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없는 ‘사망자 숫자’

10월7일 0시 기준 코로나19 국내 사망자는 425명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지만 매일같이 집계되어 공표되는 숫자에는 ‘얼굴’이 없다. 요양시설을 중심으로 한 집단감염, 격리병동에서 홀로 맞이하는 죽음, 장례마저 치르지 못한 죽음은 애도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 유례없는 감염병은 우리에게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질문하고 사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웰다잉부터 호스피스 완화 의료, 존엄사 논쟁까지 ‘좋은 죽음’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없지는 않았다. 이에 더해 코로나19는 죽음이 사회적 불평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온 현실을 드러낸다. 계층·젠더·장애 유무·세대·사는 지역에 따라 죽음을 맞는 모습도, 죽음을 바라보는 의미도 달라진다. 빈곤한 사람들은 적절한 의료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거나 간병인을 둘 수 없어 홀로 집 안에 고립된다. 생계를 위해 일을 쉴 수 없는 환경, 의료자원이 부족한 지방과 소도시에서도 죽음은 다른 모습으로 엄습한다.

나이 듦, 질병, 돌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다. ‘존엄한 죽음’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사IN〉은 의사·의료인류학자·환자·보호자·간병인 등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목소리에서 출발해 ‘죽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현장까지 두루 살펴봤다. 기사는 총 5회 연재된다.

①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
②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 ‘아픈 몸’도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음을
③ 의학은 돌봄을 가르치지 않았다
  - “환자 집에 가면 질병이 작아 보여요”
④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돌봄으로부터
⑤ 죽음의 미래를 찾아서

ⓒ시사IN 신선영서울 강북구 건강의집의원에서 ‘죽음의 미래’ 첫 번째 모임이 열렸다. 왼쪽부터 홍종원 방문진료 전문의원 건강의집의원 대표 원장, 김호성 연세메디람 호스피스전문센터 진료과장, 송병기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원,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저자.

임종기 환자의 병실에는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진이 붙어 있곤 했다. 딸과 아들과 손주와 반려동물처럼, 일생을 통해 긴 시간 공들여 기른 것들은 생의 거의 유일한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ㄱ씨의 병실은 조금 달랐다. ㄱ씨의 침대맡에는 사람이 아닌 ‘집’ 사진이 붙어 있었다. ㄱ씨를 담당했던 호스피스 의사 김호성씨는 그 사진을 쉬이 지나칠 수 없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집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집이 가장 사적인 공간이라면, 죽음은 가장 사적인 시간이다. 흔히들 ‘집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 문장 안에는 짐작보다 훨씬 다양한 맥락과 현실이 중첩돼 있다. 그 의미를 헤아려봄으로써 죽음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장악한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담론을 ‘사회적 죽음’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집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었다. 집은 병원과 달리 죽음·질병·돌봄이 각기 다른 문제가 아닌 하나의 문제임을 폭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김호성(연세메디람 호스피스전문센터 진료과장), 송병기(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조기현(〈아빠의 아빠가 됐다〉 저자), 홍종원(방문 진료 전문의원 ‘건강의집의원’ 대표 원장) 네 사람이 각자의 경험과 질문을 가지고 서울시 강북구 ‘건강의집의원’에 모였다.

우리는 언제부터 병원에서 죽기 시작했을까요. 오늘날 ‘집’은 죽음과 격리된 장소입니다.

김호성:코로나19 때문에 병원에서 집으로 외출하거나 집에서 병원으로 문병 오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집과 시설(병원)이 이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멀어졌어요. 호스피스라고 해도 어느 정도 통증 조절이 되면 많은 환자들이 집에 가고 싶어 합니다. 더불어 말기 환자 증세 중 섬망(譫忘)이 있는데 “집에 가자”라는 말씀을 공통적으로 많이 하세요. 때문에 환자에게 의식이 있든 없든 집은 굉장히 중요한 의료 현장의 화두입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환자들의 바람과 달리 2018년 통계청 사망통계열람을 보면 전체 사망자의 약 15%, 암 환자로 좁히면 약 8%만이 집에서 사망하고 있어요.

송병기:오늘날 한국인 사망자 10명 중 약 8명은 병원에서 사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불과 3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지금과는 완전 반대예요. 1990년에는 병원에서 죽은 사망자가 약 17%밖에 안 돼요. 일반적으로 다 집에서 죽었던 거죠.

김호성:2000년대 들어서도 집에서 임종을 맞은 비율이 50%에 육박하거든요.

송병기: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지 않아 사망신고를 늦게 한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논문이 있을 정도였어요. 1980~90년대 초반에 나온 사망 원인 통계만 해도 ‘증상 불명확’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었어요. 이 수치가 22%까지도 잡혀요. 들여다보면 노화로 인한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는 비율이 올라가면서 2008년에는 이 카테고리가 사라집니다. 1990년대에는 ‘그냥 나이가 들었으니 돌아가셨겠지’ 했던 것들이 이제는 다 진단 가능한 질병의 문제가 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죽음과 병원이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게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네요.

