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부리말 아이들〉 이후 20년 만에 가난 이야기를 다룬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을 펴낸 김중미 작가. ⓒ시사IN 이명익

세 종류의 가난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선과 악, 정의와 타락이 대립하던 시기의 가난이다. 다수가 가난했지만 그들 사이는 진흙처럼 끈끈했다. 건너편에는 선명한 악의 실체가 존재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8, 이하 〈난쏘공〉)이다.

이후 20년, 가난에서 물기가 말라갔다. 가난이란 누구의 잘못인지를 물어 싸우기보다 어서 빠져나가야 할 대상이 되었다. 궁핍할지언정 단단하게 뭉쳐 있던 가족과 마을공동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 ‘우리 모두의 가난’이 ‘나의 가난’으로 변하는 길목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김중미, 창비, 2000)이 나왔다.

또 한 번 20년이 흘렀다. 가난은 이제 바삭바삭해졌다. 우리 모두의 가난은 이제 사라졌다. 각개전투 모래알 같은 각자의 가난만 남았다. 1970년대 후반 〈난쏘공〉을 읽고 1990년대 후반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김중미 작가(58)는 2010년대 후반 다시 가난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은강 노동자들이 똑같은 생활을 했다. 좋지 못한 음식을 먹고 좋지 못한 옷을 입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오염된 환경, 더러운 동네, 더러운 집에서 살았다. 동네의 아이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더러운 골목에서 놀았다.”

 〈난쏘공〉,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김중미 작가는 고등학생 시절 〈난쏘공〉을 읽고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를 맞아 이사 온 인천의 산동네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사회적 가난에 대해 생각했다. 비리의 온상이던 사학 재벌 중·고등학교에서 교육 현장과 어른들의 부조리에 눈떴다. 첫 직장으로 들어간 대학병원 원무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택시 기사, 제왕절개 입원비 50만원을 떼어먹고 달아난 산모, 머리카락이 벨트컨베이어에 끌려 들어가는 바람에 몸이 세 동강 난 채 실려온 어린 여성 노동자, 오른손 손가락 네 개가 절단돼 응급실에 온 열다섯 살 소년 노동자를 보았다.

1978년 2월, 인천시 만석동에서 벌어진 ‘동일방직 사건’ 당시 오물을 뒤집어 쓴 여성 노동자들.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제공

초등학생 때 드라마 〈수사반장〉을 보고 가난 때문에 범죄자가 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울음을 터뜨리던 ‘울보’ 김 작가는 어른이 되어서도 걸핏하면 울었다. 원무과 수납창구에 앉아 택시 기사 앞주머니에 들어있던 피에 젖은 돈을 한 장 한 장 세면서, 입원비를 받아내려 찾아간 산모에게 10㎏들이 쌀과 냉동 만두를 사서 넣어주고 돌아오면서, 손가락 네 개를 잃고 받은 보상금 150만원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소년 노동자와 헤어지면서 울던 김 작가는 나이 스물넷에 빈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가난이 집약된 동네에 터를 잡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지금의 인천시 만석동 ‘기찻길옆작은학교(공부방)’이다. 거기서도 툭하면 울었다. 김 작가를 울린 이야기들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이하 〈괭이부리말〉) 속 동준이, 숙자, 숙희, 명환이와 동수, 호영이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들과 울면서 생각했다.

“예전에는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 누군가와 동무가 된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머리말

〈괭이부리말〉에 쓰이게 될 이야기들이 쌓여가던 1997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난쏘공〉을 쓴 조세희 작가가 공부방 2층 다락으로 따라 올라왔다. 조 작가는 〈난쏘공〉을 쓸 때 취재했던 동네를 다시 돌아보던 중이라고 했다. 김 작가가 살고 있는 만석동이 〈난쏘공〉의 무대 ‘은강’이라는 사실을 그날 알게 되었다.

〈괭이부리말〉의 시절은 〈난쏘공〉의 은강 시절보다 확실히 덜 배고팠다. 하지만 훨씬 더 외로워졌다. 분노도 덜했지만 희망도 덜했다. 더 이상 빼앗길 게 없을 것 같던 가난의 주머니 안에도 가족·이웃·마을이라는 쌈짓돈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것들을 잃고 나서 알게 되었다.

