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자원봉사 단체가 기부한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줄 선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민들. ⓒAP Photo

사방이 빈틈없이 스크린으로 가득 찬 작은 방에서 남자가 자고 있다. 아침이 되자 스크린에 수탉이 나타나 남자를 깨운다. 스크린에는 그가 가진 ‘메리트(가상화폐)’가 표시돼 있다. 양치하려고 치약을 짜내자 메리트가 조금 줄어든다. 남자가 가는 곳은 실내 자전거로 가득한 또 다른 방이다. 이미 그처럼 아래위에 회색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앞에 설치된 스크린을 보며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다. 밟으면 밟을수록 메리트가 늘어난다. 점심때가 되자 사람들은 자동판매기에서 메리트를 내고 음식을 사 먹는다. 생필품을 사는 데 필요한 메리트를 얻는 방법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뿐이다. 그 외 일상은 온종일 그들을 따라다니는 스크린을 보는 것인데, 광고를 보지 않으면 메리트가 깎인다. 이 힘들고 무의미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심사위원 눈에 드는 것이다.

영국 사이언스 픽션 드라마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핫 샷’의 도입부다. 2011년에 처음 공개된 뒤 인터넷에서 이 드라마를 놓고 난데없이 기본소득 논쟁이 벌어졌다. 관련 내용이 나온 것도 아닌데 기본소득이 화제가 된 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상이 자동화된 세상에서 인간의 노동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이나 연예인 같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자판기 음식으로 연명한다. 불평등이 극단화된 세상이 유지되는 방법이다.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한창 진행 중이다. 취업계수란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을 나타내는 수치로, 일정 기간 투입된 취업자를 실질 산출액(10억 단위)으로 나눈 것이다. 취업계수가 낮아진다는 건 같은 양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생산설비가 자동화되면 취업계수는 하락한다.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전체 산업 취업계수가 1995년 20.44에서 2018년 5.65로 꾸준히 낮아졌다. 산업 분야마다 다른데, 자동화 영향을 많이 받은 제조업의 하락 정도가 크고 서비스업은 낮은 편이다. 예전에 100명이 하던 일을 앞으로 10명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면 나머지 90명의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핫 샷’에 묘사된 디스토피아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래서 제시되는 대안이 기본소득이다. 특히 팬데믹으로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으면서 기본소득 논의가 더 활발해졌다.

원래 목표의 20%만 지급

현재 논의되는 기본소득의 스펙트럼은 다소 추상적이고 광범위하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우파부터 생산과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생태주의 좌파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이 기본소득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널리 통용되는 기본소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에게 지급(개별성), (2)소유 재산이나 소득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액수를 보편적으로 지급(보편성), (3)구직활동 등 조건에 관계없이 지급(무조건성), (4)바우처나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현금성). 네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기본소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흥미로운 실험들이 진행 중이다.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앞둔 2016년 5월,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 ‘소득 걱정을 덜게 되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고 쓰인 펼침막이 등장했다. ⓒAP Photo

2020년 5월 스페인 정부는 빈곤층 85만 가구(230만명)에 매월 462유로(약 62만원)에서 1015유로(약 138만원)까지 최저생계비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최저생계비 논의는 그전부터 있었는데, 코로나19로 빈곤층이 큰 타격을 받자 계획 중이던 제도를 앞당겨 시행하기로 했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많은 언론이 스페인 정부의 결정을 놓고 ‘팬데믹이 사상 최대 규모의 기본소득 실험을 앞당기다’ 같은 제목으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소득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에게 같은 금액을 지급하는 게 기본소득인데, 스페인 정부는 저소득층을 14개 세부 카테고리로 분류해 빈곤 정도에 따라 차등적 금액을 가구당 지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본소득의 요건을 엄밀히 충족시키지 못한 스페인 정부의 최저생계비 실험이,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2월 스페인 정부가 내놓은 중간 보고서에 따르면, 원래 85만 가구에 최저생계비를 지급하는 게 목표였는데 반년이 지난 뒤에도 실제로 이 돈을 받은 건 약 16만 가구뿐이었다. 원래 목표의 20%에 불과한 수치다. 신청한 가구 셋 중 둘은 거절당했는데, 신청자의 소득이나 재산이 생각보다 많아서였다. 기존 복지 혜택을 받고 있을 경우 최저생계비를 주는 대신 그 복지 혜택을 없애도록 한 점도 문제였다. 그 결과 원래 받던 수당보다 최저생계비 금액이 더 적은 경우가 많아 수급자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신청서를 받고 처리하는 속도도 당초 계획보다 훨씬 느렸다. 정부 측은 ‘사기와 중복 수혜를 가려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이 제도에 대한 찬반이 갈리는 정치권의 싸움 때문이라는 내부 제보도 나왔다. 호세 루이스 에스크리바 스페인 사회안전망 담당 장관은 이 제도의 설계부터 다시 검토한 뒤 지급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수급자 선별을 위한 행정 절차가 주요 문제였다는 건데, 필리프 판 파레이스도 저서 〈21세기 기본소득〉에서 이 점을 지적한다. “보편적 수당 제도를 실시했을 때 달성할 수 있는 수급률 수준을 재산 조사에 의존한 수당 제도를 통해 달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보 캠페인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상당한 인건비와 행정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보편적이지 않은 스페인 최저생계비 제도의 문제가, 기본소득의 보편성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 셈이다.