송병기:의료화(medicalization)로 생명을 관리하는 기술이 짧은 시간에 고도로 발전한 거죠.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할 때 보통은 평균수명이니 기대수명 같은 수명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웰다잉(well-dying) 담론도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요. 텔레비전을 틀어보면 의료인들이 굉장히 자주 나와요. 홈쇼핑에서는 건강보조식품이 인기가 많고요. 노화는 ‘정복’해야 하고 의료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 됐어요. 이걸 과학과 산업 측면의 죽음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반대에 또 다른 측면의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고립사나 빈곤으로 인한 자살이 있을 수 있고 최근에는 간병살인 같은 것도 많이 가시화되었죠. 또 대표적으로 산업재해를 볼까요? 2019년 통계에 따르면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885명이고 2018년에는 971명이에요. 사건사고, 사회적 문제, 복지 영역에서 풀어야 하는 문제로서 죽음이 있는 거예요.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이런 ‘사회적’ 죽음은 굉장히 불평등하게 다뤄지잖아요. 돌봄 노동이 가치 절하되는 것도 이 지점에서 살펴봐야 해요. 사실상 죽음에는 질병 그 자체만이 아니라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조기현:기본적으로 돌봄이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생산력, (건강보험) 재정건정성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생산이 아닌 영역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고용환경이 어떻게 돌봄을 대하느냐에 따라서 돌봄 노동의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송병기:대부분 사망 경로 자체가 요양원, 요양병원, 대형병원 등 시설에 집중됩니다. 집에서 아픈 사람들을 돌볼 여력이 없는 거죠. 그런데 병원에서는 의료진이 돌봄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커요. 사회적으로도 돌봄을 가족, 요양보호사, 간병인이 하는 ‘사적인 일’로 여깁니다. 돌봄을 주로 개인의 도덕적 차원에서 다루는 사회는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런 현상을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잘못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시사IN 신선영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 병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죽음, 질병, 돌봄이 하나의 문제로 인식되기보다는 별개로 조각난 채 다뤄지고 있다는 문제 제기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김호성:저는 의학에서 돌봄의 가치에 대해 배운 기억이 없어요. 있더라도 매우 겉핥기식이랄까요.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돌봄 서비스)가 정부 정책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의사들이 고민하는 부분은 수가 문제를 넘어서 방문 진료에서의 의사의 역할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당장 집에서는 그동안 의학 교육과정에서 훈련받은 전문적인 검사 및 처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일본에 왕진 가는 의사들이 있어서 뭘 하는지 물었더니 “(환자를) 안심시킨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홍종원:저 역시 방문 진료를 하는 의사로서 대형병원처럼 각종 검사를 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데서 좌절감이 없지는 않죠. 하지만 ‘안심한다’라는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한편으로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안심하세요”라고 한다고 해서 환자가 안심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뜻 깊죠. 물론 병원과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고 막을 수 있는 죽음은 막아야겠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학이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이 ‘관리’ 가능해지면서 현대의학과 의료 전문가들이 죽음을 터부시하고 은폐한 건 아닐까. 사실 저는 생물학적으로 죽는 순간과 사회적으로 죽는 시점은 다르다고 봅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는 경제적인 문제나 가족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죠.

송병기:죽음이 병원으로 가게 된, 의료가 죽음을 다루는 주된 담론이 시작된 시점을 저는 1963년으로 봅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해인데, 그해 12월에 의료보호법이 통과돼요.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시초죠. 쿠데타로 세워진 정부였기 때문에 정당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의료보호법을 활용한 겁니다. 또 하나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1960년대에 북한이 지속적으로 보낸 삐라 내용 중 하나가 사회주의 의료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이었거든요. 그리고 세 번째가 중요한데, 의료가 산업화를 위한 도구였어요. 병든 몸, 늙은 몸은 산업화에 걸림돌이었거든요. 이걸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조금이라도 아프면 빨리 조치를 취해서 회복하고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이 과정에서 돌봄은 논의될 여지가 없었어요. ‘효’라는 전통 가치에 강하게 의존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의학이 발전하면서 예전 같으면 임종했을 질병들을 ‘극복’하게 됐잖아요. 임종기가 명확히 예측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만큼 환자 보호자나 의료진이 신경 써야 하는 영역도 늘어났어요.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의료 기술이 발전한 만큼 질병도 복잡해졌는데 돌봄의 사회적 가치는 1960~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사실상 한국 사회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돌봄에 대해 근본적으로 논의할 기회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취약한 사회적 돌봄의 토대가 ‘존엄한 죽음’의 가장 큰 걸림돌일 수 있겠네요.

