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붙들고 있었던 767쪽 분량의 ‘벽돌책’이다. 참을성이 갈수록 줄어드는 숏폼 시대에 찰나보다는 살아가고 얽히고 변화하는 총체성을 긴 호흡으로 느끼고 싶었다. ‘밀레니얼 세대’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역사학자가 역사의 순환론을 들려준다. 역사를 패턴의 반복으로 해석하면 중요한 우연과 예외를 간과하게 되지만 때로는 의미 있는 좌표를 찍어주기도 한다.작가는 지난 500~600년간 인류는 20~25년 주기로 전환기를 맞았다고 했다. 마치 사계절처럼 ‘고조기-성장기-해체기-위기’로 구성된 4개의 전환기가 80~100년 주기로 끊임없이
‘왜 어떤 조직은 성장하나.’ 일을 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고민이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저자들의 경제사 책을 읽다 엉뚱하게도 이 질문이 떠올랐다. ‘조직’의 자리에 ‘국가’를 넣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왜 어떤 국가는 성장하나.’ 그러니까 왜 어떤 국가는 잘살고, 어떤 국가는 못살까. 불평등 요인 찾기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과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또한 이에 천착한 연구 결과를 쉽게 풀어쓴 대중서다. 저자들은 핵심 변수로 제도, 즉 정치라는 가설을 내세운다.가장 직관적 사례를 제시하
12년 전 주짓수 도장에 들어섰던 날이 기억난다. 눈이 내렸다. 바닥에 깔린 매트는 차가웠지만 한쪽 벽면을 덮은 거울은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열기로 뿌옜다. 매일 흰 띠를 매면서 천하무적을 꿈꿨다. ‘흰 띠를 매면서 나는 천하무적을 꿈꿨다’는 이 문장을 쓰면서도 새삼 웃음이 난다.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보고 그들의 기술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가끔 잠들기 전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나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이 얼마인지 슬그머니 검색해보기도 했다. 언젠가 그 비행기에 타고 말리라 생각하며.시간이 지날수록 ‘천하무적’의 의미는 달라졌
‘윤 어게인’ ‘부정선거 사형’ 따위 구호가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지난 8월22일 충북 청주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현장. ‘5명만 인터뷰하고 가자’고 속으로 되뇌던 중이었다. 그때 붉은 티셔츠를 입은 한 70대 남성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쿠데타는 진짜 잘못했지. 있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어.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이태원 참사나 해병대원 (수사 외압) 사건은 정말 잘못했다고 봐.” 경북에서 온 그는 윤석열을 향해 “정치할 자격이 없다”라고 비난하면서도, 탄핵에 반대한 김문수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우리
‘삶을 살아내는 방식으로서의 철학’이라는 해석을 통해 서양 고대 철학의 전모를 탐구한 책이다. 고대 철학으로부터 철학이 시작된 만큼,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 책은 필연적으로 ‘철학이란 본래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문장을 인용한다. “우리 시대에는 철학 선생들만 있고 철학자는 없다.” 철학 선생과 철학자를 나누는 가르마는 바로 실천이다.저자는 말한다. “나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고대에도 철학은 이론적이며 ‘개념화하는’ 활동이었음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정치학자 박상훈이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다룬 이 책은, 제목처럼 ‘한국 사회의 시간 감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재독 학자의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독일의 한국학 연구소 소속인 그는 동료 독일인 연구자들과 한국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중 다소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독일인 교수들은 숙소 예약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1년 전에 확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재독 한인 학자는 한국에서 1년은 ‘어떤 일이라도 가능한 시간’이기에 확정은 한두 달 전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다이내믹 코리아’는
