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7일 서울 중구 남대문광장에서 청계천 한빛광장까지 이동 중인 제22회 서울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 ⓒ시사IN 이명익

지난 6월27일, 서울 남대문광장 앞에 몇 무리의 사람들이 군데군데 둥그렇게 서 있었다. 광장에서 만난 박하나씨(21)는 “지난해에는 팬데믹으로 인해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리지 않았다. 사계절 중 한 계절이 사라진 듯했다”라고 말했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6월을 ‘성소수자의 달(pride month)’로 지정했다. 박하나씨에게도 여름의 시작은 으레 6월 ‘퀴어퍼레이드’였다. 서울퀴어문화축제는 2000년에 시작되었다. 2019년에는 주최 측 추산 15만명으로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한 축제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퀴어퍼레이드도 코로나19를 피해가지 못했다. 지난해와 올해 퀴어문화축제는 대부분 온라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50여 명의 제한된 인원으로 소규모 퍼레이드를 열었다. 남대문광장에 모인 사람들이다.

사라진 것은 계절만이 아니었다. 트랜스젠더 극작가 이은용, 음악 교사이자 정치인 김기홍, 군인 변희수가 사라졌다. 퀴어퍼레이드집행위원회 현주 집행위원장은 “올해 퀴어문화축제는 ‘트랜스젠더 인권 지지’를 강조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몇 년 사이에 트랜스젠더 혐오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경향이 보여요. 이런 상황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려 했던 트랜스젠더들의 자살이 지난해 겨울과 올봄에 연이어 터졌습니다. 이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집행위원회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어떤 축제는 애도가 된다. 〈시사IN〉이 자신의 특별한 퀴어퍼레이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지면을 통해 이들이 기억하는 ‘그날의 행진’을 이어가본다.

2019년 법적 성별정정을 한 트랜스젠더 남성 이한결씨. ⓒ시사IN 이명익

트랜스젠더 남성 이한결
살아남아 존재하는 것

이한결씨는 스물네 살 때 어머니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어머니는 “네가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 말이 의아했다. ‘나는 그냥 이렇게 20여 년을 살아왔는데 내가 왜 당당하지 않다는 거지? 그렇다고 동네방네 알릴 수도 없잖아.’

2015년 서울 광화문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그는 상상에나 존재하던 ‘동네방네 자신을 알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날 이한결씨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느냐.”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씨는 웃었다. “그냥 즐거웠어요. 그 안에서 행복해하면서 웃고, 행진할 때 덥다고 오래 걷기 싫다며 투덜거리고, 주위 사람들이 얼떨떨해하기도 하고 지지해주기도 하고.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이, 눈빛들이 다 소중했어요.”

이한결씨에게 퀴어퍼레이드(퀴퍼)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빛나는 순간’이었다. ‘퀴퍼’는 숨겨야 했던 삶의 그림자를 비추었다. “내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비밀을 갖고 싶지 않은데도 늘 속여야 했어요. 내 비밀이 들키면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했고요. 원래 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이런 게 당연한 거라고 세뇌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게 다 무너진 거죠. 비밀을 가져야 하는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너무 힘들었구나.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거구나, 이런 삶을 사랑하고 싶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이후 이한결씨는 대구와 제주, 인천에서 열린 지역 퀴어문화축제에도 참가했다. 2016년부터는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부스 운영자로 참여했다.

하지만 행복한 기억만 남은 건 아니다. 2018년의 인천퀴어문화축제는 지금도 떠올리기 힘든 순간이다. 그날, 퀴어문화축제를 혐오하는 이들이 욕을 하며 그를 감쌌다. 그들은 이씨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가려 했다. 축제 참가자들이 그를 도우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폭력이 이어졌다. 이씨는 그날 목이 터져라 ‘우리는/ 여기에/ 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하염없이 울었다. 하지만 그날의 ‘독한 경험’이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미 한번 안전한 삶을 경험해봤으니까 그 전으론 돌아갈 수 없더라고요. 이제 나를 위험하게 하는 세상에서 살지 않겠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2018년에 이루어진 ‘한국 트랜스젠더의 건강 연구’(고려대 보건과학대 김승섭 교수팀)에 따르면, 이 연구에 참여한 트랜스젠더 중 40% 이상이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고 답했다. 이한결씨도 그런 위기를 자주 감지한다. 그는 변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너무 부고가 많았잖아요. 제 주변엔 유명인이 아니라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도 많았어요. 함께할 사람들이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그냥 다들 살아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우리가 살아남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길 수 있는 싸움 앞에서 우리는 왜 살아남는 걸 할 수가 없을까. 여전히 답은 못 찾았지만 ‘우리 죽지만 말자’ 하는 마음이에요.”

