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가을, 낌새가 수상한 한 남성 손님이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다른 일을 하는 척 몸을 돌리고 곁눈질로 그 손님을 주의 깊게 살폈다.

잠시 후,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는 소설 책장 앞에 잠시 멈춰 있는가 싶더니 책 한 권을 뽑아 들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가 문을 완전히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불러세웠다. 책 훔치는 걸 봤다고 다그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운이 없군요.”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책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소설 〈에덴동산〉이다. 이 책은 작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남긴 최후의 소설이다. 절판본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훔칠 만큼 비싼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운이 없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 분명히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어 그에게 책 훔친 일은 비밀로 해줄 테니 이유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O씨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불운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첫 번째 사건은 초등학교 5학년 시험시간에 실수로 연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주우려고 할 때 선생님에게 혼난 일이다. 선생님은 그가 커닝을 했다며 시험지를 찢어버렸다.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말했더니 “네가 운이 없었구나”라며 아들을 위로했다. 그때부터 그는 모든 일을 운 때문이라고 믿게 됐다. 집이 가난한 것도, 무능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도 운이 없기 때문이다.

“밤사이에 운이 바뀐 것 같아”

대학에 갔을 때 이 불운한 사나이는 한 여학생을 좋아해서 헤밍웨이의 소설 〈에덴동산〉을 선물했다. 그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그 안에 마음을 전하는 쪽지도 써서 넣었다. 하지만 여학생은 자신이 불교 신자라면서 책을 받지도 않았다. 종교 서적이 아니라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졸업 후에도 불운은 계속됐다. 여러 회사를 전전했고 어떤 곳에서는 월급을 떼이기도 했다.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다 팔이 부러진 일도 있다. 몇 년 전에는 동업하자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사채까지 쓰게 됐다. 그는 지금도 일정한 거주지 없이 여관을 옮겨 다니며 허드렛일로 생활하는 형편이다.

O씨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 불운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에덴동산〉을 읽던 순수한 대학 시절로 가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그 책을 훔친 이유를 고백했다. 몇 년 동안 찾아다닌 그 책을 훔치는 데 성공하면 그날부터 운이 트일 거라 믿었다는 얘기다.

사연이 있다고는 하지만 책을 훔친 건 절도 행위다. 나는 다른 처분을 하지 않을 테니 5000원을 내고 책을 사가라고 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나오는 연인도 운을 피해 도망간 게 아니라 당당히 맞섰기 때문에 사랑을 이룬 게 아니냐고 말해줬다.

“오늘 아침, 아니면 밤사이에 운이 바뀐 것 같아.”

우리는 주인공 데이비드가 그렇게 말하는 장면을 함께 찾아 읽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운을 통과하려는 두 사람의 모험 정신이 없었다면 결국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겠지요.”

O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내게 “몇 년 동안이나 찾던 책인데 운 좋게 여기서 발견했습니다. 이런 책이라면 돈을 더 받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책값을 몇 배나 더 내고 돌아갔다. 책을 훔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책에 나온 말처럼 오늘 아침, 아니면 밤사이에 그의 운이 바뀌어 자신의 삶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마음으로 응원했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