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조력자살금지법에 예외를 적용해달라는 노엘 콘웨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런던에 모였다. ⓒReuter

올해 초 이 지면에 여러 나라의 안락사 제도와 스위스의 조력 자살 제도, 그리고 완화치료 환경에 대해 쓴 적이 있다(〈시사IN〉 제702호 “‘좋은 죽음’인가 ‘좋은 삶의 실패’인가” 참조). 안락사나 조력 자살은 주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게 하는 진보적인 제도로 평가되지만, 다르게 보면 불치병 등 절망적인 환경에 놓인 사람을 마지막까지 돕는 완화치료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안락사나 조력 자살로 내몰리는 면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 글이었다.글을 쓸 당시 스위스의 조력 자살 통계를 찾아보면서 낯선 부분을 발견했다. 조력 자살을 택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는 점이다. 한두 해가 아니라 조력 자살 통계가 나온 이래 쭉 일관적인 경향이었다. 이게 왜 낯설었냐면, 조력 자살이 아닌 일반 자살에선 남성 자살자가 여성보다 3배쯤 더 많기 때문이다. 일반 자살은 남성이 더 많은데 조력 자살은 여성이 더 많은 특이한 경향은 스위스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조력 자살이 합법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 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정확한 수치를 보자. 최근 5년 동안 스위스의 일반 자살과 조력 자살 건수를 성별로 비교하면 아래 〈그림 1〉과 같다.

어떤 점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우선 참고해볼 수 있는 것은 자살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스위스 정부는 2010~2014년 일어난 일반 자살의 방식을 성별에 따라 조사했다. 남녀의 자살 방식 중 두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총기를 이용하는 자살은 남성(27%)이 여성(3%)보다 훨씬 많았고, 독극물을 이용하는 건 여성(25%)이 남성(14%)보다 눈에 띄게 많았다. 총기를 이용한 자살은 실패할 확률이 적다. 하지만 독극물을 이용할 경우 어떤 약물을 얼마나 썼는지, 얼마나 빨리 발견되는지 등 상황에 따라 살아남을 가능성이 달라진다. 일반 자살에서 남성의 자살률이 높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남성이 선호하는 자살 방식이라는 건 전문가들도 종종 지적하는 부분이다. 물론 남성이 이런 방식을 이용해 자살에 ‘성공’하는 것이 자살 의지가 더 높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살 시도 자체를 간과해선 안 된다.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자살을 시도하는 비율은 여성이 남성보다 높다. 일반 자살에서는 시도의 상당 부분이 실패로 돌아가지만 조력 자살은 다르다. 의사가 처방하는 약물을 이용해 정확히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조력 자살률이 남성보다 높은 이유 중 하나는 자살 시도가 실패하지 않아서라고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조력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연령이다. 표에는 연령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지만,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력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80~90%가 65세 이상이다. 남성은 일반 자살과 조력 자살에서 모두 연령이 높아질수록 자살률도 올라간다. 여성의 경우 일반 자살에서는 연령에 따른 차이가 크지 않으나, 65세 이상이 되면 조력 자살률이 크게 높아진다. 왜 나이 많은 여성이 조력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을까. 여러 가설이 있지만 엄밀한 연구 결과가 나온 건 없다. 조력 자살이 합법화된 나라가 많지도 않고 그것이 실제로 이뤄진 역사도 길지 않기 때문에 이 경향은 최근 들어서야 관심을 받고 있다. 제기되는 추측 중 몇 가지는 이런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수명이 더 길다 보니 오래 살면서 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병으로 고통받거나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원하는 비율도 높다’ ‘학대받는 노인 중에 여성이 남성보다 많기 때문이다’ ‘여성은 나이 들면서 경제력이 크게 감소하고, 특히 배우자가 먼저 사망할 경우 타격이 더 크기 때문에 그 상황을 비관해 자살한다’ ‘여성 중에는 나이 들어 가족의 보살핌을 받느니 스스로를 희생해서 부담을 줄이는 게 낫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등등.

 

정확한 자살의 원인은 당사자가 사망했으니 알 수도 없고 사례마다 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꼽히는 주요 배경이 있다. 암이나 불치병에 걸린 절망적 상황, 그리고 사회적·경제적 고립이다. ‘나이 든 여성 노인’이라는 환경은 여기 들어맞는다. 특히 외로움과 관련해서는 연구 결과도 있다. 베른 대학은 스위스 국립과학협회의 지원을 받아 2003~2008년에 조력 자살을 택한 여성 740명의 특성을 조사했다. 이들에겐 ‘혼자 살거나, 이혼을 했거나, 학력이 높은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연구를 수행한 마티아스 에거 교수는 스위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반 자살과 마찬가지로 조력 자살에도 ‘취약 집단’이 있다는 걸 가리킨다”라고 했다. 자살이 순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스위스 최대 조력 자살 지원 업체인 엑싯(EXIT)은 이 연구 결과에 대해 ‘비과학적이고 편견에 치우쳐 있다. 가톨릭 교리에 영향을 받아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비판했다.