“먹고사는 일이 더 급한 사람들은 판잣집을 건축업자에게 헐값으로 팔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동네에 빈집만 남자, 어느 날 굴착기가 와서 판잣집을 다 부숴버렸다. 11번지엔 달랑 동준이네 집만 남았다. … 어느 날 새벽, 동준이 아버지는 텔레비전 위에 돈 삼십만 원과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만 써놓고 집을 나갔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동준이와 동수 형제’

김 작가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부여잡고 싶은 마음으로” 〈괭이부리말〉을 썼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공부방 부모들은 그래도 인근 공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다. 박한 임금이나마 꼬박꼬박 받았고 함께 출근하고 함께 퇴근했다. 살림도 비슷하고 고민도 비슷했다. 그런 일상 속에서 이어지던 끈끈한 가족, 이웃 간 정 같은 게 어느 순간부터인가 급격히 사라져갔다. 크고 작은 공장 일자리가 중국과 동남아로 빠져나갔다. 남은 일자리마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렸다. 동시에 주거개선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던 집들이 하나둘씩 헐려나갔다. 어떤 곳은 판잣집으로 남고 다수는 빌라촌으로, 더러는 아파트촌으로 바뀌고 서로간 구획이 생겼다. 김 작가는 “마치 노조 파괴 작전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일터도 집도 뿔뿔이 흩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연결해주던 끈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타격은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버려진 집들 사이사이에 혼자 남은 아이들을 곁에서 돌보며 김 작가는 〈괭이부리말〉을 써 내려갔다.

가난과 약자에 대한 여러 책을 낸 김중미 작가는 고등학생 시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서 있는 책 중 왼쪽)을 읽고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을 시작했다. ⓒ시사IN 이명익

“102호에는 작년 겨울에 팔순 잔치를 한 할머니가 혼자 산다. … 1층 원룸은 당뇨를 앓는 아저씨와 발달장애가 있는 오빠가 살던 집인데 몇 년 전 그 오빠가 복지관에 간 사이, 아저씨가 목을 매 자살을 했다. 시신은 수도세를 받으러 갔던 우리 아빠가 발견했다. … 202호에는 다섯 살, 두 살 남매를 둔 부부가 산다. 아빠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엄마는 베트남에서 왔다. … 2층 원룸 201호에는 중국인 부부가 사는데 거의 얼굴 볼 새가 없다. 보통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데다 부부끼리도 말이 없는지 늘 조용하다. 4층 원룸에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 셋이, 우리 위층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산다.”

〈곁에 있다는 것〉, ‘지우 이야기’

20년이 지나 “더 풍요로워지고, 기술의 발전은 어렸을 때 어린이 잡지로 보던 미래를 앞지른” 오늘날이 되었다. 〈괭이부리말〉 이야기는 〈곁에 있다는 것〉에서 다시 전개된다. 조세희 작가의 허락을 받아 ‘은강’이라는 지명을 다시 얻었다. 〈난쏘공〉에서 시작돼 〈괭이부리말〉 속에서 철거된 판잣집 동네의 이야기는 실제 인천시 송현동 구릉지 꼭대기의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도 남아 있다. 박제돼 박물관 안에 전시된 그 시절의 가난에는 그래도 공통의 추억거리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마저 쌓이지 않는 가난이다. 고립되고, 체념하고, 꿈꾸지 않는 가난이다. 김 작가는 ‘부여잡고 싶던 것들’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던 때에 〈괭이부리말〉을 썼고 그 사라짐이 마무리된 뒤 폐허만 남은 곳에 또 새로운 가난의 모습이 들어찬 모습을 〈곁에 있다는 것〉에 담았다. 소설 속 지우가 소개하는 모래알 같은 은강의 이웃들, 흩어져 있는 점들을 하나하나 선으로 이어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가난 이야기를 문학으로 펼쳤다.

김 작가는 말했다. “이제 공부방에서 더 이상 부모회를 할 수가 없어요. 다문화가정, 비정규직, 조손가정 각자 사정이 달라서, 모여 뭉쳐지지가 않아요. 예전에는 공부방에 아이를 맡기는 부모에게 ‘부모회 꼭 오세요’ 당부했다면 이제는 이렇게 약속을 받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문제가 생기면 혼자 끙끙대지 말고 꼭 우리(공부방 이모 삼촌들)와 의논해주세요.’ 이제는 일대일로 얘기할 수밖에 없게 됐어요. 그 연결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은강역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랑 신도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때깔이 다르다. … 강남역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은강동 사람들과 다르다. 오빠는 내 시각에 편견이 들어 있어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곁에 있다는 것〉, ‘여울이 이야기’

