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어게인’ ‘부정선거 사형’ 따위 구호가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지난 8월22일 충북 청주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현장. ‘5명만 인터뷰하고 가자’고 속으로 되뇌던 중이었다. 그때 붉은 티셔츠를 입은 한 70대 남성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쿠데타는 진짜 잘못했지. 있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어.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이태원 참사나 해병대원 (수사 외압) 사건은 정말 잘못했다고 봐.” 경북에서 온 그는 윤석열을 향해 “정치할 자격이 없다”라고 비난하면서도, 탄핵에 반대한 김문수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민주당을 지지할 수는 없지 않겠나.” 10분 남짓한 대화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직접 만나 대화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걸까? 요 몇 달 정치 기사를 쓰며 낙관과 비관 사이를 헤맸다. 정치적 분열이 극심해진 탓이다. 바닥난 인류애 속에서도 사실은 사람 이야기가 궁금했다. 직접 만난 ‘군중 속의 얼굴’이 단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감정사회학자가 쓴 〈도둑맞은 자부심〉은 그런 갈증을 해결해주는 책이다. “우파에게는 우파의 깊은 이야기, 좌파에게는 좌파의 깊은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저자가 백인 비율이 가장 높고 두 번째로 가난한 선거구, 2020년 대선에서 주민 80%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했던 곳에서 7년간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들의 상실감과 수치심이 어떻게 우파 정치인들의 ‘땔감’이 되었는지 과정을 면밀히 추적해낸다.

자칫 인종차별 문제를 감추거나 극단주의자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건 아닐까? 분열의 시대를 치유하는 첫 번째 방법은 ‘잊혀진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봐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느 정당도 백인과 흑인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빈곤의 고통을 말하지 않았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흔들리는 배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란 걸, 경청의 윤리로 보여준다. 글의 말미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식사하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다. 상상만 해도 불편할 그 대화가 왜 나는 자꾸 궁금해질까?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와 대화하기가 어려워지는 시대, 그럴수록 ‘선을 넘는’ 어떤 용기에 주목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용기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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