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2일 열린 유로 2020 조별 예선 스위스 대 웨일스의 경기에서 축구선수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무릎을 꿇고 있다. ⓒAFP PHOTO

6월12일 열린 유로 2020 조별 예선 스위스 대 웨일스 경기. 양 팀 선수들이 나란히 서서 국가를 부른 뒤 응원 함성을 받으며 각자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보통 때라면 즉시 공이 구르며 경기가 시작됐겠지만 이날은 달랐다. 심판을 포함해 모든 선수가 경기장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위스 공격수 샤키리는 그 자세에서 오른손 주먹을 쥐고 어깨 높이로 치켜들었다. 해설자가 말했다. “선수들이 무릎을 꿇었네요. 인종차별 반대 퍼포먼스죠.” 5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다시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자 선수들이 일어나 경기를 시작했다.

축구선수들이 경기 직전에 무릎을 꿇기 시작한 건 2020년 6월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다. 코로나19로 몇 달 동안 경기가 중단됐다가 무관중으로 다시 열린 직후다. 당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M)’ 시위가 미국과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프리미어 리그에 속한 20개 축구팀 주장들이 화상회의를 하던 중 왓포드 FC의 주장인 트로이 디니가 축구계에서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고, 다른 주장들이 모두 동의했다. 유니폼 뒷면에 선수 이름 대신 ‘Black Lives Matter’라 새기고 반인종주의 배지를 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무릎 꿇는 퍼포먼스를 하자는 의견은 데이비드 맥골드릭 선수(셰필드 유나이티드 FC)가 냈다. 2016년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들이 인종차별에 항의해 무릎을 꿇던 걸 따라하자는 거였다. 무슨 의미인지 관중이 궁금해할 것이고 해설자들은 설명을 할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인종차별 이슈가 환기될 거라는 이유였다.

무릎 꿇기 퍼포먼스는 1년 동안 이어져 유로 2020까지 왔다. 모든 팀이 동참하는 건 아니다. 잉글랜드 팀이 주도하고 다른 팀들은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공식적으로 이 퍼포먼스를 지지한다고 밝혔으나 비난도 없지 않다. 스위스와 웨일스 선수들이 무릎을 꿇었을 때도 관중석에서 일부 야유가 터져 나왔다. 축구경기를 정치 이슈로 물들이고 선수와 팬을 갈라놓는다는 거다. 무릎 꿇기를 처음 했던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윌프리드 자하 선수(크리스털 팰리스 FC)는 “이건 그냥 습관처럼 돼버렸다”라며 올해 3월 열렸던 경기에서 무릎 꿇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실질적 의미가 없다는 항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티셔츠나 배지, 제스처가 아니라 액션이다”(퀸스파크 레인저스 팀의 레스 퍼디난드 단장)라는 의견도 있었다.

“내셔널리즘 점철된 국가” 부를 수 없다

퍼포먼스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유럽 축구에서 인종차별은 뜨거운 감자다. 국가대표팀, 프로팀 할 것 없이 유럽 축구팀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선수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인종뿐 아니라 국가·민족·출신 지역 등 모든 게 갈등의 원인이 된다. 6월13일 열린 유로 2020 조별 리그 오스트리아 대 북마케도니아 경기에서 일어난 일을 보자. 오스트리아 선수인 아르나우토비치가 후반에 골을 넣은 뒤 세리머니를 하면서 북마케도니아 선수인 베이툴라이, 알리오스키에게 “너희들의 알바니아인 엄마 ×××”라고 비속어를 섞어 소리쳤다. 오스트리아팀 주장 알라바가 그 말을 듣고 아르나우토비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걸 이해하려면 선수들의 윗세대로 올라가야 한다. 아르나우토비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세르비아인이다. 그가 모욕한 북마케도니아 선수들은 알바니아계다. 세르비아와 알바니아는 코소보 독립 문제 등을 둘러싸고 첨예한 외교 갈등을 빚고 있다. 그것이 2세대들이 뛰는 축구장에서 표출된 것이다. 아르나우토비치는 경기 후 소셜미디어에 사과문을 올렸고, 현재 UEFA 윤리 및 징계 심사관이 이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축구선수 카림 벤제마. ⓒAFP PHOTO

한국과 일본 간 역사적·정치적 갈등이 축구 한일전 같은 스포츠 경기에까지 이어지는 걸 떠올리면 이 정도 갈등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국가 대항 스포츠라는 게 가상의 전쟁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럽 축구에서 갈등은 한 팀 안에서도 일어난다. 워낙 다문화 사회이다 보니 같은 국가대표팀 소속이라도 언어·종교·문화 등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國歌) 부르는 것을 둘러싼 논쟁이다. 프랑스 축구선수인 카림 벤제마는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프랑스인인 것이 자랑스럽지만 내셔널리즘으로 점철된 국가는 좋아하지 않는다” “라마르세예즈를 부른다고 내가 해트트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프랑스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Le Front National)은 알제리 출신 이민 3세대이며 무슬림인 벤제마가 프랑스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며 그를 국가대표팀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벤제마는 팀 동료 발뷔에나에게 성관계 동영상을 공개한다고 협박한 혐의로 기소된 뒤 2015년 대표팀에서 퇴출당했다. 그러다 지난 5월 유로 2020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호출됐다. 국가를 부르지 않는 벤제마가 국가대표팀 자격이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도 재점화됐다. 때마침 프랑스 축구계의 원로 격인 미셸 플라티니가 2021년 5월 한 인터뷰에서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플라티니는 현역 시절에 세계 정상급 선수였고 전 UEFA 회장을 지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세대는 축구경기 전 라마르세예즈를 안 불렀다. 그 전통은 1990년대에 시작됐을 거다. 그와 함께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 선수들에 대한 비난이 생겨났다. 흑인은 국가 안 부르니 프랑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피부색과 애국심을 연결 지었다. 그건 틀린 말이다. 예전에 대표팀에서 국가 안 부르는 선수들 중엔 나를 포함해 백인도 많았다. 왜 안 불렀냐고? 내 생각에 그건 전쟁에 대한 찬가다. 우리는 전쟁터에 나가는 게 아니라 축구를 했다.” 참고로 라마르세예즈 가사는 이런 식이다.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 대오를 형성하라!/ 진격하라!/ 저 더러운 피로/ 우리의 밭에 물을 대자!”

