 매우 놀랄 정도였다. 보험업을 하는 그는 “교통사고 현장을 머릿속에 그리듯이 떠올리고 일하기 때문에 이런 현장도 그렇게 기억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효고현 경찰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수사에 나섰다. 아카시시, 니시칸, 아카시시 경찰서의 경비 담당자 등 12명을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고베 지방검찰청은 이 가운데 5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2004년 12월 고베 지방법원은 아카시시 경찰관과 니시칸 직원에게 금고 2년6개월의 실형, 시 공무원 3명에겐 금고 2년6개월에 집행유예 5년의 판결을 내렸다. 2007년 4월 오사카 고등법원은 피고인 전원에 대해 항소를 기각했다. 2010년 5월 형이 확정되었다.

유족들은 아카시시 경찰서장과 부서장이 최고 책임자인데도 불기소된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족들은 고베 지방검찰청 심사회에 이들을 기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고베 지방검찰청 심사회도 기소가 상당하다고 결정했다. 당시 검찰은 심사회 결정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되었기에 이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검찰은 “아카시시 경찰서 부서장은 계획 단계에서 육교 주변에 경찰관을 배치했고, 필요하면 기동대 등을 투입하는 권한을 현장 지휘관에게 부여하는 등 사고 방지 조치를 강구했다. 또 경비 계획 단계에서 당일 사고를 예견할 수 있었음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라고 설명했다.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검찰 심사회 권한이 강화된 사법개혁안이 통과되자, 검찰 심사회 문을 다시 두드렸다. 결국 2010년 1월 검찰 심사회가 부서장에 대한 기소 의결을 했다. 하지만 공소시효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미 처벌받은 아카시시 경찰관과 과실공동정범으로 기소됐는데, 고베 지방법원은 부서장을 공동정범으로 보지 않았다. 법원은 시효가 지났다며 면소판결을 내렸다.

유족들은 아카시시, 니시칸, 아카시시 경찰서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도 냈다. 2005년 6월 법원은 유족들에게 총 약 5억6800만 엔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아카시시 사고로부터 21년이 흐른 올여름, 유족과 변호사들은 사고 당시와 그 후의 재판 과정을 담은 〈아카시시 육교 사고 재발 방지를 바라며-숨겨진 진상을 포기하지 않은 유족들과 변호인단의 투쟁 기록〉을 출판했다. 저자 중 한 명으로 당시 어머니를 잃은 시라이 요시미치 씨는 “책을 낸 직후 이런 사고가 이웃 나라에서 일어난 게 분하면서도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카시시가 주최한 불꽃축제와 달리 서울의 참사는 자연 발생적으로 모여서 주최자가 불분명하지만, 핼러윈을 맞아 젊은이들이 대거 모일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했을 것이다. 한국 경찰만이 그런 예상을 하지 못하고 안이하게 대처한 것이 본질이다.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행정력이나 경찰력이 동원되면 참사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유족들이 겪을 아픔과 관련해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붐비는 장소에 간 사람이 잘못이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분명 잘못된 말이다.” 그를 비롯한 유족들도 “어린아이를 그런 곳에 왜 데려갔나” “자업자득이다” 따위 비방을 들어야 했다.

아카시시 불꽃축제 육교 사고 후, 일본 사회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아카시시 불꽃축제는 폐지되었고, 다양한 축제가 혼잡 사고를 경계해 중지됐다. 일본 경찰의 경비 체계도 바뀌었다. 책 출간 기자회견에서 유족들은 “우리는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하지만 사고로 인해 생활이 달라졌다. 이러한 사고는 누구나 겪을 가능성이 있다. 안전보다 나은 건 없다”라고 말했다.

감수·문성희 (〈슈칸 긴요비〉 편집장)

기자명 아와노 마사오 (프리랜서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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