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교육청에서 보내오는 뉴스레터는 ‘친애하는 부모님과 법적 보호자님께’라는 말로 시작한다. 편지를 받아보는 사람 중에 부모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PA

얼마 전 둘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직원 한 명이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다는 이메일이 왔다. 영어로 쓰인 이메일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확진자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they’였다. 내용을 보면 확진자는 분명 한 명인데 왜 he나 she가 아니라 they라고 썼을까. 확진자의 성별을 감추기 위해서다. he나 she를 써서 성별이 알려지면 얼마 안 되는 유치원 직원들 중 누가 코로나19에 걸렸는지 추측하는 것이 쉬워진다. 추측은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차별을 미연에 막기 위해 they를 쓴 것이다.

3인칭 단수 대명사로 they를 쓰는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영어에 새로 생겨난 용법이다.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글을 인터넷 블로그에서 2년 전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문법을 인위적으로 바꿀 수 있는가. they는 수많은 사람이 3인칭 복수 대명사로 쓰기로 약속한 단어가 아닌가. 굳이 남녀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상황, 또는 구분이 차별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중성 대명사를 쓰자는 의도는 좋다. 그러나 대중의 언어습관이 정치적인 이유로, 게다가 몇몇 소수의 주도로 바뀌기란 불가능하다고 봤다.

내 생각은 틀렸다. ‘3인칭 단수 대명사 they 쓰기 운동’은 영어 문법을 바꾸고 있다. 미국계 IT 기업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물으니 채용 과정에서 이름과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지원자를 지칭할 때 he나 she를 대신해 they를 쓰도록 하는 사내 지침이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원자의 성별이 채용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유치원에서 부모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쓰일 정도면 이제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는 볼 수 있다.

나는 방금 ‘부모’라고 썼다. 하지만 최근에 ‘부모님께’로 시작하는 가정통신문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스위스 교육청에서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뉴스레터는 이렇게 시작한다. ‘Liebe Eltern und Erziehungsberechtigte.’ 한국어로 ‘친애하는 부모님과 법적 보호자님께’라는 뜻이다. 편지를 받아보는 사람 중엔 부모만 있는 게 아니다. 조부모나 이모, 삼촌 같은 친척이 있을 수 있다. 보육원 담당자, 입양 대기 아동을 위탁가정에서 돌보는 보호자도 있다. 이들이 ‘부모님께’라고 쓰인 소식지를 받아보는 기분이 어떨까. 그리고 ‘부모님께’로 시작하는 소식지를 부모 아닌 양육자에게 보여주는 아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법적 보호자’라는 한 단어를 추가하는 것으로 이들을 ‘정상 가족’의 울타리 안에 넣는 것이 가능해진다. 기존 언어습관을 약간 수정하는 것은 사소하지만 사려 깊은 태도다. 투입하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훨씬 크다.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가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고쳐 쓰는 게 낫다. 차별을 줄이고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언어를 쓰자는 움직임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로는 ‘포용적 언어(inclusive language, écriture inclusive, lenguaje inclusivo)’, 독일어로는 ‘공정한 언어(Gerechte Sprache)’라고 한다. 비차별적인 언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공정한 언어’로 통일하겠다. 공정한 언어 쓰기 운동은 분명 선한 의도로 시작됐지만,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도 만만찮다. 흔히 생각하듯 지금껏 누리던 다수자로서의 위치를 포기하기 싫어서라거나 차별에 둔감한 사람들의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언어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특히 톱다운 방식으로 일방적 지시에 의해 언어 규범을 바꾸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정치집단과 관련이 없는 언어학자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차별 없애려다 다른 차별 낳을 수 있다

스위스의 공식 언어는 4개(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망슈어)이고 언어권별 방송사가 따로 있다. 그중 프랑스어권 공영방송인 RTS가 올해 2월에 새로운 보도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앞으로 방송에서 ‘성 중립 언어’를 쓰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는 명사와 대명사에 성 구분이 있는 언어다. 예를 들어 ‘모두’를 뜻하는 대명사의 남성형은 tout(복수형 tous), 여성형은 toute(복수형 toutes)이다. 전에는 뉴스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시청자에게 “Bonne soirée à tous(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시청자 전체를 지칭하는 ‘여러분’을 남성형 대명사로 쓴 것이다. 앞으로는 이 표현에 여성형과 남성형 대명사를 함께 써서 “Bonne soirée à toutes et à tous”로 한다는 게 RTS의 새 방침이다.

가이드라인 발표 직후 스위스의 프랑스어 연구 기관인 DLF(Délégation suisse à la langue française)가 방송사에 공개편지를 보냈다. “공영방송에서 공정한 언어만 쓰도록 제한하는 건 언어를 ‘무기화’하는 것이다. 프랑스어에 치명적인 덫이 될 수 있다. 프랑스 학술원조차도 성 중립 언어 쓰기 운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DLF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스위스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공정한 언어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밝혔다. 공정한 언어 사용을 불법화하겠다는 뜻이다. 오는 10월 지지자 서명을 모으는 과정에 착수한다고 한다. DLF 회장인 오렐 샬레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정한 언어는 임의적으로 만들어져서 남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포용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복잡성 때문에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공정한 언어 운동은 성차별의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언어만 바꾸려 한다.”