고립돼서 각자 가난을 겪는 2021년의 은강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주눅이 들어 있다. 〈난쏘공〉이나 〈괭이부리말〉 시절까지도 가난이 그렇게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김 작가는 기억한다. “가난이 청렴결백의 상징이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내가 하는 노동에 대한 자부심, 거짓 없이 몸을 놀려서 이만큼 먹고산다는 떳떳함이 있었어요.” 지금은 아니다. 가난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온갖 말에다 ‘거지’를 붙여대는 말장난에 거리낌이 없는 사회다. 세상도 그러하고 가난한 이들 스스로도 내면화했다. “지금은 가난에 대해 입에 담는 걸 힘들어해요. 부끄러워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더 깊이 느껴요. 자기 탓이 아닌데도 가난을 수치스러워하고, 목소리가 더 잦아들었어요.”

“조례를 좀 바꿔서 빈민체험관이 들어서면 주민들한테도 나쁠 게 없잖습니까? 체험관이 생기고 관광객이 오면 주민들은 작은 가게를 내서 기념품을 판다거나 그러면 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곁에 있다는 것〉, ‘여울이 이야기’

소설 속 ‘은강’의 배경이 된 인천항 인근 동네의 풍경. ⓒ시사IN 이명익

1970년대의 세상은 둘러앉아 밥 먹는 난쟁이 가족의 집을 망치로 때려 부수었고 2020년의 세상은 지우·강이·여울이가 사는 동네를 빈민체험 테마마을로 만들려 했다. 가난은 이제 혐오 아니면 상품화의 대상이 되었다. 〈곁에 있다는 것〉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은강구청장의 ‘은강 빈민체험관’ 추진 소동은 2015년경 인천시 만석동을 둘러싸고 실제 벌어졌던 일을 배경으로 했다. 마을 곳곳의 빈집을 빈민체험관(후에 ‘쪽방체험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으로 만들고, 김중미 작가 생가터(김 작가는 여기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를 복원하고, 마을 곳곳을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으로 조성해 중국인 관광객이나 일본·동남아시아 관광객들을 유치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김 작가는 당시 마을 사람들과 이 계획을 막아내며 한쪽에서는 찌푸린 얼굴로 가난을 혐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맑은 얼굴로 가난을 소비하고 관전하려 드는 세상을 보았다.

“포기가 안 되더라고.” “뭐가?” “가난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갖는 거.”

〈곁에 있다는 것〉, ‘우리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상품화하려는 사람들과 싸울 때 상대방은 더러 이런 말로 김 작가를 공격했다. “당신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팔아 글을 쓰잖아.” 〈곁에 있다는 것〉을 쓰면서 그 말을 놓고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아직도 가난을 가지고 얘기를 할까? 이런 개인주의 시대에 왜 계속 연대, ‘함께 살자’ 이런 얘기를 붙들고 있을까?’ 〈괭이부리말〉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이웃으로 지내던 만석동 가난한 아이와 엄마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독자가 되었으면 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밤에 쓰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흔적만 남아 있는 인천 화수자유시장 터. ⓒ시사IN 이명익

〈곁에 있다는 것〉을 쓰면서는 마음이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했다. 몇 번을 그만두고 싶었다. ‘도대체 왜 쓰지?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지? 나 또한 가난 이야기를 판다고 비난받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까닭은 “가난을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 누군가는 나와 같은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라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가난의 이유와 의미가 무심한 사람들의 언어로 선취되고 규정되기 전에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말로 기록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 편에서 그들의 삶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가 왜 힘들고 불행한지조차 모르는 채로 소외되고 밀려날 거예요.”

“남자의 집으로 찾아가 임신을 한 것 같다고 말하자 남자는 임신이 그렇게 쉬운 거면 자기는 벌써 애 여럿 딸린 아버지가 되었을 거라고 했다. 며칠을 눈물로 보낸 영자는 미순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미순이 알려준 싸리재 어디쯤에 있는 여관에서 아기를 지웠다. 열아홉 살이었다.”

