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기묘한 사건을 들고 나를 찾아온 C 씨를 만나고 나서 세상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로 가득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았다. 20대 중반 나이에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책방을 방문한 C 씨는 알 수 없는 책을 찾아달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라도 괜찮으니까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자 스마트폰을 내게 보여줬다.

그것은 침대에 기대 있는 한 노인을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책…. 캐…. 구우…. 초오교오….”

영상 속 노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C 씨는 노인이 말하는 게 책 제목이라고 했다.

영상 속 노인은 C 씨의 할아버지로, 치매 진단을 받아 몇 년 전부터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증상이 심하지 않았다. 노인은 평생 모은 2만여 권의 책으로 서재를 만들었고, 병원에 있으면서도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원하는 책의 제목은 물론이고 그 책이 있는 위치까지도 대강 알고 있었기에 서재에서 책을 찾아 병원으로 가져가곤 했다. C 씨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그 일은 주로 C 씨의 어머니가 맡았다. 하지만 이제는 병이 악화되어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다.

“할아버지는 평생 교육자로 사셨어요.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셨죠. 책을 많이 수집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성격이 밝은 분이 아니었거든요. 저를 보면 붙잡아놓고 늘 책 얘기만 하시니까요. 그래서 명절 때 집에 가면 일부러 할아버지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제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 찾으시는 이 책이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렇게 사장님을 뵈러 온 거예요.”

C 씨는 내게 서재에 직접 방문해서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책을 못 찾는다고 해도 장서 2만 권이 있는 서재를 구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설렜기 때문이다.

노인의 서재는 서울 성북동의 2층 단독주택에 있었다. 1층 거의 전부를 개조해 서재를 만들었는데, 방 3개의 벽을 허물어 하나로 합친 독특한 구조였다. 나는 서재에서 한참 동안 나오지 못하고 미로에 갇힌 듯 방황했다. 마치 영상 속 노인이 이 방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책 한 권을 찾아 나오면서 두 가지 가능성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C 씨에게 〈켈케골의 종교사상〉이라는 낡은 책을 주었다. 그 책 제목이 영상에서 노인이 말한 것과 가장 비슷하게 들렸다. 나는 책을 주면서 이번엔 어머니가 아니라 C 씨가 직접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게 나의 두 번째 가능성을 확인할 방법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

병원에 다녀온 C 씨는 노인이 책을 좋아했다며 내게 책을 찾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노인이 환하게 웃으면서 한참 동안 C 씨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말씀하신 두 번째 가능성이란 게 뭔가요?”

“영상에서 어르신이 말씀하신 게 책 제목이 아닌 경우죠. 서재를 둘러보다가 저는 그게 책이 아니라 채고은님, 어르신의 손녀딸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제 이름을요? 무섭고 무뚝뚝한 인상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정말로 저를 보고 싶었던 걸까요? 할아버지의 진심은 잘 모르지만, 앞으론 자주 인사드리러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름다운 한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책 수만 권으로 가득 찬 서재와 바꿀 만큼 소중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일까? 나는 책 찾는 일을 하는 헌책방 주인이다. 그런데 책을 찾고 보면 언제나 거기엔 사람의 마음이 함께 스며 있다. 책과 사람은 이렇듯 아이러니하게 서로 맞닿아 있다.

※ 이번 호로 ‘책 읽는 독앤독-헌책방에서 만난 사람’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켈케골의 종교사상〉 H. V. 마틴, 성암문화사, 1960년 ⓒ윤성근 제공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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