스위스 중도파 정당인 기독민주당 의원이자 프랑스어 교수인 뱅자맹 로뒤도 공정한 언어 운동에 반대한다. “성 포용 언어 때문에 생기는 철자법과 문장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분열된 언어, 해체된 표현을 낳는다. 이것은 텍스트 해독이 불가능해지는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언어를 그냥 만들어낼 수는 없다. 언어는 몇 가지 기본 규칙에 따라 전체 인구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5월5일 장미셸 블랑케 프랑스 교육장관은 학교에서 성 포용적 언어 사용을 금지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AFP PHOTO

로뒤 의원이 말한 텍스트 해독 불가능성이란 뭘까. 공정한 언어가 앞서 든 예시처럼 ‘여성 여러분과 남성 여러분(à toutes et à tous)’ 정도의 수준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논의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우선 독일어의 경우를 보자. 역시 명사의 남녀 성 구분이 있는 독일어에서 남성 독자는 Leser(복수형 Leser), 여성 독자는 Leserin(복수형 Leserinnen)이다. ‘독자 여러분에게’라고 쓸 때 전에는 남성 복수형 Leser만 써서 전체를 대변했다. 요즘은 남성형과 여성형을 한 단어로 만들어 쓰는데, 이를 위한 방법이 네 가지 있다. (1)LeserInnen(남성형 복수에 여성형 복수를 연결시키되 연결 부분을 대문자로 씀) (2)Leser_innen (3)Leser*innen (4)Leser/innen이 그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프랑스어의 경우 중간점을 찍는 방법을 주로 쓴다. 그 결과 ‘파리 사람’을 뜻하는 parisien·ne·s(남성형, 여성형, 복수형 순)라는 새로운 형태의 단어가 등장했다. 일부 프랑스 언어학자들은 이 방식에 거세게 반대한다. 난독증 같은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글쓰기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에게 점으로 나뉜 단어가 언어학습을 할 때 큰 난관이 될 수 있다는 이유다. 장미셸 블랑케 프랑스 교육장관은 이런 이유로 지난 5월5일 학교에서 성 포용적 언어 사용을 금지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고정관념에 맞서 싸우고 누구나 동등한 기회를 누리도록 돕는 게 언어(프랑스어)의 역할인데, 공정한 언어의 복잡한 규칙과 불안정성이 오히려 이런 목적을 이루는 걸 방해한다는 게 블랑케 장관의 말이다.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가 다른 종류의 차별을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성 중립 언어 쓰면 텍스트 이해가 어렵다?

스페인어는 어떨까. 대부분의 스페인 명사는 어미에 따라 성별이 구분된다. 명사 앞에 붙는 관사도 성별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남성일 때는 los amigos, 여성이면 las amigas다. 스페인에서 공정한 언어 쓰기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어미 o와 a 대신 e를 사용하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즉 les amiges가 성 구분 없는 친구들을 뜻한다. 이 표현은 남녀 구분을 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 중 어느 쪽으로도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독일어나 프랑스어보다 포용 범위가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스페인어를 쓰는 남미 국가들 중 특히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젊은 세대 중심으로 ‘e 쓰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현재 좌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포데모스(Podemos) 정당이 앞장서서 이 운동을 주도한다. 이 정당 소속인 양성평등장관 이레네 몬테로가 지난 4월16일 연설에 앞서 인사를 하면서 “Todas, todos y todes”라고 말해서 화제가 됐다. ‘여러분’이라는 뜻의 단어로 todas(여성 복수형)와 todos(남성 복수형)가 있는데 거기에 성 중립형 todes를 덧붙인 것이다.

성 중립형 단어를 인사말에 사용해 화제가 된 이레네 몬테로 스페인 양성평등장관. ⓒzipi/EFE

이 같은 변화 속에서 혼란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기관, 개인마다 쓰는 방법이 제각각이고, 그러다 보니 인터넷 검색에서도 노출 결과가 달라진다. 로뒤 의원이 말한 ‘텍스트 해독 불가능’은 그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성 중립 언어를 쓰면 정말 텍스트 이해가 더 어려워질까. 스위스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 심리학자들이 이 주제로 실험을 했다. 같은 내용의 독일어 텍스트를 두 버전으로 만들었다. 하나는 남성 명사가 전체를 대변하도록 쓰이는 기존 방식, 다른 하나는 남성형과 여성형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학생 355명에게 읽도록 하고 이해도를 측정했다. 결과적으로 두 텍스트 이해도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여성형을 함께 쓰는 게 복잡하고 경제적 효용이 떨어진다고들 주장하지만 읽는 사람에겐 걸림돌이 아니었다는 얘기다(2019년 3월 스위스 심리학 저널에 실린 논문, 〈성 공정 언어가 텍스트 이해도에 영향을 미치는가〉).

유럽의 성 중립 언어 논란을 보면, 명사 성 구분이 없는 한국어는 얼마나 ‘공정하기 쉬운’ 언어인가 싶다. 그러나 무성 명사에 굳이 성별을 덧붙여 ‘여교사’니, ‘여류 작가’니 하는 단어를 쓰는 걸 보면 언어가 아니라 사용자가 문제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성 구분 없는 언어를 쓰는 터키나 이란의 여성 인권이 성 구분 있는 언어를 쓰는 독일·프랑스·스페인보다 낫지 않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 중립 언어를 쓴다고 절로 성 평등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차별 없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맞춰 진화하는 언어다. “변화에 맞춰 진화하지 않는 언어는 결국 사멸한다(취리히 대학 언어학 교수 노아 부벤호퍼).”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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