홍종원:새벽 2시에도, 주말에도 환자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가 있어요. 다짜고짜 “선생님, 죽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시곤 해요. 저는 그 환자가 죽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안 죽어요”라고 답하지 않고 왜 죽을 것 같다고 느끼는지를 들어봐요. 진단을 내릴 때는 환자의 이야기가 중요해요. 이를테면 한쪽 다리가 절단됐고 당뇨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가진 독거 상태의 환자가 있어요. 요양보호사가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와서 아주 기본적인 걸 도와주지만 거의 대부분, 하루 종일 집에만 계시거든요. 그게 죽을 것 같은 상황이죠. 저도 그런 상황이면 그렇게 느낄 것 같아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치료가 약을 처방하는 등 기본적인 관리도 있지만 자원활동가와 같이 방문해서 산책하는 거예요. 집이 반지하라 휠체어를 올려야 해서 혼자 할 수도 없어요. 저한테 방문 진료는 이런 의미예요. 환자의 삶과 상태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고요. 저한테 ‘죽고 싶다’는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주는 거죠. 자살 시도를 한 환자가 있어요. 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들지만 “우리 뭐라도 한번 해보죠”라고 말해요. “건강해져야 해요”가 아니라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걸 인정하고 사실은 그 사람이 그런 마음을 먹은 이유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단절, 돌봄의 부재, 사회적 편견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을 같이 겪는 거죠. 방문 진료를 하다 보면 어떤 환자가 죽을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에요. 불행하게 살아가야 할 삶이 걱정돼요. 우리가 ‘죽음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존엄하게 죽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존엄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해요.

송병기:‘죽으면 안 된다’라는, 죽음을 극복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주류적 담론이 있어요. 특히 의료계 및 바이오 산업계가 주도하고 있죠. 앞서 언급한 1960년대 산업화 시기부터 이어져온 정부 정책의 경로 의존성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과 죽음에는 홍종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의 서사, 삶의 경험이 연결돼 있거든요. 이게 분리돼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자꾸만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해요.

조기현:제 아버지는 마흔아홉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쓰러지고 치매로 10년간 투병하면서 사회적 죽음을 먼저 맞닥뜨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파서 일을 못하고, 일을 못하니까 가난하고,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고 이게 다 맞물려 있어요.

김호성: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족 간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커뮤니티 케어의 핵심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죽는다’는 걸 굉장한 이상처럼 이야기하지만 의료 현장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환자를 돌봐줄 원만한 가족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한편으로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죽을 수 있는 건 아니죠. 보호자들도 집에서 환자를 돌보거나 임종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해요.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전문적인 기관에 입원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게 집에서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좋을 수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른바 돈 있고 힘 있는 분들은 집에서 죽지 않아요. 좋은 시설이 있는 병원의 1인실에서 죽죠. 또 운 좋게 호스피스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한국은 호스피스 재원 일수가 평균 2~3주 정도로 한 달이 채 안 됩니다. 그 짧은 시간에도 평범한 가족들이 온전히 곁을 못 지켜요. 생업 때문에요. 병원과 보호자 사이에 갈등이 계속 잔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송병기:집에서 오히려 돌봄이 안 되는 상황도 허다해요. 차라리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수 있는 상황이 많아요. ‘행복한 집’이라는 게 당위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시사IN 신선영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경기도립의료원 파주병원의 안내 데스크.

‘죽음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긴급하고 긴밀해 보입니다.

김호성: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원인을 암, 치매 및 노쇠, 심장이나 폐 같은 장기가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부전으로 구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질병에 따라 체력의 저하 속도가 다르고 이 다름에 따라서 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겪게 되는 경험이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돌봄도 마찬가지죠.

송병기:콜센터에서 10년 근무를 한 폐암 환자가 있어요. 콜센터는 스트레스 때문에 흡연율이 높기로 유명한 직군입니다. 이 환자가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다거나 어린 자녀가 있다고 할 때 돌봄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지겠죠. 환자 개인이 앓고 있는 질병만 해결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병원으로 가는 건 단순한 질병이 아니에요. 관계가 질병을 안고 병원에 간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의료진들은 환자복을 입은 상황부터 보잖아요. 사회복지사나 간호사를 통해서 가정환경을 체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병원이 이런 영역까지 커버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이게 왜 문제냐면 ‘치료를 얼마만큼 받을지’ 같은 의료 결정을 할 때 환자 처지는 의학이 내린 결론처럼 명쾌할 수가 없어요. 윤리적·의료적·경제적 갈등이 발생하니까요.

김호성:앞으로는 관계 맺는 형식과 맥락이 달라질 거예요. 이를테면 성소수자, 1인 가구처럼 이른바 ‘정상 가족’으로부터의 탈가족화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잖아요. 가족보다는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이 나를 돌볼 확률이 훨씬 높아질 거라고 봐요. 해외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한국에서 아직 간병의 급여화는 걸음마 단계죠. 하다못해 가족이어도 돌봄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죠. 가족돌봄 휴가가 법적으로는 다 정비돼 있어도 실질적으로 쓰기 어렵잖아요.

ⓒ연합뉴스전남 무안의 한 요양원에서 환자와 면회 온 가족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19가 돌봄 문제에서도 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호성:그동안 일선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부족하나마 집에 있는 환자들을 모니터링해왔던 부분이 있는데 코로나19로 다 끊어지다시피 했어요.

송병기:돌봄은 기본적으로 접촉이거든요. 정부는 한국판 뉴딜이라고 해서 비대면 의료(원격의료)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하는데 이건 돌봄을 더 비가시적 영역으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결국 의료산업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의료 경험 면에서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기자명 정리·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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