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초, “죽여버리겠다” “개XX야” 등 폭언과 욕설이 난무하는 전화통화 녹취록이 유튜브에 공개됐다. 남양유업 영업소장인 30대 남자가 50대 대리점주에게 제품을 더 받으라고 강요하다가 “창고가 꽉 차가지고…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자 폭언을 퍼부은 것이다. 본사가 대리점에 제품을 강압적으로 팔아치우는, 이른바 ‘밀어내기’가 음성 자료를 통해 끔찍한 맨얼굴을 드러낸 것이었다. 음성적으로 이뤄지던 ‘갑’질이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내자 비로소 남양유업이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대중적인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부 편의점 점주들은 입구나 진열대에 “우리 점포는 쓰레기 기업 남양의 유제품을 일절 발주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써 붙였다. 남양유업의 일부 제품은 2개월여 사이 50%까지 덜 팔렸고, 3분기 매출액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현저히 줄었다.

ⓒ시사IN 이명익지난 5월 남양유업 대리점주들이 제품을 바닥에 쏟고 있다.
일부 편의점 점주들이 남양유업 불매에 참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들 역시 대기업 앞에서 힘없는 ‘을’의 서러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16일,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CU(옛 훼미리마트) 점주인 김 아무개씨가 계약 해지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던 본사 직원 앞에서 수면제를 복용해 숨졌다. 김씨는 장사할수록 손해를 봐서 가맹 계약을 해지하고 싶었지만 수천만원 규모의 위약금을 요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올 들어 5월까지 편의점 점주가 4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4건 중 3건이 CU 계열 편의점에서 발생했다. 편의점 점주들은 CU 본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열고 적극적인 홍보 행위를 통해 CU 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끌어냈다.

이에 앞서 4월에는 포스코에너지 임원이 대한항공으로 미국까지 가는 내내 ‘밥이 삭았다’ ‘라면이 덜 익었다’며 트집을 잡다가 들고 있던 잡지로 승무원의 눈 주위를 때렸다. 비슷한 시기, 강태수 프라임베이커리 사장은 호텔 주차 문제로 옥신각신하다 지갑으로 호텔 지배인의 뺨을 때려 ‘빵 회장’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이처럼 ‘라면 상무’ ‘빵 회장’ ‘조폭 우유 영업사원’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을’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4~5월에 집중되었던 을들의 분노 표출이 불씨가 되어 올 한해 광장을 휩쓸었다.

종북몰이에 밀려 경제민주화 실종

5월 말에는, 레미콘 업체들이 KCC건설에 대해 집단으로 납품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KCC건설이 납품대금을 9%나 깎는 ‘후려치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CJ대한통운은 배송기사들에 대해 수수료 인하와 페널티 부과를 통보했다가 배송 거부에 밀려 포기했다. 지난 10월에는 욕설 녹취록이 또 하나 폭로됐다. 아모레퍼시픽 영업팀장이 대리점 점주에게 반말과 욕설로 영업 포기를 강요한 내용이었다. 대리점 점주들이 판촉 및 카운슬러 육성 등으로 영업망을 키워놓으면 판매원 빼가기와 유·무언의 압력으로 운영권을 빼앗는, 이른바 ‘대리점 쪼개기(강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후 대리점 점주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의 유력 후보들은 모두 경제민주화를 주장했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갑’이 ‘을’에게 불평등한 거래를 강요하고 괴롭히던 관행을 이제부터라도 중단시키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대선 이후 ‘종북’이 정치적 의제들을 독점하면서 경제민주화는 실종되고 말았다. 그러자 ‘현장’의 ‘을’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 보면 진짜 경제민주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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