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퀴어문화축제 제공2017년 10월28일 열린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에서 무지개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김기홍씨.

초·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던 한 전직 음악 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에게는 트랜스젠더 활동가이자 ‘퀴어 정치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던 ‘상큼한 김 선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월24일 김기홍씨(37)는 결국 교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게 무엇인지 몰라서 평범하게 살아오지는 못했습니다.” 2019년 11월11일, 제21대 총선에서 녹색당 비례대표 경선에 나선 김기홍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저 제가 느끼는 불편함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습니다. 간혹 모난 돌이라 정을 맞고 숨기도 했지만, 다시 불편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는 ‘모난 돌’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즐거웠지만 화장을 한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이 길다는 이유로 기간제 교사직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고향 제주로 돌아와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중 평소 입고 싶었던 치마를 입은 뒤로는 더욱 눈에 띄는 존재가 됐다. 그는 에세이 〈나는 퀴어입니다〉(열셋)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복장에 성(gender)이 있는지 계속 의심했다. 대체 복장과 젠더가 무슨 관계지? (⋯) 나는 치마를 이성의 옷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치마 입는 건 크로스 드레싱(이성의 복장을 입는 행위)인가?’

가는 곳마다 수군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억누르거나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스스로 ‘100% 남성’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을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갈망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자 논바이너리(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별)인 트랜스젠더(생물학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로 스스로를 정체화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내 인생의 끝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할 과업’이라고 불렀다.

커밍아웃은 세 번 했다. 첫 번째 커밍아웃은 ‘홧김’에 했다. 어딘가에 댓글을 달았다가 “쫌 X랄하지 마, 게이 XX야”라는 욕으로 시작하는 쪽지를 받고 난 뒤 화가 나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했다. 두 번째 커밍아웃은 정치인 때문이었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4월25일 TV 토론회에서 “저는 (동성애를) 뭐 좋아하지 않는다.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해 주위에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알렸다. 마지막 커밍아웃 대상은 어머니였다. 그때부터 호르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2017년 10월28일 제주에서 처음으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 그는 조직위원회 공동조직위원장을 맡았다. 혐오 세력의 민원 때문에 공원 사용이 일방적으로 취소되자, 제주시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내야 했다. 제주지법은 ‘이용자들의 성적 취향 등만을 이유로 도시 공원의 사용 자체를 제한·금지하는 것을 허용하는 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며 주최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50명만 와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행사에는 500여 명이 왔다. 행진에는 1000명이 함께했다. 그는 처음으로 산 힐을 신고 퍼레이드를 했다. 함께 축제를 기획했던 한 동료 활동가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교사로서 열정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제주 청소년들이 육지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에 가기 힘드니까, 제주에도 같은 성소수자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기를 바랐다. 실제로 축제가 끝난 뒤 제주에서 청소년·청년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생기는 걸 보고 개인적으로 힘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녹색당 제공김기홍씨는 2020년 21대 총선에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치마 입고 출근해 음악 가르치고 퇴근하는 삶

축제가 끝나고 녹색당에 입당한 그는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제주도의원 비례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트랜스젠더 활동가이자 전직 교사라는 이력에 ‘퀴어 정치인’이라는 정체성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출마하며 “이전에는 내 존재 자체가 운동이니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소수자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을 만드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도움과 연대를 구합니다”라고 말했다.

6·13 지방선거 결과 녹색당 지지율은 4.87%였다. 비례대표 의석을 가져갈 수 있는 최소 기준선인 5%에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다. 녹색당 제주도의원 비례후보 2번이었던 그는 도의원이 되지 못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2019년 11월, 21대 총선에서 녹색당 비례대표 경선에 나선 그는 “세상이 바뀌기는 바뀌는 모양이라며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 변화를 좀 더 빠르게 만들고 싶어 함께하려 합니다”라며 다시 한번 출마 선언을 했다. 이번에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직이었다.

1차 당내 경선을 통과한 뒤 그는 지지자들에게 올린 감사 인사에 이렇게 적었다. “(2019년) 10월9일에서 12월10일까지 약 두 달, 제 주변에서 다섯 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고 세 명이 살아남았습니다. 쉽게 회복되지 않아 잠시 칩거했습니다. 그동안 그래서 지지에 감사하는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트랜스 여성이자 뇌전증 장애를 앓던 ㅁ, 그의 연인이었던 ㅅ, 성소수자 친구 ㅎ, 활동가 ㅈ, 그리고 자신의 연인까지. 그는 각종 발언과 토론회가 이어지는 사이마다 휴대전화를 쥐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사를 걱정했다. 끝내 세상을 떠난 지인은 그에게 카카오톡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성소수자랑 장애인 취업 못하지 않게 정치 잘해줘요.”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 4번으로서 처음 찾은 유세지는 그가 이전에 근무하던 학교였다. 2020년 당시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가끔 메시지 보내는 학생들이 있어요.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수업 듣고 활동하는 거 보고 바뀌었어요. 제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라고. 그래서 제일 먼저 가고 싶은 유세지가 거기였어요. 거기 말고는 생각해본 곳이 없었죠.”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화장을 하거나 치마를 입고 출근해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퇴근하는, 그리고 그 사이에 누구도 죽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2020년 〈허프포스트코리아〉 인터뷰에서 “좀 더 빠르게 좀 더 강하게 투쟁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다음에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공무원과 교사도 정당에 가입할 수 있게 만들고, 교원노조 관련법 없이 교사들도 일반 노조법으로 할 수 있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당적을 유지한 채 다시 학교로 돌아갈 거예요”라고 정치하는 목표를 밝혔다.

