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

B 씨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했을 때, 나는 솔직히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긴 머리는 상투처럼 묶어 정수리에 쪽을 지었고, 얼굴엔 맨살이 별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염이 덥수룩했다. 차림새는 깔끔했지만, 마치 스파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변장한 모습 같아서 나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사장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5년 만이네요. 그때 제가 가진 책을 사장님께 전부 넘겨드리고 여기저기 좀 돌아다녔거든요.”

이제야 기억난다. 5년 전, 한 젊은 의사에게 1000권이 넘는 책을 한꺼번에 사들인 적이 있다. 책도 많았거니와 컬렉션 자체가 훌륭해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설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그때 그 사람이란 말인가? 내 기억으로 그는 훌쩍 큰 키에 하얀 와이셔츠, 방금 면도를 한 듯 매끈한 얼굴이었는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사람은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방금 돌아온 시간 여행자라 해도 믿을 만큼 히피 스타일 그 자체다.

“실은 말이죠, 사장님께 팔았던 책 중에 제가 다시 사고 싶은 책이 있거든요. 그게 아직 여기 남아 있지는 않겠죠? 크리슈나무르티의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입니다. 청하출판사에서 펴낸 책이고요. 흥미가 당기신다면 제가 지난 5년 동안 뭘 하며 지냈는지 들려드릴 테니 책을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람 살리는 직업이지만

나로서는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5년 전에도 B 씨가 왜 책을 다 처분하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아내와 이혼소송 절차를 밟고 있었다. 책을 처분하는 것도 아내와 헤어지고 집을 비우기 위해서였다.

“사람 살리는 일을 직업으로 가졌다지만, 정작 저 자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주변 정리를 하던 중 마침 아는 사람이 한 스님을 소개해줬습니다. 저는 자유롭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놨습니다. 2년 동안 절에 머물며 스님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B 씨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 스님이 알려준 대로 수행이라는 것을 해봤지만 마음은 언제나 억압된 상태 그대로였다.

절을 나온 뒤 개신교 목사, 유명한 교수, 그리고 스스로 도를 통했다는 사람까지, 많은 이들을 만나고 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자유를 말할 뿐 그것을 그대로 B 씨에게 적용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강원도 홍천의 팔봉산 근처 허름한 농가를 사들여 2년 동안 〈월든〉의 소로처럼 자급자족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얼마 전, B 씨는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라는 책의 어떤 한 구절이 떠올라 갑자기 팔봉산 생활을 청산하기로 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독립했지만, 해방된 사람들은 거의 없다”라는 문장이었다. B 씨는 그 책을 후배에게 선물로 받았는데 대충 읽어보고 말았다는 거였다. 도대체 왜 그 책이 몇 년 만에 운명적으로 다가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책은 두어 달 만에 찾아서 B 씨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B 씨가 책방에 오기 전에 읽어보니 과연 그가 떠올린 구절이 책 속에 있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를 찾기 전에 자유라는 게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도의 성자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온갖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유라고 말한다.

그는 조만간 절차를 밟아 병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시 의사가 되면 사람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두루 살피는 일을 하겠다며 다짐했다. 책을 옆구리에 낀 B 씨의 발걸음이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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