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나는 〈조국의 시간〉(한길사, 2021)이 여러 인터넷 서점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아직 책을 읽지 않았다. 2019년 8월9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민정수석을 신임 법무부 장관 후보로 내정하면서 대한민국은 ‘조국 대전’에 돌입했다. 마치 전쟁이 벌어져서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진 것 같았다. 서울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누어 세 싸움이 벌어진 중에 내가 아는 여자 친구가 서초동에 간 모양이다. “그곳 분위기가 어땠느냐”라고 물어보았다. “사람들이 ‘검찰개혁, 조국 수호’를 외쳤어. 그런데 나는 ‘검찰개혁’만 따라 하고 ‘조국 수호’는 따라 하지 않았어. 내 주위의 사람들은 아무도 따라 안 했어.”

‘조국 사태’가 한창일 때, 자칭 진보·좌파라는 이들이 서초동에 모인 시위자들을 ‘멍청이·파시스트·노예’라고 조롱했다. 아마 이들은 〈조국의 시간〉을 구입한 사람들도 그렇게 비웃고 있을 것이다. 개념의 자의적 사용은 어제오늘 생겨난 일이 아니지만, 파시즘 또는 파시스트라는 말은 어느덧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붙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 말이 되었다.

파시즘은 무장을 갖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초법적인 수단을 통해 국가를 점유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히틀러는 파시즘의 원조인 무솔리니와 달리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집권 후에는 파시즘과 같은 노선을 걸었다. 나치즘만의 두드러진 특징은 인종주의였는데, 현재는 인종주의자도 파시스트라고 부른다. 파시즘이 사회문제 해결 방법을 국수주의와 전통에서 찾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국수주의와 전통은 인종주의와 내통한다). 서초동 시위자들에게서 파시즘의 악취를 맡았다는 자칭 진보·좌파 인사들 중에 “대중의 자발적 동원이 파시즘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무력행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시민의 자발성은 파시즘의 특징이기보다 민주주의의 특징이다.

이렇게 아까운 지면을 허비하는데도, “시대에 따라서 개념도 진화하고, 내포도 바뀌는 것 아니냐?”라고 뻗대는 이들이 있다. 한국에서 파시즘의 용법을 크게 바꾸어놓은 것은 1999년도에 처음 나와서 2001년도까지 논쟁이 지속되었던 ‘일상적 파시즘(내 안의 파시즘)’의 등장이다. 이 용어가 지식계에 지분을 얻으면서 원래는 박정희·전두환 같은 군사정권과 국가주의자들을 비판할 때 전용되던 파시즘이 좌파와 운동권을 비판할 때도 사용 가능한 말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국의 좌파는 박정희·전두환과 맞먹는 폭압과 무법을 행사한 적이 없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채 정치인을 연예인처럼 따르는 현상이라면 ‘빠시즘’이 적당하다.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을 멍청이·파시스트·노예라고 조롱한 사람들 가운데, 한층 문제적인 이들은 “서초동에는 김용균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질타는 물론 있어야 하지만 사려를 찾기 힘들다.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이 김용균의 죽음에 무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좌파의 고민은 서초동의 대중을 자신의 수원(水源)으로 유인하는 수로를 파는 것이지, 그들을 자신과 분리하는 데 있지 않다. 노동자 개개인의 죽음에는 연민을 느끼는 시민들이 왜 진보정당이나 노동조합이라면 질색하는 걸까.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한 채 푸념은 계속된다. “김영민의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에는 톨게이트 노동자가 없다!” “손정민을 애도하는 한강에는 이선호가 없다!”

조국 사태의 발단은 의전원과 대학원 입학에 필요했던 두 자녀의 ‘스펙 품앗이’였다. 아들의 인턴 활동을 허위로 작성한 이는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남아 있는 상급심에서 두 자녀의 스펙 품앗이와 총장 직인 건이 모두 무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스펙 품앗이로 불붙은 조국 사태를 조국 한 사람의 도덕성 문제로 몰아가서도 안 되고, 조국 한 사람을 타도하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돈과 지위가 있는 상류층은 아무런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자녀의 입시에 필요한 스펙을 안겨줄 수 있고, 자녀에게 노른자 인턴과 신의 직장을 마련해줄 수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병역 특혜 문제가 불거졌지만 단언컨대 거기에 불법은 없을 것이다. 지위와 돈은 합법적으로 무엇인가를 얻거나, 싫은 것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해준다. 조국 사태의 핵심은 조국이라는 고유명이 아니다.

“대안이 없다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고 난 사흘째인 2017년 5월12일자 〈한국일보〉 제2면에는 ‘비검찰 출신 개혁 소장파 발탁, 檢에 劍 겨눈다’라는 기사와 ‘조국 수석 임명된 날 김수남 총장 사의, 무언의 항의? 개혁 길 터주기?’라는 기사가 상하로 배치되었다. 두 기사는, 조국 민정수석이 강한 검찰 개혁주의자라는 것과 검찰의 저항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으로 종합·요약된다. 이것은 “조국 수사는 검찰개혁을 저지하려는 검찰 쿠데타이며, 조국 일가는 검찰개혁을 주장하다 핍박받는 순교자”라는 조국 지지자들의 음모론이 근거가 없지 않다고 말해준다. 그렇더라도 서초동의 구호는 “조국 사퇴, 검찰개혁”이었어야 한다. 문학평론을 하는 친구의 말처럼 조국은 ‘사라지는 매개자’로 역사의 몫을 마쳤어야 했다.

이제 진짜 멍청이·파시스트·노예들을 호명할 차례다. 내년 대선이 ‘이재명 대 윤석열’로 좁혀진다면 윤석열을 찍겠다는 한때의 진보와 자유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윤석열은 권력으로부터 검찰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임면권자와 싸웠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노골적인 정치 활동이었다는 것이 이제는 모두 드러났다. 단군 이래 최대의 ‘정치 검찰’이었던 윤석열은 국민을 상대로 야바위를 했다. 더불어민주당이 그래도 국민의힘보다 낫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새로 태어날 힘이 있다면, 둘 다를 거부해야 한다.

“진정한 용기는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안에서 얻는 꿈과 희망은 곤경 속에서 치열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집착이며, 이론적인 비겁함의 신호다. 진정한 용기는 터널 끝에서 보이는 빛이 어쩌면 반대 방향에서 다가오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캄캄한 터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빛은 당신의 두개골을 박살 낼 기차의 헤드라이트이지 희망이 될 수 없다.

책 제목도 밝히지 않고 인용한 이 철학자는, 어떤 경우라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말라고 말한다. 변화는 바라지만 자신의 삶은 바꾸고 싶지 않은 자들, 나는 바뀌고 싶지 않지만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은 둘 너머를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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