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원한 날씨에 신간 세 권을 읽었다. 피에로 말베치와 조반니 피렐리가 엮은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올드벤 펴냄, 2021)는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영혼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무솔리니가 이끈 이탈리아는 독일·일본과 함께 추축국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보다 10년이나 앞서 집권에 성공했지만, 이탈리아의 전력은 추축국 가운데 가장 약체였다. 무솔리니는 대담한 환상을 창조해내는 실력을 빼면 시체였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그는 로마에서 쫓겨났고, 독일이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에 급조한 살로 공화국(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이름뿐인 수상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북부를 장악한 독일과 파시스트 잔여 세력 대 이들을 몰아내려는 해방된 이탈리아 시민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는 내전이 벌어진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약 20개월 사이에 파시스트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레지스탕스들의 유서를 모았다. 이 책에는 총 201명의 유서가 실려 있는데, 이들의 나이와 직업은 우리의 이웃이 그렇듯 다종다양하다. 유서에는 하나같은 공통점이 있다. 용서해달라는 말! 이들은 부모, 가족, 애인 등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저로 인해 받게 되실 큰 고통에 대해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이 대목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는 체포와 처형 사이에 고문을 당했다. 열일곱 살 난 노동자도, 예순세 살 된 퇴역 육군 소장도 고문을 피하지 못했다. 밀라노에서 체포된 안토니오 포사티는 자신이 당한 고문을 유서에 자세하게 밝혔다. 그는 체포 첫날 눈썹과 속눈썹을 모두 뽑히고, 둘째 날은 손톱과 발톱을 모두 뽑혔다. 셋째 날은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촛불에 발꿈치가 태워졌고, 넷째 날은 전기고문을 당했다.
독재를 거쳤거나 외세에 점령당했던 국가가 해방 후에 마주하는 문제는 부역자 처벌이다. 무솔리니 정권은 국가파시스트당의 수백만 당원, 수십만 명의 기업가들과 지주, 국영회사 소유자들, 지식인들의 공모로 탄생했다. 그들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살로 공화국의 협력자들은 단죄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을 심판해야 할 수많은 판사와 배심원들 또한 피고인들 못지않게 책임이 있었기에 그러한 판결을 거부했다. 크리스토퍼 듀건의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개마고원 펴냄, 2001)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실용주의 혹은 일종의 집단적 과실이라는 정서가 승리를 거두었고 체계적인 숙청을 단행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전후 이탈리아의 숙청 문제가 흐지부지된 것과 향후 40년 동안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이 일당 체제를 유지하게 된 것 등은 미국의 점령 정책에 따른 것으로, 일본에서 미군정이 진행했던 점령 정책도 그와 같았다.
독일 정도면 성평등 이루어진 국가?
채혜원의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마티 펴냄, 2021)은 베를린에서 5년째 살고 있는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쓴 책이다. 이 한 권으로 독일 페미니즘의 현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여느 변혁운동과 똑같이 페미니즘 역시 그 지역의 역사와 사회·문화를 반영한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이주민과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느니만치 독일의 페미니스트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적극 추구한다. 여성 문제를 실천하면서 인종·계급·민족과 같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함께 살피는 교차성 페미니즘은 시스젠더(cisgender·출생 시 법적 성별과 성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여성만이 아니라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인터섹스(intersex·間性)와도 긴밀하게 연대한다.
지은이는 “‘독일 정도면 성평등한 국가’라고 믿는 이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라면서 독일의 실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독일 남성들은 여성 납치·강간·살해를 멕시코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치부하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72시간마다 ‘여성 살해’가 발생한다. 한 해에 100명 넘는 여성이 전남편이나 이별한 남자 친구에게 살해당하는 독일은 유럽에서 여성 살해 건수가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독일은 베르테르의 나라가 아니던가.
‘여성 살해’ 문제에서 개별 국가의 문화적 특성을 논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랑은 등가교환이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결혼이란 ‘교환이 잘 된 것’을 뜻하고, 선남선녀란 ‘어느 쪽도 기울지 않는 관계’를 가리킨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교환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고,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이고, 나의 전부를 주는 것이다. 즉 비등가 교환이다
예컨대 자신을 사랑한다는 B에게 A가 “너의 오줌을 줘, 너의 오줌을 먹고 싶어”라고 말하면 B는 선뜻 A에게 오줌을 줄 수 있을까? B는 생리적인 현상에 따라 생겨나고 배출하던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것은 단연코 A에게 주고 싶은 게 아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A에게 B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의 종교를 바꿔줘”라고 말하면 A는 그럴 수 있을까? 사랑은 교환이라고 굳게 믿어온 A의 발목을 잡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결코 사랑이나 결혼의 교환 품목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A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사랑은 교환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는데, 덜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이별을 상상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쪽(A)이 다른 한쪽(B)에게 이별을 하자면, B는 A가 원하는 이별을 줄 수가 없다. 준다는 의미는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인데, B는 이별을 가정하거나 연습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고, 내가 차마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이다. 쓰라리고 아프지만, “자기 행복해야 해!” A도 B도 처음 사랑을 할 때는 상대방을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처럼 말한다. 실상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애초에 죽음은 내가 가질 수 없고 줄 수 없는 것이다(순교자와 자살자만이 그것을 소유한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들은 칼로 자기 배를 찌르면서 “널 사랑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여자를 찌르면서 “널 사랑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행위이다. 죽음마저도 그렇다. 베르테르를 보라. 그가 어디 로테를 죽였던가? 조나단 M. 버만의 〈백신 거부자들〉(이상북스 펴냄, 2021)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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