경험이 쌓이면,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쯤은 쉬울 줄 알았다. 애석하게도 게으름은 나이를 먹는다고 줄어들지 않았고, 나쁜 습관을 고치는 건 점점 어려워졌다. 특히 쇼츠로 출퇴근 시간을 버틴 이후로는 머릿속에 어딘가 나사가 풀려 덜그럭대는 느낌이 들었다. 몰려드는 허무함에 몸은 축 늘어졌고, 정서적인 에너지는 고갈되었다.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즈음 이 책을 펼쳤다. 낭만적인 제목과 달리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생활’이다. 저자가 말하는 ‘지적 생활’은 거창하지 않다. 위대한 현인의 뛰어난 학문적 성취나 예술가
달리기는 개인적인 일이다. 누구도 대신 달려줄 수 없기에, ‘달린다’는 경험은 누군가의 내면에 보이지 않는 차이를 만들어낼 뿐이기에, 그 변화를 모르는 이들은 종종 달리는 사람에게 묻는다. “대체 왜 달리는 거야?”라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때로는 너무 많은 말이 가능하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필요치 않다.하지만 어떤 달리기는 혼자가 아니다. 예컨대 ‘하코네 역전 경주’가 그렇다. 도쿄 오테마치 거리에서 시작해 해발 870m에 이르는 하코네산을 오르내려 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는 200㎞ 장거리 경주. 1월2~3일
668쪽짜리 두꺼운 의학 역사책을 읽으며 울고 웃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의학이 발견한 것은 병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라는 책 소개 글처럼, 의학이 궁금해서 읽었지만 결국 책에서 읽어낸 것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저자는 현대의학이 만난 결정적 순간과 쇠락기를 오직 팩트라는 근거로 촘촘하고도 아름답게 풀어낸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돼 있지만, 내용은 크게 번영, 쇠퇴, 나아갈 길이라는 세 부문으로 나뉜다. 1부의 12가지 장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의학의 급격한 번영기를 압축해 설명한다. 현대 치료 혁명의 두 축인 페니실린과 코
8월31일 저녁 7시. 경남 진주에서 사회적경제 일을 하는 정원각 전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사무국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놀라지 말라고. 김현대 선배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동안 멍했다.2011년 6월, 세 사람이 함께 유럽 협동조합을 취재했다. 2012년 유엔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를 맞아 협동조합을 제대로 소개해보자는 기획이었다. 김현대 선배가 〈한겨레〉 전략기획실장 때 만난 적이 있었는데, 취재기자로 복귀해 농업·농촌 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9박10일 동안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2030 남성은 극우화되었는가.’ 지난 대선 직후 실시한 〈시사IN〉·한국리서치 웹조사에서 풀고 싶던 질문 중 하나다. 이 조사 데이터를 김창환 미국 캔자스 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분석한 결과, 전체 국민의 6.3%가 극우인 가운데 20대 남성의 15.7%, 30대 남성의 16%가 극우로 추정되며 서울 거주 경제적 상층일수록 극우 청년일 확률이 높았다. 반면 국승민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20대 남성이 보수적인 건 맞지만, 극우화되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고 봤다.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왜 다른 결론이 나왔을까? ‘극우
‘다이어트 약’의 운명은 대체로 이렇다. 처음에는 ‘마법의 약’으로 각광받다가 비만 그 자체보다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되고 매대 위에서 사라진다. 그러니 역시 시도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리면 좋겠지만 새로운 마법은 계속해서 탄생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비만 전문가들이 ‘이번만은 다르다’고 했다. 안전한 비만치료제가 나왔다는 것. 위고비, 삭센다, 오젬픽 이야기다.비만치료제 ‘위고비’가 국내에 출시된 지 8개월 만에 40만 건 가까이 처방됐다. ‘무작정 신약을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책을 찾는다면 잘못 골랐다’는 말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름 수학을 꽤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분에 대학 입시에서도 아주 나쁘지 않은 점수를 냈다. 그러나 공부하는 내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이런 걸, 왜 공부해야 하지?” 수학이란 학문의 유용성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던 탓이다.수학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시작된 ‘〈시사IN〉 인공지능 콘퍼런스(SAIC)’의 기획과 기사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부터 막막했다. 도무지 취재 대상(인공지능)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초보자를 위한’ ‘멍청이(dummies)를 위한’ 같은 문구가 붙은 AI(
