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EPA

“T는 엄마가 두 명이야.”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 아이가 말했다. 친구 T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둘이고, 그들이 매일 아침 함께 T를 유치원에 데려다준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친엄마와 새엄마가 아침마다 만나서 같이 아이를 데려다주는 건가? 아주 쿨한 관계인가 보네.’ 그러다 유치원 운동회 때 T의 두 엄마를 만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그들은 동성 커플이었다. 두 엄마는 아들 T와 함께 축구를 하고,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고,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했다. 다른 모든 부모들이 하는 것처럼.

T의 두 엄마가 유치원 운동회에 참석해 아무렇지 않게 축구를 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현재 스위스에서 동성 커플은 법적 혼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2007년에 만들어진 제도인 ‘시민 결합’ 상태만 인정받을 뿐이다. 시민 결합은 동거 관계를 정부에 등록해 인정받는 것으로, 실효가 상당히 크다. 가족 세금 감면 혜택이나 파트너 사망 후 노령연금을 이어받는 등의 권리가 주어진다. 이 제도 시행 후 스위스에서 지금까지 8000쌍 이상이 시민 결합을 맺었다. 하지만 동성 커플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법적 결혼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시민 결합은 동성 커플에게만 예외적으로 해당하는 제도다. 언뜻 배려처럼 보이지만, 예외적인 혜택은 필연적으로 차별 효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구직 서류의 가족관계 난에 시민 결합이라고 쓸 경우,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동성애자라는 성적 지향이 공개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이들에 관련된 것이다. 동성 커플 중에도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현재 스위스에서는 동성 커플이 아이를 입양하는 것, 레즈비언 커플이 기증된 정자를 이용해 임신하는 것, 게이 커플이 대리모를 통해 아기를 갖는 것은 불법이다.

‘모두를 위한 결혼’ 법안 국민투표를 앞둔 취리히 시내 한 서점에 진열된 책. 이 서점은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관한 책을 모아 소개하고 있다.ⓒ김진경 제공

그러면 T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아마도 T의 두 엄마 중 하나가 외국 병원이나 업체에 기증된 정자를 이용해 임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실제로 T를 출산한 여성만 법적인 엄마가 된다. 다른 여성이 T의 엄마 자격을 얻는 방법이 있긴 하다. 1년 동안 기다린 뒤 T를 입양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다. 그나마 2018년에 민법이 바뀌어서 파트너의 아이를 입양할 수 있게 되었지, 그 전에는 이것도 불가능했다. 만약 출산한 엄마가 사망하면 다른 여성은 함께 기른 아이에 대한 어떤 권한도 주장하지 못했다. 두 여성이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정하더라도, 정자를 구하는 일부터 법적 보호자 지위를 얻는 것까지 난관이 있다. T의 두 엄마도 지금까지 힘든 과정을 거치며 살아왔을 것이다.

다행히 이런 상황은 머지않아 바뀔 것 같다. 9월26일 실시되는 스위스 국민투표 안건 중 하나가 바로 동성 부부의 결혼을 허용하는 ‘모두를 위한 결혼(Ehe für alle)’이다. 사실 이 법안은 지난해 12월18일 스위스 의회에서 민법 개정을 통해 통과됐다. 그런데 법안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일부 종교 단체 및 보수 성향 정치인들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국민 서명을 5만 건 이상 모아 제출함으로써 이 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됐다. 스위스에선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이라 하더라도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조건에 따라 서명을 모아 제출하면 국민투표를 실시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

동성 결혼은 국가가 동성 커플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시민 결합이라는 제도를 통해 세금이나 연금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동성 커플이 결혼 합법화를 요구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를 더 쉽게 갖기 위해서다. 스위스에서 입양은 싱글 또는 결혼한 부부만 할 수 있다. 기증된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체외수정 및 이식술, 배아 배양  및 냉동저장 기술 등) 지원은 법적으로 결혼한 관계만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차별인지, 아이의 복지 면에서는 어떤지, 아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는 게 왜 결혼을 통해야만 가능한지 등을 놓고 정치적·윤리적 논의가 뜨겁다.

먼저 입양에 대해 살펴보자. 입양의 문이 더 넓어지는 건 아이를 바라는 부부에게나 가정이 필요한 아이에게나 다 좋은 일이다. 아이가 입양되어 성장하는 과정이 늘 순탄하지는 않지만, 이건 이성 부부가 입양한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롤모델’이 필요하다고, 두 아빠 또는 두 엄마는 좋은 롤모델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며 남녀가 조화를 이룬 환경만이 이상적이라는 건데, 이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현재 스위스의 이혼율은 40%에 이른다. 아이 7명 중 1명이 한 부모와 산다. 엄마와만, 또는 아빠와만 사는 아이는 모두 롤모델이 없는 나쁜 환경에서 자란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왜 한부모 가정 아이는 놔두고 동성 커플의 입양만 금지하는가.

두 아빠, 두 엄마는 롤모델 아니다?

