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새롭게 개정된 녹색당 강령 제4장 ‘함께 사는 삶’은 열린사회에 대한 독일 녹색당의 견해를 분명히 보여준다. 강령은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사회를 강하게 만들며, 이를 위해 불평등을 해소하고 소수자를 보호하며 혐오와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밝히고 있다. 강령은 구체적으로 서로 다른 종교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 등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난민 문제와 함께 극우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녹색당은 여기에 가장 뚜렷이 반대하는 정당이며, 오랫동안 여성·성소수자·이민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대변해온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는 녹색당이 지지를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1983년 5월5일 녹색당 발트라우트 쇼페 의원은 독일 여성 정치의 새로운 역사를 연다. 같은 해 3월 선거에서 정당 득표 5%를 넘기며 창당 3년 만에 연방의회 진입에 성공한 녹색당의 첫 번째 연방의원 중 한 명인 그는 자신의 첫 의회 연설 주제로 낙태죄 폐지와 부부간 성폭력 문제를 선택했다. 그는 임신·출산·육아의 책임이 여성들에게만 전가되고, 그것이 여성의 삶 전체에 족쇄가 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낙태죄는 여성만을 위협하며 남성은 태아의 생명에 대한 도덕적 수호자 행세를 한다”라며 낙태죄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연설을 통해 부부 사이의 성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형법이 제정되어야 하며 여성에게는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연설에서 쇼페는 독일 의회에서 처음으로 성차별을 뜻하는 ‘섹시스무스(Sexismu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시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던 남성 의원들 대부분은 그 말을 ‘섹스’로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야유했다. 당시 의원 519명 중 90% 이상이 남성이었다.
낙태죄 폐지와 동성혼 합법화
1983년 쇼페의 연설에 등장한 여성의 권리와 차별에 대한 내용은 수십 년간 녹색당과 여성 정치의 핵심 의제로 남는다. 그리고 일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녹색당의 주요 사안으로 남아 있다. 그중 부부간 성폭력에 대한 처벌 규정은 결국 1997년 의회를 통과했다. 보수정당의 의원들 상당수는 반대표를 행사했다.
낙태죄의 경우 1990년 통일 이후 변화를 겪는다. 통일 이전 서독에서는 법률이 정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임신중절은 처벌 대상이었던 반면, 동독에서는 임신 12주째까지 여성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임신중절이 허용되었다. 동독과 서독의 여성들은 통일 직전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서독 형법 제218조를 통일 독일까지 가져갈 수 없다며, 형법 218조 폐지 시위를 한다. 대규모 시위와 서명운동이 주목을 받으면서 결국 통일 협정서에 임신중절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1992년 말까지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간다. 이후 보수적인 정당들의 법 개정안 마련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거치면서 형법 218조는 결국 폐지되지 않고 일부만 개정되었다. 그 결과 1995년부터 독일에서는 상담 이후 3일간의 숙고 기간을 거칠 경우에 한해 12주 이내의 임신중절이 처벌받지 않는다. 녹색당은 새로운 강령과 9월 연방선거 공약을 통해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완전한 자기결정권과 형법 218조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쇼페의 연설뿐 아니라 녹색당의 등장 자체는 남성 중심의 독일 연방의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들은 녹색당 창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녹색당의 첫 번째 연방의원 중 약 35%가 여성이었다. 이는 다른 정당들의 여성 의원 비율이 10% 이하였던 것과 비교해 매우 높은 수치였다. 이후 녹색당은 1986년에 여성 과반제를 도입해 1987년 의회에는 당 전체 의원 중 56.8%인 25명이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녹색당은 연방의원 중 58.2%인 39명이 여성으로, 가장 높은 여성 의원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이후 다른 정당들의 여성 의원 비율이 높아져 현재 독일 제19대 연방의회의 여성 의원 비율은 약 30%에 이른다. 하지만 가장 거대 정당인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경우 약 20%가,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겨우 10%만이 여성 의원이다. 여성 당원 비율에서도 녹색당은 41%로 다른 정당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한편 녹색당은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 마련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녹색당은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로 연방정부에 참여하면서 2001년 동성 동거인을 법적 파트너로 등록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2017년 독일의 동성결혼 합법화에도 녹색당은 결정적 작용을 했다. 독일의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은 녹색당·사민당·좌파당이 함께 발의했다. 하지만 당시 세 당의 표를 합쳐도 의회의 절반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기민당과 기사당의 표가 필요했다. 그리고 녹색당은 양당이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독일은 9월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집권당인 기민당은 녹색당을 총선 이후 유력한 연정 파트너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녹색당의 폴커 벡 의원은 동성혼 합법화를 연립정부 참여 조건으로 당에 상정했으며, 이는 결국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메르켈 총리와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동성혼 합법화에 대한 명확한 의사를 밝히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결국, 총선 실시 전 사민당의 참여로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이 발의되었고 메르켈 총리와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차기 정부로 이 문제를 끌고 가기보다는 이번 표결에서 당론으로 법안을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결국 동성혼 합법화 법안은 총 623표 중 찬성 393표, 반대 226표로 통과된다. 당시 기민당·기사당 소속 의원 320명 중 최소 75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녹색당은 이민자들의 통합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한 경제난과 노동력 부족을 겪었다. 이에 독일 정부는 해외에서 노동자를 모집했다. 1955년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1960년대 스페인, 그리스, 터키, 모로코, 포르투갈, 튀니지 등에서 많은 노동자가 유입됐다. 한국도 박정희 정권 당시 간호사 1만여 명과 광부 8000여 명을 독일에 파견했다. 이들은 주로 독일의 3D, 저숙련 업종에서 한시적 고용계약으로 일하며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독일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
1973년 독일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 모집을 금지하자, 계약이 만료된 외국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장기 체류를 결정하고 가족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특히 터키 노동자의 가족이 독일에 많이 들어오면서 독일 내 이민자 수가 증가했다. 1970년대 외국인 수는 400만명에 달했고, 통일 이후 1990년에는 약 524만명, 1999년 약 734만명이었다. 2019년 기준 독일에 사는 외국인 수는 1012만명(전체 인구의 12.4%)이고, 외국인을 포함해 이민 배경을 가진 사람은 약 2100만명(전체 인구의 26%)에 달한다.