61년 만에 검찰이 써 내려간 사과문이자 반성문이었다. 7월23일 검찰은 피고인석에 앉은 최말자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검찰의 역할은 범죄 피해자를 범죄사실 자체로부터는 물론이고 사회적 편견과 2차 가해로부터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 사건에서 검찰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했다. 그 결과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깊이 사죄드린다.”그러고는 무죄를 구형했다. “1964년 5월6일 발생한 이 사건은 갑자기 가해진 성
2019년 11월 생애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굴기’의 현장이 아니라 농촌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급격히 쇠락하는 중국의 농촌에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반향청년(返鄕靑年)’으로 불리는 1980년대생 젊은 세대가 새로운 귀농귀촌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성장한 이들 청년은 환경오염과 빈곤 속에 몰락하는 고향의 현실에 충격을 받고, 생태농업과 도농 교류를 바탕으로 ‘신향촌건설운동’을 이끌고 있었다.귀국한 지 엿새 만에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반중 정서
“상장 이후 25년간 주가가 3000배 넘게 상승한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제치고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올라선 기업.” 놀라운 두 타이틀을 거머쥔 기업은 바로 엔비디아다. 기업의 몸집에 비해 브랜드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다. CEO가 가죽 재킷을 입은 동양인이라는 인상만 남아 있을 뿐, 엔비디아가 도대체 어느새 이토록 빠르게 성장했는지 그 과정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2025년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의 첫 번째 공식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뉴요커〉 출신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스티븐 위트가 펜을 쥐었다. 작가는 3
이제 전광훈은 ‘현상’이다. 그는 특정 교회에 다니는 이들을 넘어, 어떤 반사회적 종교 집단 전반을 아우른다. 목사이자 종교학자인 저자는 이 현상의 기원을 탐구했다. 그는 전광훈과 그 아류 몇몇을 솎아낸다고 교계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뿌리 깊은 모순이 한국 개신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 근본주의와 정치적 극우의 결합, 그리고 그에 따른 악순환이다.한국 개신교는 미국에서 왔다. 이 과정에서 근본주의 신앙관이 전래됐다. 성경에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는 성서무오설은 근본주의의 대표적 원칙이다. 학자들은
“대면 소통, 손 글씨, 심지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까지 기술에 의해 매개되면서 우리는 실제 경험으로부터 멀어진다. 책은 디지털 기술 발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챗지피티가 쓴 글의 일부다. 책 제목과 저자의 이름을 입력하고 리뷰해달라 했더니, 1초 만에 A4 용지 한 쪽 분량의 글을 써줬다. 나는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기자의 추천 책’ 원고 하나를 만들어냈다.최근 서울에 놀러 온다는 취재원이 맛집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동안 식당에 들어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
앳된 여자아이가 하얀 솜먼지가 폴폴 날리는 기계 사이를 오간다. 실을 만들고(방적), 그 실로 천을 만드는(직포) 방직공장에서 일을 하고 나면 하얀 솜이 머리 위에 내려앉아 누구나 할머니가 됐다. 한 사람이 기계 28대를 담당했다. 기계에 연결된 실이 엉키지 않게 살피고, 끊긴 실이 있으면 재빨리 다시 잇는다. 1분에 140보씩 움직여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밥 먹을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8시간을 일했다. ‘오빠와 가족들을 위해’ 대도시로 올라온 여성들은 ‘꿈의 직장’이라 불리던 동일방직주식회사(동일방직)의 현실을 취업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이 2년간 지속되고 있다. 공습과 봉쇄, 잠깐의 휴전 논의, 또다시 공습이 반복되는 이곳에 평화적 해법이 가능할지 묻게 된다. 서구 언론은 이번 전쟁의 시작을 ‘2023년 10월7일(하마스의 기습 공격)’로 보지만 팔레스타인 비극의 연원은 훨씬 더 오래되었다. 이스라엘 강제 점령의 역사는 1967년부터 시작됐다. 2023년 10월7일 이후 이스라엘은 전례 없는 무차별 폭격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건 전쟁이 아니라 집단학살”이라고 호소하고 있다.이스라엘의 전쟁범죄, 서구 언론의 편향적 보도를 비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