일반 자살과 조력 자살을 합치면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건 사회적 문제로서 자살을 다룰 때 자살률이라는 결과 하나만 보면 맹점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짚고 싶어서다. 스위스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데, 이 수치에 조력 자살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스위스 연방통계청 자살 통계에서도 일반 자살과 조력 자살은 따로 구분돼 있다. 만약 이 둘을 합치면 어떻게 될까. 일반 자살에선 스위스 남성이 여성보다 2~3배 많지만, 조력 자살을 포함할 경우 남성 자살은 여성 자살보다 1.2~1.5배 많다. 자살의 성별 차이가 크게 줄어드는 것이다(아래 〈그림 2〉 참조). 경향도 중요하다. 최근 10여 년간 통계를 보면 (남성이 많은) 일반 자살은 조금씩 줄고, (여성이 많은) 조력 자살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체 자살 건수에서 여성이 남성을 초과하는 건 시간문제다. 조력 자살 제도는 원래의 목적과는 별개로, 조건과 방법이 갖춰지면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자살한다는 점을 내보였다. 이에 따라 스위스 여성 노인들이 조력 자살을 선택하는 사회적 이유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고안된 법규가 취약 집단의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건 조력 자살 제도의 예기치 못한 영향이다.

자살을 젠더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남성 자살이 여성보다 3배쯤 많고, 이 비율은 개발도상국으로 갈수록 1대 1에 가까워진다. 남성이 자살에 더 취약하다는 점 외에는 자살과 성별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게 없다. 스위스 조력 자살의 여성 비율이 흥미로운 건 그래서다. 그동안 자살의 사회적 원인으로 주로 꼽힌 것은 경제위기다. 이와 관련한 연구는 많다. ‘65세 이하 인구에서 실업률이 1% 올라갈 때마다 자살률이 0.79% 증가한다’는 결과(2009년 의학 저널 〈랜싯〉에 발표된 논문 ‘유럽에서 경제위기가 공중보건에 미친 효과와 대안 정책의 반응’)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위기는 자살과 경제위기의 관계에 젠더를 추가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 이후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의 자살이 늘어났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 사망자는 296명으로 전해 같은 기간보다 43% 증가했다. 2020년 7월까지 서울 병원 응급실에 온 자살 시도자 중 20대 여성이 20% 이상이었다는 수치도 나왔다.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자살률이 그동안 조금씩 감소해왔지만, 2020년 11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증가했다. 주목할 것은 남성 자살률은 전해보다 약간 낮아졌는데 여성 자살률이 15% 정도 증가한 점이다.

개편된 노동 구조가 여성을 희생자로

일본 언론은 이것을 1990년대 버블 붕괴와 2008년 금융위기 때의 자살 경향과 비교해 보도했다. 앞선 두 차례 경제위기 때는 남성 자살이 늘었으나 이번 코로나19 위기에는 젊은 여성의 자살이 증가했고, 그 이유로는 그동안 혼자 사는 여성이 늘어났다는 점,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고용 형태가 많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1998년 6월 지하철 통로에서 잠든 노숙인의 모습.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급격히 늘었다. ⓒ연합뉴스

경제위기의 영향을 남녀가 똑같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자살률 변화가 드러낸 셈이다. 2018년 한국사회정책학회에 발표된 논문 〈두 번의 경제위기와 실업, 노동빈곤, 그리고 젠더:한국 자살 위험 양식의 역동적 변화에 대한 시론〉(문다슬·정혜주)은 이 점을 잘 짚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이 크게 증가한 시기는 두 번이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남성 자살률이 급격히 늘었다. 당시 외벌이 가구가 전체의 80% 이상이었고 남성이 주로 생계를 담당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실업자 수에 큰 변화가 없었는데도 여성의 자살률이 증가했다. 논문에 따르면 배경은 이렇다. “1997년 재편된 노동시장은 고용 형태를 다양화시켰는데, 대부분이 짧은 계약기간, 저임금, 제한적 노동권, 사회보장으로부터의 배제 등의 불안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은 기존 상용직 일자리를 빠른 속도로 대체하였다. 일례로 1998년 이후 실업에서 취업으로 탈출한 이들 가운데 75%가 임시 일용직이었다. (…) 외환위기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분절화를 통해 여성들을 노동시장 주변부를 구성하는 동시에 높은 경제적 취약성을 유지하게 했다. 그 결과 빈곤이 여성의 문제로 되어가는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 현상이 심화됐다.”

경제위기가 자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되, 그 타격은 1990년대 말 남성이 먼저 받았고 2000년대 말에는 여성이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위 논문은 2018년에 나온 것이라 코로나19를 다루고 있지 않지만, 여성이 아직도 경제위기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처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2020년 자살 통계를 통해 다시 나타났다. 물론 여전히 남성 자살률이 여성보다 높다. 여성이 전보다 더 많이 희생된다고 남성의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경향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환위기 이후 개편된 노동시장의 특징이 여성을 희생자로 만들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여자라서, 남자라서가 아니다. 잘못된 구조는 누구든 새로운 희생자로 몰아갈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노동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