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올리비에 푸리올의 〈노력의 기쁨과 슬픔〉(다른, 2021)은 첫 페이지를 오르페우스 신화로 시작한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지하 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플루트 연주를 듣고 감동한 저승의 왕 하데스로부터 아내를 데리고 이승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이때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지상에 닿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아내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알겠느냐?” 오르페우스는 이처럼 쉬운 조건을 듣고 속으로 하데스를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오르페우스는 이승에 닿기 직전에 뒤따라오는 아내를 뒤돌아보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영영 잃고 말았다.

오르페우스는 지하계에서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에 줄곧 ‘절대 뒤돌아보면 안 된다’고 했던 하데스의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아내보다 앞서 걸으며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왜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걸까?” 사실 뒤돌아본다는 행위 자체에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지상에 닿기 전까지 절대 코를 풀지 마”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지상에 닿기 전까지는 절대 플루트를 불면 안 돼”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데스가 교묘하게 감춘 함정은 조건의 내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르페우스로 하여금 잠시도 생각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에 있었다. 오르페우스는 생각을 비웠어야 했다. 이것의 또 다른 판본이 〈톰과 제리〉에 나온다. 생쥐 제리를 추격하던 고양이 톰이 절벽을 지나 허공을 걷다가, 밑을 내려다보라는 제리의 손가락질에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추락한다. 두 경우 모두 생각이 화를 불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생각하면서 살라는 말을 들었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올리비에 푸리올은 “우리에겐 그와 정반대의 태도가 필요하다. 노력하면 실패하게 되어 있다.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하는 격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반복적으로 “생각의 늪에 빠지지 말고, 사고를 멈추라”고 주장하며, “바라거나 노력하기를 멈추고 아예 게임을 그만두라”고 강조한다.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 다이버 자크 마욜,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 곡예사 필리프 프티, 테니스 선수 야니크 노아, 요리 연구가 알랭 파사르의 성공 비결이 그랬다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노오력’에 소진(burnout)당한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복음처럼 들린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 올리비에 푸리올 지음, 조윤진 옮김, 다른 펴냄

자본 친화적인 불교의 선 수행

지은이는 자신이 강조하는 ‘노력하지 않음(effortlessness)’ ‘내려놓기’ ‘비행위(inaction)’ ‘느긋함’ ‘무용(無用)’ 등이 프랑스식 삶과 프랑스식 미학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앙리 베르그송, 알랭, 장폴 사르트르, 질 들뢰즈, 미셸 세르 등의 프랑스 철학자의 이름을 주워섬기는데, 가스통 바슐라르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모두가 테니스 챔피언이 되고, 잠수부가 되고, 곡예사가 되고, 피아니스트가 될 수는 없다. 이쯤에서 몽상과 행복한 상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와 함께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누구든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은 챔피언이 될 수 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으며, 어떠한 경쟁도, 걸림돌도 없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혜와 논리로 도배되어 있지만, 이 책의 주제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념무상·선(禪)·명상·만트라와 같은 불교적 사유 방식이다. 노력하기를 그치고 생각하기를 물리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자아의 소멸이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와 비슷하다. 나는 자아를 잊음으로써 나를 짓누르는 짐을 벗게 되는 것은 물론, 나보다 더 큰 전체(우주)의 일부가 된다.

이 책은 재독일 철학자 한병철이 말한 성과주체에 대한 좋은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긍정성으로 무장한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닦달한 끝에 소진하고 마는데, 그처럼 노력하는 나를 소진시키는 적은 다름 아닌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나 자신이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은 바로 그러한 자아를 주저앉혀, 소진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라는 지혜를 담았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이 가진 미덕과 효능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성과주체에 대한 해독으로 제시된 선적인 해결책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불교 파시즘:선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교양인, 2013)에 폭로되었듯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병사들을 살인 기계로 만들기 위해 선 수행법을 병사들의 정신교육에 다양하게 활용했다. 선의 요체인 무아(無我)는 병사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동시에 병사들을 상관의 명령에 고분고분한 도구로 만들었다. 과장하자면,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선사(禪師)로 훈련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내가 없으니 죽음도 없다’라는 선의 경지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내던졌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과 유럽에서 불교의 선 수행이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선이 자본 친화적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올리비에 푸리올은 마치 죽비로 치듯이 “생각을 비워!”라고 일갈하는데, 그의 교시는 이 시대의 갑이 을에게 내리는 것처럼 들린다. 지난 6월26일 숨진 서울대 청소 노동자 이 아무개씨의 동료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건물 내부 청소뿐만 아니라 건물 밖 제초작업까지 해야 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했지만, 돌아오는 건 해외 전문가들의 제초작업 영상이었습니다. 팀장님은 저희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저희는 팀장님 말에 따르는 기계가 된 것 같았습니다.” 갑은 을에게 아무 생각 없는 기계가 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도구가 되라(노력하지 마라)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약도 오남용의 위험이 있듯이 자기 계발서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당신이 상위 20%에 속하거나 예술가·스포츠 선수와 같은 특별한 직종을 가졌다면 〈노력의 기쁨과 슬픔〉을 읽어볼 만하다. 반대로 당신이 금수저나 은수저와 거리가 먼 보통 사람에 속한다면 도리스 메르틴의 〈아비투스: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다산초당, 2020)을 읽어야 한다. 아비투스(습성)라는 용어를 창안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아비투스를 체화하게 된다는 것을 밝힌 업적으로 사회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가 되었다. 하류층의 관심은 지역에 머물고, 중산층은 전국을 보며, 상류층의 관심은 전 세계로 향한다. 그런데 부르디외는 하층계급에서 태어났을지라도 학습을 통하여 아비투스를 적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도리스 메르틴이 적임자라고 생각해서였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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