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

어느 날 오후 책 한 권을 찾아달라며 찾아온 손님 S 씨는 〈롤리타〉를 구해달라고 했다.

“나보코프가 쓴 책 맞죠? 말씀하신 〈롤리타〉는 절판된 책이 아니라서 서점에 가면 살 수 있는데요.”

“물론 그렇지요. 〈롤리타〉는.” 이렇게 말하면서 S 씨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 말을 이었다.

“제가 찾는 건 〈롤리타〉가 아니라 〈로리타〉입니다. 1980년대에 모음사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어야 합니다. 그때는 제목이 ‘로리타’였죠.”

그 책이라면 중고 시계를 수리해 팔며 책을 수집하는 N 씨가 예전에 보여준 일이 있다. 표지가 멋진 책이다. 책을 찾아주는 수수료로 사연을 받는다고 하니 S 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정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곧장 과외로 하숙비를 벌었습니다. 전두환 시절이라 과외는 금지였지만 몰래 했죠. 제가 맡은 첫 과외 대상은,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습니다. 저는 곧 이 여학생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명랑한 성격인데 생각하는 태도가 아주 진지했습니다. 가끔은 저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그즈음 저는 나보코프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나오는 험버트와 저는 다릅니다. 물론 그 여학생과 어린 돌로레스도 같지 않고요. 험버트는 뼛속까지 아동성애자 아닙니까? 저는 맹세코 그런 감정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S 씨가 험버트와 다른 결정적인 부분은, 그가 여학생에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S 씨는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밤새도록 자신을 욕하고 훈계하는 한편 〈로리타〉를 읽으며 험버트를 향한 연민의 정을 느끼는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여학생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는 더욱 무미건조하게 행동했다.

여학생과의 과외는 1년 동안 계속됐고 그 이후로는 소식을 끊었다. S 씨는 곧 군대에 갔고, 복학해서 공부를 마쳤다. 졸업 후 그는 회사에 취직했다. 거기서 맘씨 좋은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그사이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전역한 직후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여학생이 학교 과 사무실로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놀랍게도 여학생은 S 씨와 과외를 하던 때 그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걸 예감했다고 털어놓았다. 여학생은 S 씨와 만나고 싶다는 말로 편지를 마쳤다.

“하지만 저는 그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학생도 더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S 씨는 편지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상대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곧 대학 입시라는 인생의 커다란 문 앞에 선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은 결과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 반대가 될 거라는 걱정이 더 컸다. 입시를 먼저 겪은 S 씨는 지금 여학생이 서 있는 위치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잘 알고 있기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롤리타〉가 아니라 〈로리타〉

최근에 그는 아내와 대화하다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뜻밖에도 S 씨의 아내는 아름다운 이야기라며 그의 말을 한참 동안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러곤 당시에 읽었던 〈로리타〉를 다시 찾아 자기와 함께 읽어보면 어떻겠느냐며 제안했다. 이상이 S 씨를 이곳 헌책방까지 오게 한 결정적 이유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즘 다시 번역된 〈롤리타〉를 읽어봤는데 예전 그 느낌이 아니더라고요. 그때 읽었던 책이 줄 수 있는 감정의 울림이란, 다른 책에서는 찾을 수 없나 봐요.”

맞는 말이다. 책은 다 같은 책이지만 꼭 만나야 하는 그때의 책이 있다. 그 책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젊은 날의 추억, 사랑, 번민, 그리고 망설임과 선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들을 때마다 매번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오래된 음악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