이한결씨에게 제주퀴어문화축제가 인상적이었다. 그때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가 있었다. 그가 꿈꾸는 축제의 모습이다. “어린이들이 함께하는 퀴퍼가 되면 좋겠어요. 그 어린이들이 크면 더 안전한 사회가 될거라 믿어요. 나중엔 퀴퍼가 학교 현장학습으로도 인정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성소수자부모모임의 김진이씨는 2014년부터 매해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성소수자부모모임 김진이
차별은 의견이 아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하면서요. 부모가 축제 현장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혐오 세력들이 달라지는 걸 느껴요. ‘너네 부모는 너희가 동성애하는 거 아냐’고 소리 지르던 사람들도 부모인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걸 알면 갑자기 욕하고 삿대질하던 걸 멈추기도 해요.”

김진이씨는 베테랑이다. 2014년 성소수자부모모임이 만들어질 때 그 시작을 함께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김씨에게 소품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무지개 머리끈, 무지개 마스크와 슬로건 타월,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펴낸 〈동성애혐오성 괴롭힘 없는 학교〉, 성소수자부모모임 티셔츠 등을 꺼냈다. 그는 하나라도 더 많은 소품을 보여주려고 이것저것 몸에 걸치고 포즈도 제안했다. 그는 ‘무지개’가 사진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한다.

김진이씨는 20대 게이 아들을 둔 엄마다. ‘해피보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둘째 아들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점점 말수가 줄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괴롭힘당하는 걸 알고 백방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어느 날, 열여섯 살 아들이 커밍아웃을 했다. “처음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 하는 생각, ‘우리 애가 불행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매일 울었어요.” 김씨는 ‘당시 아이에게 상처가 될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살 거면 같이 죽자’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거다’ ‘절에 가서 6개월만 있다 오자’ ‘네가 동성애자일 리가 없다’고 다그쳤다. 결국 아들은 한국을 떠났다. 유학을 선택했다.

아들을 보내고 방황하던 그는 ‘더 많은 퀴어들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피켓을 직접 만들고, 2014년 신촌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다. 피켓에는 ‘아들아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고 적었다. 그는 이날을 가장 기억에 남는 퀴어문화축제로 꼽았다. 처음 참가해서도, 누군가 피켓을 빼앗아 부러뜨리려 위협해서도,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낯선 사람과 30분간 논쟁을 해서도 아니었다.

그날 오후, 행진을 시작하려 하자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드러누워 퍼레이드 카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섰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오후 8시에 끝나야 할 퍼레이드는 길바닥에 누웠던 사람들이 떠난 밤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11시쯤인가, 컴컴한 밤에 퍼레이드를 마쳤는데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단 하루, 같이 모여서 걷겠다는데 그것마저 못하게 저래야 하나. 다들 상처받고 돌아가는 건 아닐까 마음이 아팠어요.”

이 경험은 김씨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함께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났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은 2015년엔 여섯 명, 2016년엔 서른 명, 2018년엔 50여 명. 차차 세를 불려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다. 매월 정기모임에 이제는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다. 단체 채팅방에는 100명 넘는 부모들이 함께한다. 최근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국민 동의에도 적극 참여했다. “오늘 몇 명 더 동의하게 했다, 친척에게 말했는데 안 해줘서 상처받았다, 이런 이야기도 나누고요. 5만 됐다. 6만 됐다. 계속 지켜보다가 10만 됐을 때 다들 난리가 났죠.”

인터뷰 말미에 김진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고 김기홍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이미 존재하는데 왜 내 존재에 대해 합의가 필요한가.’ 저는 묻고 싶어요. 차별이 의견이 될 수 있나요? 차별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찬반의 대상이 아니에요.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분들은 그럼 차별을 하겠다는 건데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았으면 좋겠어요.”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왼쪽)와 배우자 이케다 히로시 씨. ⓒ주한뉴질랜드대사관 제공

주한 뉴질랜드 대사 필립 터너
사회에 이득이 된다

2018년 한국에 부임한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서울에 온 지 석 달 만에 서울퀴어문화축제 무대에 올랐다. 동성 배우자 이케다 히로시 씨와 함께였다. 이후 그는 매해 퀴어문화축제에 출석도장을 찍고 있다. 필립 터너 대사뿐만 아니다. 2014년 미국, 프랑스, 독일의 대사관이 신촌퀴어문화축제에 처음으로 공식 부스를 차린 이후 많은 주한 대사관들이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다. 2015년에는 한국 주재 16개국 대사 및 대사관 관계자들이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공동선언을 낭독했다.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중에도 필립 터너 대사는 서면 인터뷰에 응했다. “퀴어문화축제는 서로의 다양성을 축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중요한 순간입니다”라면서.

