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경남 밀양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그리고 이 전쟁의 최전선에 선 이들은 머리가 하얗게 센 ‘할매’ ‘할배’들이었다.
765kV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8년째 계속된 갈등이 올해 5월20일 한국전력의 공사 재개로 폭발했다. 대부분 60~70대인 밀양의 ‘할매’들은 전경과 한전 직원들 앞에서 알몸으로 저항했다.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포클레인에 묶기도 했다. 오물이 든 페트병에, 여차하면 목을 매기 위한 밧줄까지 등장했다. 결국 5월29일 공사가 잠정 중단됐다.
이후 구성된 전문가협의체가 40일간 대안을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협의체에 주민 추천으로 참여한 하승수 녹색당 공동위원장은, 전문가협의체 위원장이 베끼기와 대필 의혹으로 얼룩진 보고서 초안을 대충 편집해 독단으로 국회에 냈다고 지적했다(〈시사IN〉 제305호 “한전과 전문가들의 ‘베끼기 보고서’” 참조). 반대 대책위는 전문가협의체를 통해 기존 3개 선로를 통한 우회 송전이 가능하며, 밀양 구간 지중화 또한 5900억원 수준으로 가능하다는 게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전은 비용과 시간, 기술적 한계로 두 대안은 불가능하다는 종전 주장을 고수했다.
8월부터는 밀양시청이 공사를 추진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주민 개별 설득에 팔을 걷어붙였다. 송전탑 건설 찬성 주민들과 한전·밀양시·경남도청·산업부 직원 등 총 21명으로 구성된 ‘밀양송전탑 갈등해소 특별지원협의회’는 가구당 400만원 보상 등을 골자로 하는 보상안을 제시했다가 반발만 키웠다. 넉 달 뒤인 10월2일 한전이 공사를 재개하자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밀양시 4개 면(단장·산외·상동·부북면) 건설 현장 5곳에서 경찰과 주민의 충돌이 반복됐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철’에 시작된 공사에, 벼·깨·감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가을걷이도 제쳐두고 산에 올랐다.
‘시골 노인’이 최전선에 선 밀양의 싸움에, 시민들이 ‘탈핵 희망버스’로 응원을 보냈다. 편하게 전기를 쓰는 일상이 실은 누군가의 불편하고 불행한 일상을 딛고 가능했다는 인식이 퍼졌다.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그동안의 전기 생산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한진중공업·쌍용자동차 등 장기 농성 사업장을 방문하며 ‘지역’을 넘어 ‘환경’ ‘공존’으로 어젠다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제 또 다른 고유명사가 된 ‘밀양’은 2013년 한국 사회의 갈등관리 능력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정부가 비수도권 주민의 권익 침해를 얼마나 당연시해왔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법무부는 올해 9월 성남보호관찰소를 분당 서현역 인근으로 ‘기습 이전’했다가 학부모 등 지역주민의 반발에 부딪힌 지 불과 5일 만에 이전을 백지화한 바 있다.
누구나 예견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밀양’
갈등관리 실패는 ‘죽음의 행렬’로 이어졌다. 2012년 1월16일 송전탑 건설 공사에 반대하며 분신자살한 산외면 보라마을 주민 이치우씨(당시 74세) 이후 밀양은 또 다른 죽음을 겪었다. 상동면 고정마을 주민이던 유한숙씨(71)가 12월2일 음독한 뒤 나흘 만에 숨진 것이다. 일주일 뒤인 12월13일에는 단장면 동화전마을 주민 권 아무개씨(53)가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현재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다. 한국전력은 공사 재개 뒤 이미 송전탑 4개를 완공했다고 12월16일 밝혔다. 누구나 예견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밀양 주민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하는 이는 없다.
밀양 주민과 함께, ‘진짜 보수’를 자처하고 나선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초유의 편집국 폐쇄에 맞선 〈한국일보〉 기자 등도 사회 분야 올해의 인물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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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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