스페인에선 현재 다른 대안도 논의 중이다. 국가적 차원의 주 4일(32시간) 근무 제도다. 스페인 좌파 정당인 마스파이스(Más País)가 올해 초 정부에 제안한 내용인데,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약 200개 기업이 3년 동안 주 4일 근무를 시행하되, 일자리나 임금은 줄이지 않는다. 근무시간 감소로 생산성이 줄어드는 부분은 정부가 보상한다. 시행 첫해에는 100%, 두 번째 해에는 50%, 세 번째 해에는 33%를 지원한다. 여기 들어가는 예산은 3년 동안 5000만 유로(약 675억원)로 추산된다. 이 파일럿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전국으로 확대한다. 그 경우 스페인은 정부 주도로 주 4일 근무를 실시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될 전망이다. 스페인 재계에서는 ‘미친 짓’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스페인은 팬데믹 초기에 큰 타격을 입은 국가다. 스페인 내전 이후 사상 최대의 경기침체를 맞았는데 더 많이 일하기는커녕 주 4일 근무는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기본소득의 대안으로 자주 논의되는 주제다.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위 책에서 “옛날의 투쟁은 노동이라는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투쟁의 중심 동기는 노동이라는 특권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모든 일자리에서 균등하지 않다는 점, 임금노동자(회사원)와 자영업자(식당 주인)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노동시간 단축을 공정하게 적용하려면 엄청난 행정비용이 든다는 점 등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 실제로 스페인에서 단축 근무가 시행될지 지켜볼 일이다.

2017년 핀란드는 실업자에게 매달 560유로를 지급하는 실험을 했다. 위는 핀란드 사회보험청 건물 입구. ⓒEPA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는 만만치 않다. 재원 조달이 어렵다든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도덕적 문제 제기엔 이미 반박이 충분하다. 로봇세(또는 기계세) 등 증세를 통한 재원 마련, 인구의 90%가 일자리를 잃는 상황에서 노동과 소득을 연결짓는 건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 등이다. 하지만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기본소득에 여러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중 세 가지를 꼽아보면 이렇다.

노동이라는 특권을 나누자는 것

첫째, 경제적 양극화는 전 세계 단위로 일어나는데 기본소득을 국가 단위로 지급하는 게 합리적인가. “미국 유권자들은 아마존과 구글이 미국 내 사업을 대가로 납부한 세금이 펜실베이니아의 실직 광부와 뉴욕의 실직 택시기사를 위한 급료나 무료 서비스 지급에 쓰이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뒷간 같은 국가들’이라고 부른 나라의 실직 국민을 지원하기 위해 이 세금을 송금하는 데에도 과연 미국의 유권자들이 동의할까?”

둘째, ‘기본’이 상대적인 것임을 간과하고 있다. 교육, 의료, 인터넷 등은 현대 삶의 기본조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노화 방지, 수명연장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그 비용도 기본소득에 포함돼야 할까.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두고 어떤 정의를 따르든, 일단 한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시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기본이 아닌 사치를 두고 치열한 사회 경쟁과 정치적 투쟁이 집중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 결과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격차는 점점 커질 뿐 아니라 사실상 메울 수 없게 될 것이다.”

셋째, 전격적 변화를 이끌 주체가 없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의 바탕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지닌 막대한 경제적 파워였다. 그러나 기본소득 세력에는 그런 힘이 없다. “대중이 자신들의 경제적 가치를 잃는다면, 그래서 착취가 아닌 자신의 무관함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면 그런 교의가 얼마나 의미 있을까? 노동계급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계급 혁명을 시작할까?”(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성공하건 실패하건 실제 현장에서 실험을 하고 결과를 도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스페인 외에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2016년 6월 기본소득을 국민투표에 부쳤던 스위스에서는 재원 조달이나 이민자 폭증 우려 같은 이슈가 부각됐다. 핀란드는 2017년 1월부터 2년 동안 실업자 2000명에게 매달 560유로(약 76만원)를 조건 없이 지급하는 실험을 했다. 여기서 수급자의 고용 촉진 효과와 행복감에 관련된 자료가 도출됐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 지원금이 기본소득 논의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지만 실험이라 부르긴 민망한 단계다. 국민적 합의가 가능할지, 얼마가 적정할지, 현행 복지제도는 어떻게 유지할지, (기본소득의 주요 근거인) 데이터 소유권을 어떻게 개인에게 귀속시킬지 등에 대해 논쟁의 장이 열려야 한다. 손 놓고 있는 건 “정치권과 행정권의 직무 유기”(김세연 전 국회의원)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