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인물’은 매해 송년호를 제작하며 〈시사IN〉 편집국 기자들이 뽑는다. 지난 1년간 취재 현장을 누빈 기자들이 추천한 후보들을 놓고 분야별로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이 정국을 뜨겁게 달구면서 수사를 주도한 권은희·윤석열 두 사람이 올해의 인물로 꼽혔다. 을의 반란, 송전탑 반대 밀양 주민, 에드워드 스노든, 류현진 등은 분야별 올해의 인물로 꼽혔다.
정치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인물이 없는 가운데 최악의 인물로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꼽혔다. 〈시사IN〉 선정 올해의 인물은 국정원으로 시작해서 국정원으로 끝났다.

정치-없음
경제-을의 반란
사회-송전탑 반대 밀양 주민
문화-〈응답하라 1994〉
국제-에드워드 스노든
스포츠-류현진
최악의 인물-남재준
올해의 사진

〈시사IN〉 선정 올해의 인물에 만장일치로 권은희·윤석열, 두 사람이 꼽혔다. 두 사람은 올 한 해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수사했다. 청와대까지 주목한 사건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경찰과 검찰에서 제각기 원칙적으로 수사하려다 둘 다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둘에게는 ‘국민 경찰’ ‘국민 검사’라는 영광의 수식어가 새로 생겼다.

2012년 12월11일.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예정대로라면 연세대 법대 대학원에 있어야 했다. 이날 저녁에 석사 논문 심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저녁 6시40분 권 과장은 수서경찰서 선거상황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공무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불법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는 보고였다. 이 신고가 정국에 불러올 파장을 그때는 짐작조차 못했다.

권 과장은 저녁 7시37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선관위 직원 3명, 민주당 관계자 10명, 기자 등이 뒤엉켜 있었다. 오피스텔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김하영씨는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오면 노트북 등을 제출하겠다”라고 버텼다. 그사이 김씨는 밤 11시1분부터 43분까지 노트북에서 인터넷 방문 웹사이트 목록, 임시 인터넷 활동 기록 등을 모두 삭제했다.

권 과장은 먼저 김하영 직원의 휴대전화 명의를 확인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쓰는, 존재하지도 않은 사단법인이었다. 요금 청구 주소도 사서함으로 나왔다. 국정원 직원이라는 신분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권 과장은 오피스텔 CCTV도 확인했는데, 김씨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1시30분이나 2시 사이 차량을 이용해서 퇴근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외출해서 저녁 6~7시께 집에 왔다. 권 과장은 이광석 수서경찰서장에게 압수수색 영장 청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보고했다.

김용판, 법정에서 권 과장 얼굴 똑바로 못 봐

권 과장은 200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5년 7월, 9대1의 경쟁률을 뚫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경찰 경정에 특별 채용되었다. 변호사 출신 여성 경찰관 1호였다. 권 과장은 2006년 3월부터 1년간 경찰청 경무기획국 법무과에서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서울 마포경찰서, 서대문경찰서 등 6개 일선 경찰서에서 줄곧 수사과장을 맡았다. 이런 풍부한 수사 경험이 있었기에, 그녀는 강제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2012년 12월12일 오후 2시59분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으로부터 영장 신청을 하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다(김 전 청장은 재판에서 단순 격려 전화였다고 주장했다). 수사과장을 맡은 이래 지방청장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 신청이나 구체적 사건과 관련된 지시를 받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권 과장은 12월17일 수사 내용에 관한 중간발표 기자회견장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 위반까지 거론하며 서울경찰청에 항의해 증거물을 돌려받은 권 과장은, 이후 수사에 속도를 냈다.
 

ⓒ시사IN 이명익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위)은 변호사 출신 여성 경찰관 1호다. 6개 일선 경찰서에서 줄곧 수사과장을 맡았다.

