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입문〉, 로널드 J. 글로섭, 이론과실천, 1986년ⓒ윤성근 제공

O씨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그가 가게를 잘못 알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간혹 그런 사람이 있기에 그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마치 프로레슬러처럼 덩치가 컸다.

설마 이 사람은 여기가 헬스장인 줄 알고 들어온 건 아니겠지?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서더니 자기 이름을 말한 다음 책을 찾고 있는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동생이 그러던데요? 책이라고 하면, 어디엔가 있다면, 어떻게든 찾아준다고요. 저를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나는 의자를 꺼내 권했다. 직감적으로 뭔가 복잡한 사연이 얽힌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O씨는 자리에 앉아 말을 이었다.

“시간강사로 일하던 제 동생은 반년 전 즈음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의식은 찾았지만, 여전히 사람들하고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상태입니다. 동생과 저는 두 살 터울인데, 어릴 때부터 우린 아주 달랐습니다. 공부를 즐기던 동생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저는 체육관에 취직해 헬스 트레이너가 됐죠. 지금은 독립해서 작은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처음부터 시간강사로 일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한 대학 조교수가 되어 일했는데 거기서 선배 교수가 연구비를 사사로이 쓰는 걸 학교에 알렸다가 퇴출당했다. 그는 입시학원에서 일하다 고된 업무 때문에 건강이 나빠졌다. 그는 자기가 일하는 체육관에서 사무 일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동생은 거절했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철학

그 이후 두 사람은 사이가 점점 벌어졌고 O씨는 동생을 찾아가 쌓아둔 책을 다 없애버리겠다며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때 동생이 〈철학입문〉이라는 책을 보여줬다. 그걸 읽어보면 자기가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며. 하지만 다혈질인 그는 자기를 놀리는 거로 생각해 그 책을 동생이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 동생이 대학 시간강사로 일하던 중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 가보니 동생은 의식이 거의 없었다. O씨는 자기가 동생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 자책했다.

그는 문득 동생이 책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철학입문〉을 찢어버리던 날, 동생이 해준 말이다. 동생을 위해 뭐라도 하고픈 심정으로 그 원고를 찾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동생을 도와서 책을 완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철학 용어가 즐비한 그 원고를 읽는 것부터 높은 벽이었다. 그는 동생이 권해준 〈철학입문〉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철학입문〉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동생분 말씀처럼, 어딘가에 있다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겠지요. 실은 그게 철학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O씨는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철학은 인생의 답을 찾는 학문 아닌가요?”

“아뇨. 인생의 답은 마치 우주에 있는 외계 문명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엄청나게 많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철학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철학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동생분이 힘겹게 찾으려고 했던 것도 답이 아니라 거기로 향해 가는 길일 겁니다.”

이야기를 마친 뒤 책방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넓고 듬직한 등을 보고 있으니, 조만간 동생이 찾으려고 했던 그 길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들이 만날 삶의 진실이 어떤 모양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어디엔가 있다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형제는 이미 길 위를 걷고 있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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