보조생식술 문제는 층위가 좀 더 복잡하다. 결혼한 동성 커플이 기증된 정자를 이용할 수 있는 건 권리의 확장이지만, 이 혜택을 보는 건 레즈비언 커플뿐이다. 게이 커플에게 필요한 건 정자가 아니라 난자와 자궁인데, 난자 기증과 대리모 제도는 스위스에서 엄격히 금지돼 있다. 특히 대리모 제도는 스위스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불법이다. 대리모가 타인의 목적을 위해 여성의 신체를 이용함으로써 존엄성을 침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영국, 포르투갈 등에서 ‘이타적 목적’을 전제로 한 대리모만 허용한다. 따라서 아이를 원하는 게이 커플에겐 입양 외에 대안이 없다. 이 점 때문에 ‘모두를 위한 결혼’이 사실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게이를 차별하는 법이라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9년 5월, 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타이완에서 혼인신고를 마친 동성 커플의 모습.ⓒEPA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법이 싱글을 차별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취리히 대학의 우르스 작서 헌법학 교수는 스위스 일간지 〈타게스 안차이거〉와 한 인터뷰에서 “가족만을 국가의 기본 구성요소로 인정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 ‘모두를 위한 결혼’은 기회의 균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 스위스에 현재 1인 가구 130만명이 있는데, 이들은 세금·연금 등 모든 면에서 2인 이상 가구에 비해 불리하다는 것이다. 싱글 여성도 동성 커플과 마찬가지로 정자 기증을 받는 게 불가능한데, 이제 동성 커플은 결혼이 합법화되면 보조생식술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싱글 여성에겐 여전히 그 길이 막혀 있다.

작서 교수는 가족이나 파트너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을 ‘중요하지만 잊힌 소수’라고 부르며, 이성이든 동성이든 결혼을 부추겨 가족 비중을 늘리는 건 잘못된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차별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결혼을 통한 전통적 가족제도를 확대하는 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작서 교수의 주장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게 합리적일까. 오히려 1인 가구에 세금 혜택을 늘리거나 싱글 여성에게도 보조생식술을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편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법적 제도 전에 사회적 합의 선행돼야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동성 결혼이 인정되지 않는 지금도 스위스 내에서 동성 커플과 사는 아이들이 수천 명이라고 당국은 추산한다. 외국에서 아이를 입양했거나, 외국의 정자은행에서 구한 정자로 임신을 해 아이를 낳은 경우다. 동성 결혼이 허용되면 동성 커플에 의한 스위스 국내 입양이 더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 입양에 비해 절차와 비용이 줄어들고, 많은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다. 제도권 안에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아이를 갖는 것은 결국 아이의 복지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반대 의견이 있지만, 이 법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9월 초 한 여론조사기관(GfS Bern)이 실시한 설문 결과, 투표권이 있는 응답자의 69%가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말했다. 동성 커플의 결혼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었다. 법이 사회의 변화를 한참 뒤늦게 따라잡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2001년에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허용한 이후 벨기에·스페인·스웨덴·노르웨이·프랑스·독일 등 유럽 내에서만 15개국, 전 세계적으로 29개국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번에 국민투표에서 이 법이 통과되면 스위스는 서유럽 국가들 중 사실상 마지막으로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된다. 변화는 아시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2017년 5월 타이완 최고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현행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됐다. 올해 3월 일본 삿포로 지방법원도 동성 결혼 금지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스위스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가 국민투표에 부쳐지는 과정을 보며, 차별을 없애나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과 법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고민하게 됐다. 앞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던 나라들 중 프랑스, 스페인 등에선 법안 통과 후 큰 반발이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모두를 위한 결혼(Le Mariage Pour Tous)’이라 불리는 동성 결혼법이 2013년 5월 발효됐는데, 그 과정에서 ‘모두를 위한 시위(La Manif Pour Tous)’라는 동성 결혼 반대 단체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프랑스 68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이며, ‘티파티 운동(2009년 미국 길거리 시위에서 시작한 보수주의 정치운동)’에 비견되기도 했다. 법안 통과 직전 프랑스의 여론조사에서 동성 결혼 지지 비율은 50% 정도였다.

스위스는 프랑스보다 한참 늦게 동성 결혼 합법화를 앞두고 있지만 여기 찬성하는 여론 비중이 훨씬 높다. 따라서 제도 시행 후 사회적 반발도 덜할 것이라 예상한다. 법적 제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제도의 안정적 정착을 위해선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결혼한 커플에게만 보조생식술을 지원하고 싱글은 제외하는 게 차별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카린 켈러주터 스위스 법무장관이 했던 말을 들어보자. “결혼은 아이들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포함한다는 게 현재의 합의다. 10년 뒤엔 (싱글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아이 가질 권리를 주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사회가 그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한다. 생식 관련 기술이 남용되는 건 아닌지, 생물학이 설정한 한계를 우리가 넘어가도 되는지, 기회의 균등과 결과적 평등에 있어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아이를 가질 권리라는 게 존재하는지,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한국 사회는 이런 토론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9월26일 마무리된 국민투표 결과, 투표자 64.1%의 찬성으로 동성 결혼법이 통과됐다. 이로써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30번째로, 서유럽 국가들 중에선 사실상 마지막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국가가 됐다. 스위스 법무부에 따르면 최초의 동성 결혼은 2022년 7월부터 가능해진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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