돌아온 것은 전보 조치였다. 그녀는 수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지난 2월4일자로 송파경찰서로 전보되었다. 송파경찰서로 전보된 2월 초 기자가 찾았을 때 그녀는 귀띔을 했다. “3월에 서울청장이 일선 수사과장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자리가 있다. 그때 중간발표 과정 등 외압과 관련해 직접 김용판 청장에게 따질 작정이다.” 하지만 3월 중순 예정되었던 보고가 취소되었고 김 청장이 물러났다. 그녀는 4월13일 경찰수사 발표 다음 날 언론에 외압을 폭로했다. 지난 8월19일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 출석에 이어 8월30일 김용판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서도, 그녀는 일관되게 외압을 증언했다. 그녀가 법정 증언을 할 때, 피고인석에 앉은 김용판 전 청장은 한 번도 권 과장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김 전 청장은 의도적으로 바닥만 보며 눈길을 피했다.

현재 권 과장의 송파경찰서 집무실 입구에는 손으로 접은 하트 모양의 종이꽃이 놓여 있다. “꽃보다 아름다운 권은희 과장님, 고맙고 존경합니다”라는 메모가 곁들여져 있었다. 지난여름과 가을, 익명의 시민들이 격려를 하며 준 선물 중 하나다. 최근 제1회 리영희상을 받으면서 함께 받은 꽃다발도 창가에 놓여 있었다. 국정원 사건 와중에도 석사 과정을 마친 그녀는 박사 과정에 입학해 주경야독을 이어가고 있다. 국정원 사건을 거치면서,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바뀌었다. 형법 관련 주제에서 사이버 증거분석 능력 쪽으로 주제를 바꿔 논문을 쓸 작정이다.

경찰에 권 과장이 있었다면, 검찰에는 윤석열 여주지청장이 있었다. 권 과장의 검찰 수사 때 담당 검사가 달라, 둘은 지난 8월30일 법정에서 처음 만났다. 검사석에 앉은 윤석열 검사가 질문을 하고 증인석에 앉은 권 과장이 답변을 했다. 윤 검사는 권 과장에게 서울경찰청이 증거분석물을 돌려주지 않은 이유를 집요하게 물었다. 권 과장은 12월19일 기자와 만나 “수사해본 사람들만 아는데, 수사 과정과 관련해 문제 제기하는 것이 왜 정당한지를 알고 질문한 것이고, 나도 그 의미를 알고 답변했다. 그때 윤 팀장을 처음 보고 ‘이분 정말 수사 잘하시는 분이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권 과장은 “그런데 정직 1개월 징계를 꼭 내려야 하나? 검찰의 자원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2월18일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법무부로부터 정직 1개월 징계를 받았다. 윤 지청장은 이날 남기춘 변호사,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특별 변호인 2명과 함께 징계위원회에 출석했다. 윤 지청장은 “(국정원 직원) 체포영장을 청구하지 말라는 지시는 위법하고 부당한 명령이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징계 사유가 아니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보수주의자가 한순간에 ‘종북 검사’로

하지만 법무부는 일부 민간위원이 반발하는 가운데 윤 지청장에게 정직 1개월을, 박형철 부팀장에게 감봉 1개월 징계를 내렸다. 윤 지청장은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소신 발언을 할 때부터 부당한 징계가 내려지면 옷을 벗지 않고 행정소송을 내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반 공무원은 징계 처분을 안 날부터 30일 안에 소청심사위원회에 심사를 청구할 수 있지만, 검사 징계법에는 불복 절차가 따로 없어서 행정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윤 지청장은 12월20일 기자에게 “제소 기간이 충분하니, 결정문을 받아보고 (행정소송 여부를) 검토해보겠다”라고 밝혔다.

윤석열 지청장은 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대 79학번인데 사법고시는 1991년(23기)에 붙었다. 징계위에 특별 변호인으로 나선 남기춘 변호사는 절친한 대학 동기다. 남 변호사는, 만 23세였던 1983년에 동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사법시험(15기)에 합격했다. 윤 지청장의 대학 동기들은 검찰의 꽃이라는 검사장을 달았지만, 그는 아직 검사장 승진 대상이 아니다.
 

ⓒ시사IN 이명익윤석열 여주지청장(위)은 늦깎이로 검사가 됐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국정원 사건 특별수사팀의 구원투수로 발탁했다.

