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프란츠, 2017)를 읽다가 도중에 책을 덮었다. 지은이는 영화로 더 유명한 〈세상의 모든 아침〉(문학과지성사, 2013)의 원작자다. 17세기 중반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비올라다감바 연주자였던 생트 콜롱브와 마랭 마레를 주인공 삼았던 이 소설에서, 그 자신이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던 데다 자칫 파이프오르간 연주자가 될 뻔하기도 했던 키냐르는 음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키냐르는 이 작품을 발표했던 1991년 작가 생활을 하며 음악 기관과 음악제 임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96년 갑작스러운 혈관파열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귀환했는데 〈음악 혐오〉는 이즈음에 집필됐다.

독서를 포기하게 만든 대목은 책 제목과 같은 제목을 가진 제7장의 첫머리였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절멸수용소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 늘 음악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왔지만 난데없이 튀어나온 저 대목은 망치와 같았다.

키냐르가 던진 충격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널리 알려진 힐난을 곧바로 떠올리게 했다. 그가 말한 서정시는 문자 그대로의 서정시만 아니라 예술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당연히 음악도 포함된다. 하지만 절멸수용소에서 600만 희생자를 가스실로 보내는 데 피를 묻혔던 유일한 예술이 음악이라면, 이제 아도르노의 은유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정확한 사실로 수정되어야 한다. 음악은 언어(이데올로기)가 희박하다는 오래된 오해 덕분에 자신의 급소를 지금까지 잘도 숨겨왔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음악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더욱 쉽고 효과적으로 권력이 동원하는 수단이 된다. 책을 덮고 아우슈비츠와 음악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이경분의 〈수용소와 음악-일본 포로수용소,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의 음악〉(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1)이 출간된 것을 알게 되었다.

희망의 매개와 끔찍한 고문 사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가 체코에 세운 테레지엔슈타트와 폴란드에 세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음악이 흘러넘쳤다. 국제적십자의 사찰에 대비해야 했던 테레지엔슈타트의 경우 위장과 선전에 필요했기 때문에 수용자들의 음악 활동이 권장되었다. 하지만 오로지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아우슈비츠에서도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 수용소 사령관들은 경쟁하듯 오케스트라를 육성했다. 4년 반 동안 대략 110만~150만명이 살해되었다고 추산되는 아우슈비츠에는 최대 일곱 개의 오케스트라가 운용되었고, 가장 규모가 큰 중앙 수용소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150명이나 되었다.

수용소를 책임진 SS 장교와 이들의 음악 애호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니다. 나치 엘리트는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열외자도, 정신적으로 모자라는 사디스트도, 인간에게 증오를 품은 하층계급 출신도 아니었다. 유대인을 절멸시키는 데 앞장선 나치 고위층은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와 교양 있는 집안 출신이 많았고, SS 중에는 야망 넘치던 젊은 박사들과 기술 관료가 있었다. 문화예술로 교양을 치장해온 이들에게 아우슈비츠는 유럽 전역에서 연행된 우수한 음악가들을 무료로 착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

히틀러는 독일 고전음악에서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의 SS가 선호했던 음악이 모두 독일 고전음악은 아니었다. 이들은 수용소 오케스트라에 세미클래식, 가벼운 오페라타 음악, 유행가, 영화 히트곡, 댄스곡은 물론이고 나치가 공식 금지한 재즈를 연주시켰다. “나치 엘리트들이 중요하게 선전했던 ‘음악의 독일성’이나 ‘독일 민족의 음악성’ 등의 구호는 대중음악이 대세였던 아우슈비츠의 일상에서 그리 부각되지 못했다. 음악은 프로파간다보다 실질적으로 활용되어야 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여러 가지 기능적인 이유로 쉴 새 없이 음악이 연주되었다. 먼저 열병식을 하거나 수용자들을 일터로 보내거나 복귀시킬 때 행진곡이 필요했고, 새로운 수용자가 입소할 때도 그들의 긴장을 풀어줄 음악이 있어야 했다. 탈출 시도자나 규율 위반자는 가스실이 아니라 공개 처형을 했는데, 이때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희생자를 비웃기 위해 흥겨운 유행가를 조롱조로 연주해야 했다. 예컨대 설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 같은 것을. “내일은 내일 또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 거야/ 근심을 털어놓고 다 함께 차차차/ 슬픔을 묻어놓고 다 함께 차차차….” SS가 저런 야비한 주문을 한 이유는 자기기만을 통해 죄책감과 살인의 심각함을 날려버리고 싶어서였다.

수용소의 음악은 살인자를 정신적으로 마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우슈비츠의 고위 간부였던 요제프 멩겔레와 한스 프랑크가 가스실로 갈 희생자를 선별하는 작업이 끝나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청해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보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가해자 스스로 희생자의 연주에서 위로를 얻고 기분을 전환하는 셈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는 작업이 면제되고 더 나은 식단이 제공되었다.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던 그들에게는 최상의 연주만이 그들의 생명줄이었다. 그렇다면 갖가지 상황에서 강제로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수용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2005)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음악을 들으며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다진 반면,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와 같은 아우슈비츠 체험기를 남기고 자살한 프리모 레비는 그 경험을 지옥같이 끔찍한 고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상반된 태도는 두 사람의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대변하지 않는다. 진실은 수용소 소장의 명령으로 성탄절 전날 여성 병동의 환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었던 시몬 락스의 증언에 있다. 초반에는 모든 여성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특히 폴란드 여자들은 음악이 울음소리에 묻힐 정도로 오열했다. 그러나 두 번째 연주가 시작되자 눈물은 비명으로 이어졌다. “그만! 그만! 여기서 나가! 꺼져! 조용히 죽게 내버려둬!” 음악은 언어가 없는 장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의 온갖 언어가 깃들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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