〈곁에 있다는 것〉 ‘지우 이야기’

〈곁에 있다는 것〉은 가난 이야기임과 동시에 여성의 이야기다. 밤 11시 잔업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청소, 빨래에 다음 날 밥상까지 차려놓고 잠자리에 드는 고단한 엄마들의 일기장 속에서 김 작가는 가난과 여성의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그걸 끄집어내 들어주고 해석해줄 때 위로가 되는 모습을 김 작가는 종종 목격했다. “한 엄마가 자녀 때문에 힘들어했어요. 아이가 자해도 하고 폭력도 휘두르고요. 엄마와 아이를 설득해 상담과 치료를 받게 했죠. 상담에서 첫날 질문이 이거였어요. ‘원하는 아기였나요?’ 동네 가난한 엄마들의 많은 경우가 10대 후반에 원치 않는 임신과 결혼을 경험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질문을 들은 엄마가 펑펑 울더라고요. 전철을 타고 돌아오면서 그 엄마가 얘기했어요. ‘이모, 나랑 ○○이가 그때부터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던 건지도 모르겠어’.” 야만적인 시절을 다소 지난 2021년의 많은 엄마와 딸들도 여전히 가난 위에 여성의 문제가 얹힌 두 겹의 불행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동시에 그 불행들을 서로 삭여주고 덜어주는 ‘연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도 가난한 여성들이다. 〈곁에 있다는 것〉에서도 서로를 살리는 일은 여성들이 해냈고 그 연대는 3세대에 걸쳐 이어졌다.

다 같이 가난하던 동네는 점차 어느 곳은 판잣집으로 남고 다수는 빌라촌으로, 더러는 아파트촌으로 바뀌고 서로 간 구획이 생겼다. ⓒ시사IN 이명익

뿌루퉁해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숙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선생님이, “학교 올 때 준비는 누가 해주니?” 하고 물었다. “제가요.” “밥은?” “제가요.” …  “숙자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팠나 보구나.”

〈괭이부리말 아이들〉, ‘숙자와 담임선생님의 비밀’

김중미 소설들 대부분에서 학교는 그리 환대의 공간이 아니다. 교사들은 학생을 학업 성적으로 가르고, 학생들은 가난하고 약한 친구를 따돌린다. 실제 세상에서도 학교 안에서 학생들 개별 삶에 관심을 갖는 어른은 점점 적어지고, 이익집단을 만들어 서로 싸우기만 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내가 더 힘들다고, 내가 더 일이 많다고, 아이들을 이리 떠넘기고 저리 떠넘기고 하는 일들이 지난해 코로나19 유행 이후 더 낯 뜨겁게 학교 현장에서 벌어졌다. 〈괭이부리말〉에서처럼 어깨가 축 처진 학생의 학교 밖 생활을 궁금해하고, 물어봐주고, 끝내 그 아이들의 삶 속에 깊숙이 개입하고야 만 ‘김명희 선생님’ 같은 교사는 현실 속에서나 현실을 반영한 소설 속에서나 극히 드물다.

김 작가는 지난해 코로나19 이후 학교를 보며 더 절망했다. 학교 선생님들을 포함해 아이들을 돌보는 공적 책무를 맡은 우리 사회 많은 어른들이, 원래 힘든 아이들이 더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고 느낀다. 7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김 작가는 말했다. “세월호 참사의 대응 과정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지 봤잖아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도 똑같았어요. 무관심했고, 외면하고, 손을 놓았어요.”

“형은 바로 전날 밤 족발을 배달하러 가다 사고를 당했다. 과속을 한 것도 신호위반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덤프트럭 기사가 들이받았다고 했다. 졸음운전이 원인이었다. 50대인 기사는 인천에서 창원으로, 다시 창원에서 인천으로 쉬지도 못하고 오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그날 형은 안전모를 쓰고 있지 않았다. 친구의 꾐에 넘어가 스포츠 토토에 빠진 형은 안전모를 새로 살 돈이 없었다.”

〈곁에 있다는 것〉, ‘우리 이야기’

