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영상통화라 인터넷 사정에 따라 음성이 작아졌다 커지길 반복했다. 어떤 말은 온전히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웃음소리만은 모든 난관을 뚫고 선명하게 들렸다. 화면 너머 김인선씨(71)가 큰 소리로 웃을 때마다 저절로 따라 웃게 됐다. 한국 시간으로는 저녁, 독일 베를린의 오전이었다. 독일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전면 봉쇄에 들어갔다. 외출을 할 수 없어 집에 머물며 글 쓰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햇살이 밝은 그의 집을 배경으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김인선씨가 한국 사회에 이름을 알린 건 사단법인 ‘동행-이종문화 간의 호스피스’를 설립하면서였다. 독일 이주민의 마지막을 돌보는 최초의 호스피스 단체다. 그는 젊은 시절 파독 간호사로 오랫동안 일했고, 이후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외교통상부 장관상, 비추미 여성대상 특별상 등을 받았다. 이후 ‘동반자-이종문화 간의 호스피스’라는 이름으로 단체 이름이 바뀌었다.

또 한 차례, 그는 ‘60대 성소수자’로 주목받았다. 2019년 20주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초대받았고 무지개색 스카프를 두른 십자가를 들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때 한국 남성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현재 동성인 이수현씨와 살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70여 년 삶을 정리한 책을 펴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라는 제목은 얼핏 당연한 말 같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 태어나 혈혈단신 독일로 건너간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숱한 어려움을 몸으로 겪으며 얻어낸 문장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1950년 1월2일 새벽,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전날 밤, 산파를 부르러 가는 그의 외할머니를 경찰이 불러 세웠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다. 사정을 말하자 아이가 방정맞게 새해부터 나오려고 한다며 딸이면 팔자가 세겠다고 말했다. “당시엔 여자아이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방정스러운 거라고 생각했어요. 새벽에 태어나서 그런가 내가 밤을 잘 새워요. 하하하.” ‘신여성 문화’의 자장에 있던 어머니에게 그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혹 같은 존재’였다. 기혼 남성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떼내려고 온갖 방법을 썼지만 실패했다. 어릴 적 그는 이모, 할머니와 살았다. 잠시 아버지댁에 맡겨지기도 했는데, 어머니만 다른 형제 여럿과 간신히 끼니를 때웠다.

열여섯 살 되던 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 유일한 존재였다. 미혼모라는 사실을 숨긴 채 신문기자, 통역가로 일하던 어머니는 유엔에서 파견된 독일인과 결혼한 뒤 한국을 떠났다. “어렸을 때는 밉기도, 섭섭하기도 했죠. 왜 내가 태어났지 싶었고요. 나이가 드니까 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만 없었으면 새 인생을 설계할 수 있었을 거고 굉장히 미웠을 것 같아요.”

계부가 독일 본에 있는 간호학교 학생으로 그를 초청했다. 그는 김씨를 아내의 조카로 알았다. 독일에 간호사가 모자라 한국 간호사가 대거 독일로 취업할 당시였다. 1972년 9월 김씨가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그를 맞이한 건 한 수녀님이었다. 아침·저녁 미사를 보고 성당이 운영하는 간호학교 후보생으로 병원 실습을 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땅에서 외로웠던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돈을 모았다. 원장 수녀가 그에게 짐을 두고 가라고 권했다. 한국에 가서 생활해보고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돌아온 한국에서 다방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부잣집 외동아들이던 아버지 가문의 몰락을 목격했다. 다시 독일행을 선택했다. “수녀님도 그렇고 내가 실수하려고 할 때마다 주위에서 조언해주는 분들이 있었어요. 한국에 가보지 않았으면 계속 한국에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눈으로 보고 이건 아니다, 독일 가서 공부하자. 스스로 결정했고 실제로 열심히 했어요.”

ⓒYAJIMA Tsukasa나치의 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동성애자를 기리는 비 앞에서 김인선씨(왼쪽)와 이수현씨가 나란히 섰다.

간호사로 30여 년간 일했다. 독일은 전인 간호 시스템으로, 간병인 제도가 없고 간호사가 입원부터 퇴원까지 병원 생활 전반을 살핀다. 직원 모두 동등한 문화였다. 당시 독일 사회는 한국 간호사를 환대했다. “독일은 굉장히 개인적인 나라예요. 나이와 관계없이 자기 일은 각자 알아서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얘기하는 문화라 근본적으로 한국과 달라요. 그래서 한국 간호사들이 환영을 받았죠. 유교 문화권의 영향으로 노인한테 잘하고 말도 따뜻하게 했어요.”

동성 반려자와 함께한 지 30여 년

간호사로 일하며 한인 교회를 다닐 때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광부로 일하다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정식 직원이 된 사람이었다.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싶다는 김씨를 지지해주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게 많았다. 기독교 봉사단체 디아코니 안수를 받고 3년간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공부했다. 대학 신학부에 입학한 지 12년 만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일의 교육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한 셈이다. 라틴어를 비롯해 고전어인 히브리어도 배워야 했다. 도움이 됐지만 고되었다.