국적법 개정, 이주법 제정, 난민 수용
1980년대 말까지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외국인의 독일 이주를 제한했다. “독일은 이민 국가가 아니다”라며 독일 국민의 권리와 이주민의 권리를 차별화하고, 이주민들이 독일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통합되는 것을 어렵게 했다. 한편 독일의 급격한 출산율 저하와 인력 부족에 맞서 적극적 이민정책을 펴자는 의견도 있었다. 외국의 고급 인력을 받아들여 독일의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성장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목소리는 주로 산업 부문에서 나왔다.
이에 녹색당은 ‘독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이민 국가이며 헌법의 가치에 따라 오랫동안 이곳에 살아온 이주민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특히 1998년 사민당과 녹색당이 적록연정을 이루던 시기에 기존 외국인법(외국인의 입국과 체류에 관한 규율)을 대체하는 이주법(이주의 조정 및 제한, 체류의 규제와 유럽연합 국민과 외국인의 통합)을 개정하는 데 힘썼다.
당시 외국인이 독일 시민권을 획득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녹색당과 사민당은 다중 국적을 허용하고, 출생지에 따라 국적을 획득하도록 국적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이는 장기간 독일에 거주하는 이주민들과 그 자녀들이 독일 국적을 가지고 독일 사회에 잘 통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보수세력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이들은 외국인 중 다수를 차지하는 터키인들이 시민권을 가질 경우 독일 사회의 극심한 혼란과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우려했다. 또한 이들에 의해 독일이 이슬람화할 것이며 이것은 국내 안보에도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결국 사민당과 녹색당이 연정을 하던 2000년 발효된 새로운 국적법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독일에 거주해야 하는 기간을 15년에서 8년으로 줄였다. 영주권을 보유한 이민자 자녀의 경우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동으로 이중국적을 갖게 되었다. 독일 시민권 획득은 곧 독일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독일은 유럽 국가 중 외국인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는 국가에 속하는데, 법 개정을 통해 더 많은 이주 배경의 시민들이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 동구권 붕괴와 함께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전쟁 및 터키 쿠르드 지역의 상황 악화 등으로 인해 이민·망명 신청자가 독일로 대거 유입되었다. 당시 독일의 망명법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정치적 망명 신청을 폭넓게 인정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1993년 기민당·기사당 연합 주도하에 사민당과 자민당의 동의로 개정되었다. 개정된 법은 망명 신청 대상을 순수한 정치적 망명자로 제한하고, 안전한 제3국에서 독일로 입국한 사람은 망명을 신청할 수 없도록 했다. 그 결과 망명 신청 건수가 매우 감소했다. 1992년 약 44만명이었던 망명 신청자는 1993년 32만명, 1994년 13만명으로 줄었다.
독일 정부의 이러한 제한적인 망명법은 2005년 사민당과 녹색당에 의해 새로운 이주법이 제정되면서 바뀌었다. 녹색당은 특히 망명권과 관련해 비국가적인 박해의 인정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성 할례의 강제와 같은 박해에 대해서도 망명권을 인정해야 하며, 망명권의 인정이 불확실한 경우 추방을 강제하지 않는 원칙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녹색당은 망명과 더불어 독일이 더 많은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5년 시리아 내전 이후 난민 유입이 급증하면서 메르켈 총리는 “난민을 수용하는 것이 독일의 국가적 의무”라고 선언하며 유럽연합 회원국 중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했다(2015년 약 48만명, 2016년 75만명, 2017년 22만명, 2018년 19만명, 2019년 17만명, 2020년 12만명). 메르켈 총리가 속한 기민당 내부에서조차 이 난민 수용 정책은 비난을 받았지만, 녹색당은 메르켈 총리의 이 같은 결정을 적극 지지했다. 2020년 9월 독일 정부가 그리스 모리아 캠프에 있는 난민 1500여 명을 수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녹색당은 연방주와 지자체에 난민을 수용할 여력이 있다며 더 많은 난민의 수용을 주장했다.
시리아 난민 수용을 반대하며 급성장한 극우정당 AfD는 독일 의회정치에 진출하면서 독일 내 난민 유입을 반대하고 무슬림과 외국인을 반대하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에 녹색당은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비인간적이고 인권에 반하는 반난민 정치에 대항해 난민을 포용한다는 인도주의적 방침을 내세우고 있다. 녹색당은 유럽 기본헌장 및 제네바 난민협약을 기반으로, 유럽과 독일에 도착한 사람들이 신속하고 공정한 망명 절차를 받을 수 있게끔 하자고 주장한다. 인도주의적 입국 확대, 난민 가족들의 유럽 국가 내 입국 및 난민 신청 확대, 본국 송환 금지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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