만석동에서 김중미 작가는 수많은 죽음을 겪었다. 1987년 만석동에 터를 잡고 처음 시작한 일은 신문 배달이었다. 생계수단이기도 했고 동네 구석구석을 알고도 싶었다.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한쪽 팔이 없는 분이었다. 달리고 있는 기차에 달라붙어 돈 되는 부속품을 빼서 생계를 꾸려가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 다수가 목숨을 잃고 본인은 팔을 잃었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만석동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2년 뒤 김중미 작가는 만석동 공부방에서 보듬던 아이를 잃었다. 초등학교 4학년 민호(가명)였다. 동네 어디에도 마땅한 놀이터가 없는 아이들은 인근 공장을 들고 나는 대형 트럭들이 수시로 다니는 도로 근처에서 자주 놀았다. 11t 트레일러가 민호 곁을 스쳤다. 민호는 몸을 피했지만 트레일러 옆으로 난 갈고리가 민호 옷자락을 잡아챘다. 그게 만석동에서 첫 번째 직접 겪은 죽음이었다. 자살·사고·고독사 등 이웃들 죽음이 너무 흔했다. 통운회사 트럭에 치인 옥자 아버지, 선측 철판을 용접하다 발판에서 떨어져 죽은 영환, 1t짜리 펄프 더미에 깔린 숙자 아버지, 폭염에 20일 이상 쉬는 날 없이 공사장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일하다 열사병으로 죽은 여울이 막내 외삼촌, 오토바이로 족발을 배달하다 트럭에 깔린 수찬이 친구 등 김중미 소설에 담긴 여러 누추하고 고단한 죽음들은 따로 상상력을 발휘해 지어낼 것도 없는 실제 이웃들의 죽음이었다.

가장 최근의 죽음은 지난해 3월이었다. 공부방에서 인연을 맺은 (청년으로 성장한)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연결이 끊긴 아이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눈물을 닦고 핸드폰에 서로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며 말했다. “얘들아, 우리 생존 신고 하면서 살자. 딴 거 안 해도 되고 안 와도 돼. 가끔 먼저 ‘이모, 저 살아 있어요’ 그렇게라도 닿아 있자, 우리.”

“‘내가 아는 단어가 이렇게 적었나?’ 싶을 정도로 위로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그냥 옆에 있으면 돼요. 아무 말도 없이. 이틀이 됐든 사흘이 됐든 그렇게 옆에 있다 보면 나눠지더라고요.”

〈존재, 감〉, 창비, 2018

〈괭이부리말〉 동준이를 그릴 때 모델이 되어준 아이였다. 본드를 마시고 구치소를 들락날락했다. 까만 봉투에 본드를 짜서 다락으로 올라가는 날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하지 마, 제발.” 아이는 “이모,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미안, 잠깐만 하고 올게” 하고 다락으로 올라갔다. 혼자 울다가 아이가 올라가 있는 다락으로 갔다. 아이는 본드에 취해서 누워 있었다. 옆에 앉아 아이 얼굴을 내려다보며 울다가, 생각했다. ‘그래,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지금 옆에서 우는 것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 아이가 벼랑으로 떨어지면 나도 거기로 내려가야겠구나. 거기에서 곁에 있어줘야겠구나. 혼자가 아니게 해야겠구나.’ 김 작가는 “절망이기 때문에 희망을 생각하게 되더라”라고 말했다. 공부방 출신의 한 아이가 한 말을 오래도록 곱씹는다. ‘이모, 내 목표는 이제, 고독사하지 않는 거야.’ 김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곁에 있어주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끈끈하게 뭉치진 못하더라도 서로 등을 맞대는 정도, 아니, 손가락 하나 맞닿은 정도만이라도 끈을 놓지 말자는 이야기를 만석동 아이들에게, 또 세상의 모든 힘든 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다.

인천시 만석동의 한 폐업한 공장 담장에 적힌 문구. ⓒ시사IN 이명익

“사람들은 주변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잖아.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지. 눈길의 가장자리가 더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우리처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보고 더 빛날 수 있잖아.”

〈곁에 있다는 것〉, ‘여울이 이야기’

어느 책에선가 읽었다. 멀리 있는 사물일수록 주변부의 시선이 중심부 시선보다 더 잘 본다고, 그래서 밤하늘의 별을 관측할 때도 눈의 가장자리 시력을 이용한다고. 김중미 작가는 생각했다. ‘모두가 가운데, 중심으로 가려고 사다리를 타고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주변부나 경계선에 머물러서 바라볼 때 더 넓게, 놓치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주변부에 놓인 내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자각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여러 사람들 속에서는 가능해지지 않을까.’

은강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계속 주변부로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가장자리의 눈으로, 작고 약하지만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들을 바라보려는 마음은 아마 수십 년 뒤 또 다른 ‘은강’을 무대로 해서라도 계속 이어져갈지 모른다. 김중미 작가는 말했다. “여전히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중심이 아닌 주변부, 가장자리를 보려는 이가 있을 거예요. 누군가는 또 다른 은강들을 찾아갈 거고 혼자 살지 못하는,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변한 세상에서도 계속 찾아갈 거라 믿어요.” 그때는 이것이 꼭 가난 이야기로 불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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