그래서 10월21일 국감장에서 묘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국정감사가 끝날 무렵,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이 배석한 검사장 8명에게 윤 지청장의 행위가 적법한지 질문을 던졌다. 지난 8월 국정원 댓글 의혹을 다룬 국정조사장에서 권은희 수사과장을 두고, 나머지 경찰들에게 묻는 방식이 되풀이된 것이다. 검사장들은 모두 잘못됐다는 답변을 했다. 이 가운데 최근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김수남 당시 수원지검장(16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 지검장 역시 윤 지청장의 대학 동기다.

늦게 검사로 임관했지만, 그는 특수통 계보를 이으며 굵직한 수사를 전담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까지 올랐고, 지난 4월18일자로 여주지청장으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채동욱 검찰총장은 같은 날 그를 국정원 사건 특별수사팀의 구원투수로 등판시켰다. 6월19일자로 완성되는 대통령 선거 관련 공소시효를 두 달 앞두고 특급 소방수를 투입한 것이다. 그를 투입하기 전 채 총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직접 나선 것이고, 검찰이 수사를 하다 보면 현 정권의 리지터머시(정통성)를 건드릴 수 있다”라고 예고한 바 있다.

채 총장의 예감은 적중했다. 윤 지청장은 특유의 ‘표범이 사슴을 낚아채듯’ 수사를 밀어붙였다. 서로 기질이 다른 공안통과 특수통이 수사팀에 섞였지만 수사팀 안에서는 이견이 없을 만큼 팀원들도 윤 지청장을 따랐다. 그의 ‘원칙’은 권은희 과장이 그랬듯이 법무부, 검찰 수뇌부와 갈등을 빚었다. 특히 ‘리지터머시(정통성)’를 건드린 점은 청와대와 여당까지 불편하게 했다. 검찰 안에서도 유명한 보수주의자인 윤 지청장은 한순간에 ‘종북 검사’로 몰렸다. 그가 총대를 메면서 73개 댓글로 시작한 국정원 사건은 이제 121만 건 트위터까지 확대되어 선고를 눈앞에 두고 있다.

권은희·윤석열.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면 진보나 보수 같은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기에는 무리다. 이들이 속한 조직 안에서의 평가부터가 그렇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윤석열 지청장의 말처럼, 이들은 원칙과 자신이 속한 조직에 충실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답변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돌아왔다. ‘어떤 내용이든 지금은 인터뷰를 사양하고 싶다(권은희)’ ‘언론에 입을 여는 것은 수사의 공정성과 재판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윤석열)’.

권은희·윤석열 두 사람 외에도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밝혀내는 데 크게 기여한 이들이 있다. ‘오늘의 유머’ 사이트 운영자 이호철씨는 국정원 사건을 세상에 알린 숨은 주인공이다. 김하영씨 등 국정원 직원이 활동한 내역을 자체 분석해 수사기관에 넘기는 등 사건 초기부터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또 국정원이 ‘오늘의 유머’ 사이트를 종북 사이트로 지목하자, 언론에 김하영 직원이 쓴 댓글을 제공하며 처음으로 불씨를 지핀 주역이다. 김하영 직원은 그를 개인정보법 위반으로 고발했고, 이호철씨는 업무방해 혐의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직접 고소하기도 했다.

‘오유’ 운영자, 진선미 의원 등도 큰 활약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원세훈 원장의 ‘지시 강조 말씀’, 국정원 내부 문건 등을 잇달아 공개하며 불씨를 이어간 주인공이다. 초선 의원이지만 진 의원은 올 한 해 ‘국정원 킬러’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국정원 사건의 불똥은 국방부 사이버사령부로 튀었다. 안규백·진성준·김광진 의원 등 민주당 국방위 소속 의원의 활약도 돋보였다. 국방부는 12월19일 사이버사령부 소속 이 아무개 심리전단장 등 11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시사IN〉이 김광진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이 단장의 녹취록을 보면, 이 단장(군무원 3급)은 “올해 말에 퇴직이다. 군 생활 42년을 했고, 제가 무슨 덕을 보자고 대선에 개입했겠나”라고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이 단장은 “업무와 관련해서 청와대에 상황 보고가 들어간다 당연히. 망(시스템)으로 들어간다”라고 밝혔다. 심리전단장 윗선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선고가 2014년 2월 정도로 예정되어 있어, 국정원 사건의 불씨는 새해에도 꺼지지 않을 전망이다.

기자명 고제규·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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