1985년, 한인 교회가 연합해 주최하는 여신도 수련회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가 직접 꺾었다는 꽃을 김씨에게 내밀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 김씨가 그의 병문안을 위해 베를린을 찾았다. 여자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 남편과 이혼 수속을 밟는 동안 주변의 한인들은 그에게 충고와 욕설을 했다. 그때 만난 이수현씨와 함께한 지 30년이 지났다.

평소 존경하던 신학부 교수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공부를 이어가기 힘들겠다고 말했다.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이, 그럼 어떤 사람이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더라고요. 모범이 되고 하자가 없는 사람이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하셨어요. 사랑하는 게 중요한 거지 여자든 남자든 중요하지 않다고요.” 독일은 시민결합 제도를 통해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치 시절, 많은 성소수자가 죽임을 당했지만 점차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국의 퀴어축제에 초대받았을 때 한국 사회에선 여전히 동성애가 ‘굉장히 문제시’된다는 걸 체감했다. 동성애자에게 축복을 내린 교회 목사가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건 보수도 뭣도 아니에요. 성서를 제대로 안 읽어서라고 생각해요. 독일에선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게 없어요. 여자 목사 둘이 결혼을 하는데 또 다른 여자 목사가 안수를 해주기도 하니까. 개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민주주의적 사고를 어릴 때부터 배우기 때문이에요. 한국도 감춰두기만 하지 말고 내놓고 이야기하는 장이 열려야 할 것 같아요. 상대방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 얘기를 진솔하게 하면 당당해질 수 있거든요. 한국에 60대 이상 레즈비언이 없다고 하는데, 독일에서 살다 간 분들 중에도 꽤 있어요.”

2001년 그는 호스피스를 접하게 된다. 지인이 가정방문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시작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존엄성을 지키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일이다. 몇 년 뒤 이수현씨의 노후자금과 김씨의 생명보험을 헐어 호스피스 단체 ‘동행’을 설립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인 중에 죽을 때가 되면 한국에 가서 묻히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요. 결혼도 독일에서 하고 자녀도 여기에 있지만 타국에서 죽는 게 비참하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한국식으로 장례를 해드리고 한국 가족과 연락을 취하기도 해요.” 독일에만 250여 개 국가의 이주민이 있다. 전혀 독일어를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이주민에게 호스피스 교육을 제공하고 죽음에 동행할 수 있도록 했다. 2009년부터는 ‘동반자’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단체를 처음 만들 때 한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구상하기도 했다. 비용과 여건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파독 간호사들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고생해 번 돈을 고국에 송금하고 노후에 이르러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한국에 돈을 많이 보냈는데 내 한 몸 누일 자리가 없는 거예요. 생전에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면 좋은데 그것도 어렵고 그나마 ‘동반자’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거나 점심을 했어요. 코로나 때문에 불가능하니 갈 데가 없죠. 외국에서 나이 들어 죽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독일은 건강보험에 가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제적 부담 없이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호스피스 전문가가 되려면 자원봉사자부터 시작해야 한다. 6~12개월 동안 130여 시간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필수로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도, 스스로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여긴다.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는 완전히 솔직하긴 어렵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할 수 있잖아요. 살면서 어떤 고통과 슬픔을 겪었는지 써내려가다 보면 상처가 아무는 것 같기도 해요. 걸리는 게 있으면 덜어내고 흘러갈 건 흘려보내고 정리해보는 시간이었죠.”

한국을 떠올리며 느끼는 슬픔과 흥미

죽음을 앞둔 사람은 대부분 삶에 매달린다. 김인선씨를 보고 한 달만, 일주일만 더 살고 싶다고 말한다.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숱하게 죽음을 목격한 그도 유방암, 자궁암을 차례로 겪었다. 수술과 항암치료가 ‘죽음의 골짜기’로 그를 몰았다. 오백 년을 살 것처럼 구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말년에 그의 곁에서 눈 감은 어머니의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 계부를 따라 세계 곳곳을 다녔던 어머니가 다시 거기에 닿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김씨도 비슷한 방식을 결심했다.

ⓒYAJIMA Tsukasa2005년 김인선씨는 독일 최초로 이주민을 위한 호스피스 단체 ‘동행’을 설립했다.

한국을 떠올리면 진한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문화가 주는 차이 때문에 흥미롭기도 하다. 50여 년 독일에서 산 그는 ‘독일이 나를 살렸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주로 독일에서 산 여자의 70년 인생에 왜 주목해야 할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겠지만 대부분 본인이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딸로 태어났어요. 아들이 중심이던 시절이고 딸은 살림밑천 정도였죠. (제 삶을 통해)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 자신이라고, 용기를 내라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인터뷰 내내 그의 곁에는 이수현씨가 있었다. 종종 그의 음성이 들렸다. 은퇴했지만 아직 할 일이 많다는 김씨에게 넌지시 ‘백세까지 살라’고도 했다. 이씨는 이번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원고를 수십 번은 읽었다는 그는 “의견이 다른 분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돌 하나를 물에 던지면 물결이 퍼지듯 미약한 힘이지만 (책을 통해) 지금보다는 성소수자에게 보내는 눈길이 자연스러워지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최근 두 사람의 가장 큰 기쁨은 한국 드라마 〈누가 뭐래도〉다. 시청률 20%가 넘는 가족드라마다. 김씨가 제목을 응용해 “누가 뭐래도 나는 나야”라며 화면이 들썩일 만큼 크게 웃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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