한국과 뉴질랜드의 퀴어퍼레이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뉴질랜드에서는 가족 단위의 참가자가 많아요. 어린이들도 당연히 많이 오고요.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즐기는 모습은 큰 파티와 비슷합니다. 가족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즐길 수밖에 없죠. 무엇보다 최근에는 군대, 경찰, 많은 정부기관들과 대기업도 축제에 참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군인과 경찰이 참여하는 퀴어퍼레이드.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고 변희수 하사는 성전환 수술 후 강제전역을 당했다. 필립 터너 대사는 뉴질랜드 사회가 겪었던 유사한 진통을 설명했다. 2010년 뉴질랜드에서는 트랜스 여성 군인이 커밍아웃을 하는 첫 사례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회적 논의가 이어졌다. 이후 뉴질랜드 군은 군내 성소수자의 인권이 향상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2014년 국제 안보 연구기관인 HCSS(헤이그 전략연구센터)는 103개국 군대를 대상으로 LGBT(성소수자) 관용도 조사를 했습니다. 뉴질랜드 군대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으며 ‘세계에서 LGBT 군인들에게 가장 친화적인 군대’로 선정됐죠.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군의 전투력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2019 뉴질랜드 직장 다양성 조사’를 포함한 여러 연구에 따르면 구성원의 다양성이 보장될수록 그 조직은 더 성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차별을 겪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립 터너 대사는 여러 차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번영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필립 터너 대사는 소수자들과 연대하지 않는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이 성숙할 기회를 잃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퀴어퍼레이드의 핵심은 가시성, 즉 다름을 드러내고 알리는 데 있습니다. 모른다는 것은 관용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입니다. 내 주변에 성소수자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성소수자가 곁에 있는데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모든 사회에 성소수자들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관용 사회로 가는 큰 이정표가 됩니다. 퀴어문화축제처럼 소수자들의 다양성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확산되면 그 사회는 서로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배워나가는 기회를 얻습니다.”

필립 터너 대사는 한국계 뉴질랜드 골프 선수 리디아 고의 말을 인용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고 성별·민족성·피부색·언어 또는 문화를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 날을 위해 기도합니다.”

젠더퀴어 이다솜씨는 9월 열릴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을 준비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젠더퀴어 청소년 이다솜
국내 최초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 준비 중

충북 제천에 사는 이다솜씨는 열여섯 살 때부터 매해 빠지지 않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축제에 참가하면 ‘힘이 세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이다솜씨는 졸업을 앞둔 열아홉 살이다. 그리고 전국 최초로 열릴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을 준비하며 바쁜 6월을 보내고 있다. 중·고 통합 6년제 기숙형 대안학교에 다니는 이다솜씨는 열다섯 살 때 전교생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발표 자료를 만들어 젠더퀴어(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가 뭔지, 왜 커밍아웃을 결심하게 됐는지 설명했다. 박수를 쳐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익명 공간에서는 혐오 발언도 나왔다. “‘너 게이냐?’ 이런 말 직접 듣기도 했고, 선생님이 차별적인 발언을 할 때도 있고요. 온전히 받아들여진다기보다는 비성소수자가 성소수자에게 ‘너희를 인정해줄게, 받아들여줄게’ 이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이다솜씨에게 성별 이분법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학교 공간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여자’ 화장실에 가기 싫어서 물도 덜 마시게 됐고 자신의 성별을 남녀로만 표기해야 하는 설문에 답하지 못한 채 몇 분이나 붙잡고 있기도 했다. 결국 이다솜씨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앞으로 6년간 먹고 자고 공부해야 하는 학교를 더 안전한 곳으로 바꿔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전교생 앞에서 커밍아웃하기’가 현실이 되었다. “여기서 안 받아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청소년들은 집·학교·학원, 이게 전부인 경우가 많은데 이 중 하나라도 나에게 폭력적인 상황이 되면 모든 게 너무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많아요(201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차별 및 괴롭힘을 당했던 성소수자 중 결석, 진학 포기, 자퇴, 전학 사례가 각각 11.8%, 6.5%, 4.3%, 3.2%로, 차별과 괴롭힘의 결과 학교에서 배제·이탈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친구들은 이다솜씨의 뒷배가 되어주었다. “교내에 성소수자 모임이 있어요. 저 말고 커밍아웃한 친구들은 없어서 아우팅 위험 때문에 가끔씩 밖에서 따로 만나요.” 9월에 개최할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도 모임 친구들과 머리를 맞댄 아이디어다. “작년 말에 성소수자모임 친구들과 퀴어 앨라이(성소수자를 향한 차별을 반대하며 이들과 연대하는 지지자) 친구 14명 정도가 모여서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만드는 축제를 해보자, 서울에 가기 힘든 지역 청소년 퀴어들이 같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무아지경의 무아는 ‘내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청소년 퀴어의 처지에서는 ‘내가 없어질 지경’인 세상에 맞서겠다는 뜻이다. 청소년들이 만드는 퀴어문화축제, 어떤 모습일까? “장애인 인권 같은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이 많아요. 여러 소수자성을 아우를 수 있는 축제를 만드는 게 목표예요. 무엇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도움 없이 경제적으로 자립된 축제를 만들 거예요. 청소년들의 힘만으론 할 수 없을 거라고, 부족할 거라고 하는 편견들을 깨고 싶어요.” ‘무아지경’은 현재 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통해 모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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