당선되고 나서 만약 누군가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보여주기 위해 비키니를 입고 국회 본회의장에 출근하겠다고 거침없이 말하던 그는 한편으로 ‘끌어오는 정치’를 약속하기도 했다. “나와는 멀리 있는 사람, 만약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좀 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물들어가는 정치를 할 거예요. 다른 당 의원들을 만나서 이쪽으로 끌어올 거예요. 만약 ‘명분이 없다’고 한다면 제가 명분을 만들어줄 거예요. 그런 식으로 끌어오는 정치를 할 거예요.” 그에게 정치는 절박하게 끌어와야 할 물줄기와도 같았다.

이번에도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총선 결과 녹색당은 0.21%를 득표했지만, 그의 낙마는 낮은 지지율 때문만이 아니었다. 선거 과정에서 10여 년 전 그가 성인지 감수성이 낮았을 때 트위터에 남긴 글이 문제가 됐다. 논란이 불거지자 그는 즉각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여성혐오 발언이 담긴 글과 해당 계정은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반면교사로 삼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비례대표 후보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당적은 유지했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페이스북에도 ‘안 맞으면 탈당하더라도 그저 부끄럽다는 이유로 탈당하지는 말아달라. 내 반려 정당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만 남은 정당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이라고 적기도 했다. 그에게 정치는 실수하고 미끄러지면서도 계속 붙들고 나가야 하는 방법이자 수단이었다.   

그러나 후유증은 컸다. ‘상큼한 김 선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퀴어 정치인’을 선택했던 그가 자진 사퇴를 하고 나자 움직일 공간이 별로 없었다. 같은 녹색당원이자 성소수자 활동가인 한 동료는 “정체성 때문에 절망하거나 좌절한 게 아니었다. 자기 정체성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다. 당시 일로 인한 충격이 컸다”라고 말했다. 총선이 끝나고 석 달 뒤인 2020년 7월 페이스북에 “네, 살아 있고, 정치 계속합니다. 운동도 계속합니다. 희망을 만들고 싶어서 절망을 줄이고 싶어서 합니다. 내가 살려고 운동하고, 내가 살려고 정치합니다”라고 글을 올렸지만 두드러진 활동은 하지 못했다. 개인 SNS 계정에는 세상을 떠난 지인들의 기일을 기리는 글을 올렸다. 추모글 사이로 차별금지법이나 제주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촉구하는 발언문이 간혹 올라왔다. 당시 그는 스스로를 ‘지역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 아니 생존활동가’라고 불렀다.

그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짜내야 하는 에너지는 너무나 컸다. 그에 비해 세상의 혐오는 너무나도 쉽게 몰아쳤다. 2월18일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가 제3지대 야권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토론에서 “퀴어축제를 광화문에서 하게 되면, 거긴 자원해서 보려고 오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런 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김기홍씨는 페이스북에 생의 마지막 글을 올렸다. “우리는 시민이다. 시민. 보이지 않는 시민,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주권자에 대한 모욕이다.”

삶도, 겪는 혐오도, 나를 향한 미움도

2월24일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유서에 “너무 지쳤어요. 삶도, 겪는 혐오도, 나를 향한 미움도. 오랫동안 쌓인 피로가 있어요. 미안해요”라고 적었다. 한 동료 활동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차별 없는 저세상으로 가서 푹 쉬라’고 말하지만, 왜 그가 살아서는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없었는지 안타깝다”라고 추모했다.

일주일 뒤인 3월3일,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강제로 전역당했던 변희수 전 육군 하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2020년 2월 김기홍씨는 공개 편지를 통해 변희수 하사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합격자 트랜스젠더 A에게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함께 살아갑시다. 살아내지 않고 그냥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친구가 남기고 떠난 말 ‘성소수자랑 장애인 취업 못하지 않게 정치 잘해줘요’를 지키려면 많은 분이 일상을 지켜야 합니다. 드러낸 그 자체로 두 분은 저의 희망입니다.”

김기홍씨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더 많은 성소수자들이 뒤이어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두렵다며 말을 아꼈다. 제주퀴어문화축제를 조직했던 한 활동가는 “추모 기사조차 누군가에게는 자극이 될 것 같다. 왜 세상을 떠났는지보다 그가 이루려 했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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