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들의 어이없는 굴착이 더욱 기승을 부리던 한 해였다. 작가가 ‘데스노트’를 작성하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갖은 구실을 대 극중 배역들을 죽이는 드라마(〈오로라 공주〉)와 며느리를 공개 오디션으로 뽑는 설정의 드라마(〈왕가네 식구들〉)가 시청률 수위를 기록했다.

한 출연자는 이렇게 말한다. “암세포도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 치료 안 받아요. 나 살자고 내 잘못으로 생긴 암세포들 죽이는 짓 안 할래요.” 동성애 캐릭터인 한 출연자는 108배로 동성애를 고쳤다며 또 이렇게 말한다. “절에서 108배를 하고 왔다. 절을 1만 번 넘게 하니 남자들이 눈에 안 들어오더라. 10만 배를 하니까 희한하게 여자들이 예뻐 보였다. 그제야 나도 온전한 남자구나 싶었다.”

막장 드라마는 더 강한 자극을 지향한다. 마치 얼마나 포악하게 소리 지를 수 있는지를 경쟁해 캐스팅된 듯한 주인공들은 드라마 속에서 쉴 새 없이 내지른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한 아침 드라마의 PD는 “우리는 주부가 설거지하고 청소하면서도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든다. 그러다 보니 자주 소리치지 않으면 시선이 안 온다. 신기하게도 소리를 지를수록 시청률이 올라간다”라고 말했다.
 

ⓒtvN 제공<응답하라 1994>(위)는 미니시리즈와 시트콤을 합한 드라마 형식이 독특하다.

막장 드라마들이 더 강한 자극으로 경쟁할 때 더 섬세한 자극을 추구해 각광받은 드라마가 있다. tvN의 〈응답하라 1994〉가 그렇다. 케이블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시청률은 10% 이내였지만 〈응답하라 1994〉는 가장 화제가 된 드라마로 꼽힌다. 특히 타깃 시청자 층인 20~40대에 미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응사’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드라마는 드라마 형식에서도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기존 미니시리즈와 시추에이션 코미디(시트콤)를 합친 형식이다. 빛을 발하는 것은 탄탄한 상황 설정과 캐릭터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다. 그리고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그 시절을 철저히 복원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꽃보다…’ 시리즈와 ‘응사’ 만든 이우정 작가의 힘

‘응사’가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우정 작가가 정통 드라마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예능 작가 출신으로 tvN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를 집필했다.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 작가는 요즘 대세라고 하는 ‘관찰 예능’에 능하다. 관찰 예능의 핵심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부각하고 캐릭터들 간의 갈등과 긴장을 포착해서 이를 중계하는 것이다. ‘응사’는 이 같은 관찰 예능의 흥행 공식을 효과적으로 대입한 드라마다. 이 작가는 자신이 익숙하고 잘하는 방향으로 시청자들의 관전 포인트를 끌고 왔다. 이 작가와 함께 〈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를 제작한 나영석 PD는 그녀를 “괴물 같은 작가이고, 늘 발전하는 작가다”라고 평가했다.

〈응답하라 1997〉에 이어 〈응답하라 1994〉를  성공시키고, 〈꽃보다 할배〉에 이어 〈꽃보다 누나〉까지 흥행시킨 이우정 작가로 인해 방송가 판도가 바뀌고 있다. tvN은 〈꽃보다 누나〉와 〈응답하라 1994〉를 금요일 밤에 연속으로 편성해 지상파와 정면 승부를 걸었다. 지상파 위주의 시청 패턴을 바꿔보겠다는 것인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광고료가 두 배 이상 수직 상승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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