다양한 인종·종교·문화적 배경을 지닌 선수들이 뒤섞여 같은 규칙하에서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함께 뛰는 걸 보면 축구장이 다문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의문이 생긴다. 비슷한 배경을 가진 선수들만으로 이뤄진 축구팀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선수들로 이뤄진 축구팀은 무엇이 다를까. 어느 팀이 축구를 더 잘할까. 찾아보니 이미 많은 연구가 나와 있다. 천문학적 단위의 돈이 오가는 프로 스포츠에서 선수 구성이 팀 성과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연구를 하는 건 당연하다. 초기에는 선수들의 다양한 배경이 팀에 비교적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주로 나왔다. 나라마다 축구 교육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다른데, 그런 다양한 강점을 지닌 선수들이 한데 모이니 종합적 스킬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규율과 힘을 강조하는 독일 출신 선수, 전술을 우선시하는 이탈리아 출신 선수, 테크닉을 내세우는 브라질 출신 선수가 모이면 시너지 효과가 날 법도 하다. 1998년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팀의 절반 정도가 이민자 부모를 둔 선수였다는 점은 이 같은 가설과 연구 결과를 뒷받침했다.

다문화적 특성이 축구팀의 성과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는 좀 더 나중에 등장한다.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의 연구자들이 유럽 5대 축구 리그(잉글랜드·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의 클럽 98개, 선수 2483명을 대상으로 전례 없는 대규모 연구를 진행해 2014년 ‘다문화 프로 축구팀-문화적 다양성, 이종문화 경험, 그리고 팀 성과’라는 논문을 내놓았다. 결과는 팀의 문화적 다양성과 감독의 외국 경험이 팀의 축구 성적에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한 팀 내에서 같은 언어·종교를 가진 선수들끼리 따로 뭉쳐 하위 그룹을 형성했고, 이게 팀 전체의 단합을 방해하는 현상이 관찰됐다. 예를 들어 독일 베를린의 축구 구단 헤르타 BSC에서는 이민 가정 출신의 젊은 선수들이 그룹을 만들었는데, 자기들을 다른 팀원과 차별화하기 위해 비밀 언어를 만들어내 쓰기도 했다. 다양성이 소통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소통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외국 경험이 많은 감독이 팀 성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도 나왔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축구 스타일을 경험한 감독들이 이것들을 조합해 더 강한 스킬을 만들어내려 했지만 그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5월11일 레반테와의 경기에서 첫 골을 넣은 바르셀로나 FC의 리오넬 메시(왼쪽에서 세 번째). ⓒAP Photo

그렇다면 축구팀에서 외국인들을 다 빼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이 논문 저자들은 다문화 안에서도 문화적 균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문화라 해도 각각의 ‘문화적 거리’는 다르다. 예를 들어 독일과 스위스의 문화적 거리는 아주 가깝지만, 독일과 일본의 문화적 거리는 멀다. 외국인이라 해도 서로 간의 문화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갈등이 생길 여지는 줄어든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일하는 외국인 감독들을 보면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웨일스 출신들이 많다(아스널·첼시·맨체스터시티 등은 예외적으로 로망스어권 국가에서 감독을 뽑는 전통이 있다). 스페인 리그의 외국인 감독들은 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 등 같은 스페인어권 출신이거나, 언어가 달라도 문화적으로 가까운 포르투갈 출신인 경우가 많다. 독일 역시 같은 언어권인 스위스 또는 문화적으로 유사한 네덜란드 출신 감독을 선호한다. 선수와 감독 사이에 언어적·문화적 거리가 좁을 때 소통이 더 잘되고 갈등이 생겨도 중재하는 게 쉬워지기 때문이다.

다문화는 단지 맞닥뜨린 조건일 뿐

세계 최고 수준인 스페인 축구팀 바르셀로나 FC는 지난 10년 동안 외국인 선수를 주로 스페인어권에서 데려왔다. 어릴 때 재능을 보이는 선수는 아예 팀 내의 유소년 아카데미를 통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해 키워낸다. 리오넬 메시가 그런 경우다. 유소년 아카데미는 축구만 가르치는 게 아니다. 선수가 팀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게 더 큰 목적일 것이다. 팀의 문화적 균질성이 결국 축구 성적으로 이어진다는, 경험에서 나온 선택이다.

다문화 자체는 좋고 나쁜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앞에 맞닥뜨린 조건일 뿐이다. 기계적으로 다양한 조건을 만드는 데만 치중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충성을 강요하며 국가 제창 따위를 강요하면 역효과가 난다. 다문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해 강점을 살릴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이미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온 유럽 축구팀에서 배울 부분이 있지 않을까.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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